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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유일한 생존 원고인 이춘식 어르신이 자택에서 최종 판결을 앞둔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유일한 생존 원고인 이춘식 어르신이 자택에서 최종 판결을 앞둔 소회를 밝히고 있다.
ⓒ 광주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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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징그럽네. 몸도 피곤하고. 하도 질질 오래 끌어싸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30일 오후 2시 대법정에서 판결을 선고한다.

2005년 소송 제기로부터 13년, 2013년 7월10일 파기환송심 승소 이후 5년여 만에 내려지는 대법원의 최종 선고다.

이 소송엔 당초 여운택 할아버지 등 4명의 강제징용 피해자가 원고로 참여했는데, 소송이 지연되는 동안 3명이 세상을 떠났다. 

광주 광산구 우산동에 혼자 거주하고 있는 이춘식 할아버지(1924년생)만이 유일한 생존원고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19일 자택에서 만난 이춘식 할아버지는 곧 대법원의 판결이 나올 것이란 말에 "너무 많이 늦었다"고 했다.

"소송을 이렇게 오래 끌 줄은 몰랐어. 장관들도 바뀌고 대통령도 바뀌고. 다 바뀌어버렸어. 재소송한지 20년도 넘었지."

1924년 전남 나주에서 출생한 이춘식 할아버지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 일본 기름회사에 취직했다. 

당시 일본인인 지점장 '급사'로 들어가 일을 한 것으로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소송 지연 원고 3명 사망…유일 생존 원고

그러다 대전시장이 한국 청년들을 모집했는데, 할아버지는 "일본이란 나라가 좋다고 해서 공모에 지원해서 간 것"이라고 말했다.

"대전시장의 추천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조건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였다.

일본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가마이시제철소로 갔다. 코오크스(고체연료)를 용광로에 퍼 올리는 노가다 일을 하는 곳에 배치됐는데, 할아버지는 "먼지가 지독한 현장노동이었다"고 말했다.

쇠를 녹인 불순물에 걸려 넘어져 심한 상처를 입고 3개월 가량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고.

당초 기대와 달리 위험하고 열악한 여건에서 일해야 했던 할아버지는 월급도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러다 징병대상 연령이 되자 다시 귀국해 용산에서 3개월 훈련을 받고 일본 고베에 위치한 8875부대에서 근무했다.

"일본 군대에서 한 7~8개월 있으니가 해방이 돼버렸어. 해방됐다고 들었을 땐 좋았지."

기쁜 소식에도 할아버지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이전에 일했던 가마이시제철소를 다시 찾아갔다. 일했던 것에 대한 돈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제철소는 전쟁으로 무너진 상태였다. 제철소 관계자들로부터 할아버지가 들을 수 있는 말은 "회사가 폭파돼 다 부숴졌는데 무슨 돈이 있겠냐"는 것뿐이었다.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국내 소송은 2005년 2월28일에 시작됐지만 앞서 1997년 오사카 지방재판소에도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 소송은 2003년 10월9일 최고재판소에서 최종 패소했지만, 피해자들의 법적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혹독한 환경 속 노역, 임금 한푼 못받았다"

일본 소송에는 참여하지 않은 이춘식 할아버지도 국내 소송부터 법적 투쟁에 참여했다. 혹독한 환경에서 노역했는데도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억울함을 꼭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진술서(2003년 작성)를 보면 할아버지는 "일본제철징용자 공탁명부를 통해 예저금으로 23.80엔(한화 약 242원)이 공탁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나 이는 3년여 간 근무한 것에 비해서 터무니 없는 금액이다"고 밝혔다.

서울지방법원에 제기한 국내 소송도 1심과 2심에도 모두 기각 판결이 내려지면서 상황이 좋진 않았다. 그러다 2012년 5월24일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이 내려지면서 반전의 계기를 맞았다.

2013년 7월10일 서울고등법원은 파기환송심에서 원고들에게 각 1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길고 긴 법적투쟁에서 처음으로 들은 '승전보'였다.

그런데 신일철주금의 상고 이후 대법원이 '침묵'했다. 이미 해당 사건을 살폈음에도 5년 가까이 최종 선고를 미룬 것이다.

그동안 이 소송의 원고 4명 중 이춘식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여운택·신천수·김규수 세 명의 원고가 세상을 떠났다.

"나만 썽썽하게 살아갔고 (결과가)어쩐가 보게 생겼네. 왜 이일을 이렇게 오래 끌었나."

함께 소송을 해왔던 이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이춘식 할아버지의 씁쓸함이 느껴지는 말이다. 이유도 모르고 흘러간 5년이란 세월. 최근에서야 그 뒤에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가 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하지만 할어버지의 원망은 단지 양승태 사법부와 박근혜 청와대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5년간 침묵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우리가 해방된지 몇 년이 지났는가. 그야말로 어릴 때 일본에 갔다가 이제 나이가 100살이 다 돼가네. 가서 일하고 돈 못 받은 '사실'을 알면 재판 판결을 딱 끝을 지어줘버려야재. 근데 왜 그걸 보류하고 나뒀냐 그 말이여. 이때까지 처리를 못한 것은 대한민국이 썩었다는 거여."

피해자들을 수년간 방치하고, 그들의 싸움마저 돕지 못한 국가의 무능함을 꼬집은 것이다.

"하도 오래 된 일인데, 생존자가 있을 때 처리했어야지. 우리는 서민 아닌가. 챙피한 일이야. 외국에서 욕해. 한국은 이런 것도 잘 못한다고. 위안부(일본군 성노예) 문제도 그러니까 일본에서 자꾸 변명만 하잖아."

소송이 빨리 끝나지 않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도움을 주는 이들(시민단체, 언론 등)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는 말도 했다.

지난 7월 말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로 이 사건을 넘겨 심리를 재개, 우여곡절 끝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최종 판결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오로지 "빨리 판결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고 말했다. 

"좋은 소식 있을 거 같아요"라는 말에 할아버지는 "그러믄 얼마나 좋겄는가. 나 살아있을 때 좋은 소식 줬다고, 고맙다고 마음 흐뭇한 그런 날이 오면"이라고 답했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제휴사인 <광주드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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