18.10.28 16:26최종 업데이트 18.10.28 16:26
 

3.1운동 당시 비각(정동) 근처에서 만세운동을 구경하는 사람들 ⓒ 시민주권

 

1919년 3월 1일을 시발로 한반도 전역과 한인이 사는 세계 여러 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는 우리 민족사에 크나큰 변환의 계기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 강점당한 한민족이 국치 9년만에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맨손으로 궐기한 민족사적 자주독립혁명은 상하이에 임시정부 수립과 봉건군주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공화제로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컬럼비아대 역사학 교수 프리만(1852~1930)은 "로마는 그 이전 역사의 모든 흐름이 유입되어 그곳에서 대문명을 이루었고, 그 이후 역사의 모든 흐름이 그곳을 발원으로 다시 흘러가는 거대한 호수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 말을 우리나라 기미 3ㆍ1독립혁명에 대입하면 적합한 비유라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ㆍ만민공동회ㆍ독립협회ㆍ의병전쟁ㆍ국내외 항일운동 등 각급 민족운동의 흐름이 3ㆍ1혁명으로 접목되고, 그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과 그리고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등 무장전쟁을 비롯하여 조선의용대ㆍ광복군 등 각급 독립투쟁은 3ㆍ1혁명을 발원으로 하여 더욱 강화되고, 체계화ㆍ조직화ㆍ장기화의 동력이 되었다. 

국권상실 이후 한민족은 세계식민지 해방투쟁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만큼 다양한 전략ㆍ전술을 동원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것이 3ㆍ1혁명으로 집약되면서 마침내 민족적 에너지가 폭발하였다. 
 

기미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만세항쟁 당시 선포된 '기미독립선언서' ⓒ 자료사진

 
국치 9년만에 폭발한 3ㆍ1혁명은 일제 식민통치를 거부한 민족의 자주독립선언임과 더불어 봉건군주체제를 종식하고 민주공화주의를 지향하는 근대로의 거대한 횃불이었다.

문명사적으로는 전근대적인 신민의식(臣民意識)을 탈피하고 근대적인 시민의식(市民意識)으로의 전환점이며, 민족사적으로는 신분ㆍ지역ㆍ성별ㆍ종교를 뛰어넘는 민족주의의 시발점이고, 국제적으로는 중국의 5ㆍ4운동을 비롯하여 인도차이나반도와 동남아, 아랍, 이집트 등에까지 파급되어 반제국주의 약소민족 해방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에 짓밟혔던 민족혼이 되살아나 곳곳에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나고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또한 긴 세월 남성위주 가부장제의 질곡에 있었던 여성이 역사현장에 등장하게 되는 여성해방의 계기가 되었다. 

3ㆍ1혁명의 주도층은 시종 '비폭력'을 내세웠다. 
독립선언의 3대원칙은 1, 독립운동은 대중화할 것. 2, 독립운동은 일원화할 것. 3, 독립운동의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이었다. 이 뜻은 최남선에게도 전달돼 독립선언서의 기본원칙으로 삼아 작성되었다.

독립운동사 연구 일각에서는 '비폭력 방법'과 관련, '투항주의적' 등 여러가지로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살피면 비폭력주의를 내세울 수 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당시 조선에는 조선주둔 일본 정규군 2만3천여 명, 일제 헌병경찰 1만3천3백80명, 조선총독부 관리 2만1천3백12명, 34만 명의 일본인 이주민 중 무장 일본이주민 2만3천3백84명 등 약 8만1천76명이 있었다. 일제는 이밖에도 언제든지 한국에 증파할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을 완벽하게 통치하고자 전국 수천개의 일본군 주둔소와 헌병ㆍ경찰관 주재소와 조선총독부 행정조직을 거미줄같이 늘어놓아 총검으로 식민지 무단통치를 자행하고 있었다.   

일제는 1907년 9월 3일 이른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총기 소지나 운반을 철저히 탄압하고, 병탄 이후에는 이 단속법을 더욱 강화하였다. 한국인은 철저히 무장해제된 상태이어서 산짐승이 날뛰어도 이를 퇴치할 총기 하나도 없는 실정이었다. 박은식은 이를 두고 "한국인은 일제의 탄압으로 '촌철(寸鐵)'도 갖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조건을 고려할 때 만일 3ㆍ1혁명의 지도자들이 민중에게 폭력방법을 요청했다면 3ㆍ1혁명은 민중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파급되어 1,700만 명의 국민 중에서 220만여명이 봉기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탑골공원과 기타 요소에 일본군 몇 개 중대나 몇 개 대대만 투입해도 진압되는 소규모 무장 폭동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 분명하다.

3ㆍ1혁명을 계기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하면서, 3ㆍ1혁명은 대한민국의 모태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건국 원년이 된다. 

천도교의 천도구국단을 비롯하여 몇 갈래로 준비중이던 독립선언운동은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더불어 국제적인 환경을 포착하여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과 도쿄 한인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이 직접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거사가 준비되었다.

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천도교 측은 교단 단독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기독교ㆍ불교ㆍ유교 등 각 종교 교단을 총망라하고 대한제국 시대의 유지들을 민족대표로 추대하기로 하여 교섭에 나섰다. 박영효ㆍ한규설 등 한말 지도자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각 교단의 신뢰받는 중견 인물들을 중심으로 민족대표 33인이 선정되었다.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이었다.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3.1운동 민족대표 48인의 사진 ⓒ 한정규

 
민족대표들은 고종의 독살설이 나도는 가운데 인산(因山)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이 국장일에 서울로 모일 것을 예견하고, 전 황제의 국장일과 기독교의 축일인 일요일(2일)을 피해 3월 1일을 거사일로 결정했다. 독립선언서 2만 1,000매를 천도교 소속 보성사에서 인쇄하고 학생들이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 

재경 민족대표들은 28일 밤 손병희 집에서 최종 회합을 갖고 거사계획에 대한 마지막 검토 끝에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 대신 태화관에서 독립선포식을 갖기로 결정했다. 탑골공원에서 거행하면 흥분한 학생ㆍ시민과 일경의 충돌로 발생할 엄청난 희생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민족대표들은 이날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일경에 구속되었다. 한편 탑골공원에서는 학생ㆍ시민 수만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경과 맞섰다.
  

보성사 표지석 보성사가 있던 종로구 수송동 80-7번지 수송공원에 세워진 ‘보성사 터’ 표지석 ⓒ 자료사진

 
3ㆍ1혁명은 3, 4월에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성별ㆍ직업ㆍ종교ㆍ신분을 가리지 않고 일제의 총칼에 맞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전국적으로 집회 1,542회, 단순시위 778회, 일경과 충돌 426회, 일제경찰ㆍ헌병관서 습격 159회, 일반관서 120회에 이른다. 전체 인구 10분의 1 이상이 제국주의 타도투쟁에 참여한 것은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사에서 초유의 일로 기록된다. 
  

3.1운동 소식을 접한 흥사단원들과 미주 한인들은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자유한인대회를 열고 세계만방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기 위해 한인독립연맹의 이름으로 태극기를 들고 시가 행진을 전개했다. 시위대 앞에는 미국인들의 군악대가 앞장을 서고 있다. 3.1운동 소식을 접한 흥사단원들과 미주 한인들은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자유한인대회를 열고 세계만방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기 위해 한인독립연맹의 이름으로 태극기를 들고 시가 행진을 전개했다. 시위대 앞에는 미국인들의 군악대가 앞장을 서고 있다. ⓒ 이영일

 
야수적인 일제의 탄압으로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피검 46,948명의 희생을 치르고, 3ㆍ1독립만세 시위 후에도 일제의 탄압은 가중되어서 정확한 피해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

3ㆍ1민족대표들은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고 양한묵ㆍ박준승 두 분이 옥사했으며 손병희는 병보석 뒤 사망하였다. 한용운은 감옥에서「조선독립 이유서」를 작성하여 상하이 임시정부로 밀송했다.

우리는 근대 한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분수령인 1919년의 거족적인 '3ㆍ1혁명'을 '3ㆍ1운동'이라 비칭하면서 그 100주년을 맞았다. 선열들이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왜적의 총칼에 맞서 싸웠던 3ㆍ1혁명의 정명(正名)도 찾지 못한 채 이다.

공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이 아니라도 모든 사물이나 사건에는 거기에 부합되는 이름(명칭)이 따른다. 명(名)과 실(實)이 상부할 때만이 정명의 가치가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당당한 혁명의 자리에 서야할 1919년 3~4월 한민족의 위대한 혁명적 거사를 운동이라 평가절하하고, 아이들과 외국인이 '쓰리 컴마 원 스포츠'라고 부르게 되었다. '3ㆍ1운동'은 'March First movement' 등으로 번역되는데, 한국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경우 'March First Sports'로 번역될 수도 있다. 정명을 찾아야 하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3ㆍ1혁명보다 8년 전인 중국의 신해혁명과 2년 전의 러시아혁명과 비교할 때 우리는 스스로 평가절하하고, 용어에서 정명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ㆍ1운동'이 아니라 '3ㆍ1혁명' 이어야 하는 이유부터 따져본다. 

혁명(Revolution)이란 용어는 라틴어에서 기원하는데 "마차 바퀴를 완전히 한 바퀴 돌린다"는 뜻이다. 체제 내의 개혁이나 변혁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동양에서는 새 왕조가 수립될 때 상제(하늘)가 옛 왕조에게 부여했던 "천하를 다스리라는 명령을 바꾸어(革), 그것을 새로운 왕조에게 주었다(命)하여, 그 정당성을 이론화하는 개념으로 쓰였다.『역경』에는 "하늘과 땅이 바뀌어 사시(四時)가 이루어진다"라는 뜻이었다. 

"기원 4252(1919)년 3월 1일은 우리나라 2천만 한국 민족이 정의ㆍ인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충(忠)과 신(信)을 갑옷으로 삼고 붉은 피를 포화로 대신하여 창세기 이래 미증유의 맨손 혁명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한 특기할 만한 날이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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