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019 V리그 개막전... 한국도로공사-IBK기업은행 경기 (2018.10.22)

2018~2019 V리그 개막전... 한국도로공사-IBK기업은행 경기 (2018.10.22) ⓒ 한국배구연맹

 
결국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지난 22일 개막한 2018~2019 V리그 여자부 한국도로공사-IBK기업은행 경기에서 대표팀 선발 규정을 위반한 일이 발생했다. 규정을 몰라서가 아니다. 상황을 보면, 프로배구를 관장하는 한국배구연맹(KOVO)이 대한민국배구협회(아래 배구협회)의 대표팀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발단은 한국도로공사의 이원정 선수가 지난 7월 AVC컵 대회(9월 16일~23일) 대표팀 선수로 선발됐고, 이후 소속팀 훈련 도중 부상을 당하면서 시작됐다.

배구협회 규정에 따르면 이원정 선수는 V리그 개막전에 출전할 수 없지만, 배구연맹에는 이에 관한 규정이 없어 "이원정 선수는 22일 개막전부터 출전이 가능하다"고 구단에 통보한 바 있다(관련 기사 : "올림픽 코앞인데..." KOVO, 배구 대표팀 규정 '묵살' 논란).

한국도로공사 김종민 감독은 이날 경기 2세트 19-21로 뒤진 상황에서 이원정 선수를 경기에 투입했다. 그리고 2세트 끝날 때까지 경기를 뛰었다. 이원정이 코트에 들어선 순간, 대표팀 선발 규정은 무용지물이 됐다.

김종민 감독은 23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KOVO가 10월 초에 배구협회 대표팀 규정과 관계없이 이원정은 V리그 개막전부터 출전이 가능하다는 공문을 구단에 보내왔다"고 말했다.

이어 "경기 당일에도 KOVO 핵심 관계자에게 '(규정 위반 논란으로) 너무 시끄러운데 어떻게 하는 게 맞느냐'고 질의를 했지만, 방침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감독이 판단해서 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경기 직전까지도 감독으로서 번민이 많았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사건은 한국 배구 역사에 남을 만한 오점이다. KOVO와 배구협회 두 단체가 사전에 충분한 조율을 통해서 해결해야 할 일을 '사태'로 만들어서 공론화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죄 없는 어린 선수만 불편한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대표팀 규정·과거 사례 적용하면... '도로공사 몰수패' 대상
 
 배구 대표팀 규정 위반 '몰수패' 처리 기록... 2013년 전국체육대회 경기대-한양대 경기

배구 대표팀 규정 위반 '몰수패' 처리 기록... 2013년 전국체육대회 경기대-한양대 경기 ⓒ 대한체육회 화면 캡처

 
이번 사건은 관련 규정과 과거 사례, 징계 수준만 살펴봐도 매우 중대한 사태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현행 배구협회 '국가대표 선발 규정'과 과거 사례를 그대로 적용하면, 이원정 선수가 코트에 들어간 순간 '부정 참가 선수'가 된다. 경기 도중에는 경기를 중단시키고 한국도로공사의 몰수패를 선언해야 한다. 경기 후에도 몰수패로 처리해야 한다.

또한 스포츠공정위원회 규정(제31조)에 따라 부정 선수를 출전시킨 감독에게는 3년 이상의 자격정지, 해당 선수는 1년 이상의 출전정지 징계를 하게 돼 있다.

국가대표 선발 규정 제27조 2항은 '국가대표로 선발된 선수가 4주 진단 이상의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될 경우, 진단기간의 2배수 기간 동안 일체의 국내대회 출전을 불허한다'고 규정돼 있다.

실제로 이 규정을 위반해 몰수패가 선언된 사례가 있다. 지난 2013년 10월 22일 전국체육대회 경기대-한양대 경기에서였다. 당시 경기대 이민규(현 OK저축은행)가 1세트 코트에 들어선 순간, 배구협회는 경기를 중단시키고 바로 경기대의 0-3 몰수패를 선언했다.

당시 이민규는 동아시아대회 대표팀에 선발됐다가 부상(4주 진단)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됐다. 그런데 출전 금지 기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국내대회인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했다가 소속팀이 몰수패를 당한 것이다.

'똑같은 위반', 대학팀만 몰수패?... 사무총장에 보고도 안 했다

5년 전 경기대의 이민규와 최근 한국도로공사의 이원정은 똑같은 케이스다. 그러나 당시 경기대는 몰수패를 당했고, 한국도로공사는 아무 제재도 받지 않았다. 프로배구를 관장하는 KOVO가 최근 국가대표 규정에 따르지 않고 자체 규정을 적용하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KOVO 관계자는 지난 20일 "국가대표팀 규정은 배구협회의 규정"이라며 "우리도 규정이 있는데, 대표팀과 관련해서 배구협회 규정을 다 따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로도공사 측에 이원정은 경기 투입이 가능하다고 공문으로 통보해줬다. 결국 대표팀 규정이 무력화되는 장면을 앞으로도 3경기를 더 봐야 한다.

이 가운데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KOVO가 이런 결정을 내리면서 사무총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다. KOVO 사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에게 이 중대한 사안을 보고도 하지 않았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다.

여자부 V리그 개막을 하루 앞둔 21일까지도 사무총장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기자가 이날 전화 통화로 질의하지 않았다면, 경기 당일에도 몰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대표팀 차출 거부-도쿄 출전권 못 따면, 배구협회-KOVO 공동 책임"

이번 사건으로 대표팀 규정은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됐다. 프로구단들이 안 지키겠다고 하면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운영에서 형평성도 무너졌다. 학교 배구 팀은 규정대로 몰수패를 당하고, 프로구단은 무시하고 제재를 안 받는다면 규정으로서 존재 가치가 없다. 같은 대표 선수인데 소속이 다르다고 한 쪽은 큰 징계를 주고, 한 쪽은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아도 되는 규정은 정의에 반한다.

몰수패 당사자였던 경기대 감독을 제외하고, 일부 남녀 고교·대학 감독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의견을 물어봤다. 규정 적용이 불공평하다는 반응이었다.

한 학교 배구 감독은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4주나, 조금 더 나와도 일단 대표팀에 선발되면 적극 협조해줘야 한다는 게 지금까지 입장이었다"며 "앞으로는 어렵게 됐다. KOVO처럼 무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똑같은 국가대표 선수인데 프로팀은 규정을 어겨도 멀쩡하고, 학교팀만 몰수패를 당한다면 공정성에 어긋난다"며 비판했다.

그는 또 "대표팀 차출이 어려워져 남녀 모두 도쿄 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실패한다면, KOVO와 프로구단들도 배구협회와 함께 공동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여자배구 같은 경우는 김연경, 양효진, 김수지 고참 3인방이 뛰는 마지막 올림픽일 텐데, 두 단체가 적극 협조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줘도 부족할 판에 한숨만 나온다"고 안타까워했다.

내년 올림픽 앞두고 '차출 갈등' 우려, 협회-KOVO 조정 필요하다는 지적도

대표팀을 관리·운영하는 배구협회는 비상이 걸렸다. 협회 측은 23일 수석 부회장을 KOVO에 급파했다. 배구협회 관계자는 "대표팀 규정은 KOVO도 준수를 해줘야 하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대표팀 규정 관련 배구협회와 KOVO가 따로 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두 단체가 단일화된 규정을 마련하자는 차원에서 KOVO측과 협의를 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내년도 도쿄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중대한 시기를 앞두고 대표팀 구성과 운영에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국가대표 선발 규정 제27조 2항이 프로구단들의 이기주의로 대표팀 선수 차출에 비협조적인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 규정은 다른 종목에도 대부분 있는 규정이다. 그러나 배구협회 규정은 출전 금지 기간이 과도하다는 지적이 있다. 조정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반대로 '오죽 했으면 그런 규정이 생겼겠는가'라는 주장도 있다. 규정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표팀에는 부상을 이유로 빠져놓고, 소속팀의 훈련과 국내대회 경기는 뛰는 사례가 많았다. 규정이 생기기 이전의 대표팀 감독들이 겪은 사례들을 들어보면, 프로배구 구단들의 선수 차출 거부와 이기주의가 심각했다. 프로구단 사이에서도 견제와 알력이 도를 넘은 사례도 있다.

그 틈에서 대표팀 감독은 전략 구상을 해야 할 시간에 하루 종일 전화통 붙잡고 프로팀 감독들에게 '선수 좀 보내달라'고 요청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면 황당한 선수 구성을 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국제대회 경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규정 도입 이후 규정 때문만은 아니지만, 대표팀 차출이 잘 이루어진 측면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직도 프로구단들은 소속팀의 대표팀 차출 숫자에 민감하다. 과거로 회귀할 여지는 언제든지 잠복해 있다.

또한 부상 중인 대표팀 선수를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다. 충분한 치료와 재활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일정 기간 국내대회 출전 금지를 강제한 것이다. 
 
해체도 못하는 배구협회... 독립 단체도 아닌 KOVO

배구협회와 KOVO의 주도권 기싸움은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고질병이다. 서로 자기 논리를 앞세워 합리화하고 있지만, 이번 사건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정 면에서는 KOVO가 우위에 있다. 그러나 권한 면에서는 배구협회를 무시할 수도 없다. 일각에선 '배구협회 해체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해체라도 해서 단기간에 대대적인 혁신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마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국제배구연맹(FIVB)이 대한민국 배구 단체 중 유일하게 인정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행부와 실무진 교체를 통해서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KOVO는 배구협회와 다른 '별개의 독립 단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번 대표팀 규정 묵살도 그런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과연 별개의 독립 단체일까. 물론 V리그 등 KOVO가 주관하는 대회와 프로선수들은 자율적으로 규정을 정해서 운영하고 규제할 수 있다. 그러나 배구협회의 승인과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도 적지 않다.

KOVO가 배구협회의 대표팀 규정을 무용지물로 만들듯, 배구협회도 KOVO의 외국인 트라이아웃 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다. 외국인 선수를 영입할 때 반드시 필요한 국제이적동의서(ITC) 때문이다. 배구협회가 ITC 승인·발급을 해주지 않으면 외국인 선수가 국내에서 경기를 뛸 수 없다. ITC 없이 국내 경기에 뛰면, 해당 선수는 FIVB로부터 큰 제재를 받아 선수 생명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또한 KOVO가 주관하는 V리그나 KOVO컵도 배구협회가 FIVB에 '대회 등록'을 해줘야 외국인 선수가 출전할 수 있다. 한국-태국 여자배구 올스타 슈퍼매치, KOVO컵 대회에 외국 팀 초청 등도 배구협회가 아시아배구연맹에 승인 신청을 해야만 가능하다. KOVO가 FIVB나 아시아배구연명에게 직접 승인 요청을 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구단의 팀과 소속 선수들은 배구협회에 다 등록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KOVO가 별개의 독립 단체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배구협회·KOVO가 '잃어버린 것'... '서로 협조해야 윈윈' 가능

배구협회와 KOVO는 공생과 이해 상충의 양면이 있다. 배구협회가 대표팀 선발과 관리를 잘해서 국제대회 성적이 좋으면 프로 리그 흥행에 직결된다. KOVO도 V리그를 통해 선수들의 경기력이 향상되면 대표팀 성적이 좋아진다.

반면 배구협회는 프로구단들의 대표팀 차출에 비협조적인 부분을 견제해야 한다. KOVO는 소속팀 선수가 대표팀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부상 관리를 잘해주는지를 감시해야 한다. 결국 두 단체는 협력과 견제를 통해 윈윈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이번 대표팀 규정 무력화 사태를 통해 두 단체 중 누가 이득이고 손해를 볼지는 두고볼 일이다. 그러나 두 단체가 동시에 잃어버린 것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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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V리그 KOVO 배구협회 김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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