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25 07:39최종 업데이트 18.10.26 20:04
일제강점기 문화구역 서촌

한국 근대기의 문화계는 미술·음악과 문학 등 서로 다른 분야일지라도 감성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끼리는 자주 어울렸다. 같은 분야의 사람들끼리만 주로 활동하는 현대 문화계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예로부터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나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서화동원(書畵同源)' 등의 말에서 느끼는 통섭 의식이 이어져 내려온 까닭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서촌 지역에는 유난히 예술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이곳에 사는 여러 분야의 예술인들은 서로 의지하며 어려운 시절을 지탱해 나갔다.
  

인왕산에서 내려다 본 현재 서촌의 모습 ⓒ 황정수


서촌 지역에는 여러 분야의 많은 예술인들이 살기도 하였지만, 다른 지역의 예술인들이 몰려와 어울리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에 예술인들이 가장 많이 모였던 곳은 단연 시내 중심부인 '명동(明洞)'이었다. 명동의 르네상스 다방, 청동다방 등 예술인들의 아지트에는 하루 종일 여러 예술인들이 터를 잡고 있거나 그와 유사한 부류들이 드나들었다.

이에 비해 서촌은 명동과는 다른 면에서 예술가들의 세계였다. 서촌은 명동처럼 여러 곳의 사람들이 늘 모여 어울리는 것은 아니나, 각 분야의 예술인들이 거주하며 자연스럽게 모이는 명동과는 또 다른 상황의 아지트였다.


서촌에 살던 대표적인 문학인으로는 누상동에 살던 시인 윤동주가 있었고, 누하동에는 시인 노천명이 살았다. 통인동에는 시인 이상이 살았고, 필운동에는 소설가 염상섭이 살았다. 동양화가로는 이상범이 누하동에, 이한복은 효자동에 살았으며, 조각을 하던 김복진과 이국전도 서촌 입구에 자리 잡았다. 서촌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활동한 예술가는 단연 서양화가들이었다.

삽화로 유명한 이승만이 옥인동에 살며 중심이 되었고, 이제창과 공진형, 이종우와 김중현이 서촌의 초입 사직동 근처에 살았다. 궁정동에는 정현웅과 이쾌대가 살았고, 불우한 이중섭은 한때 누상동에서 지냈다. 이들 예술인들은 각각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서로간의 인간적 소통을 하며 지낸다.

구본웅과 이상의 운명적인 만남
      

(좌) 구본웅(사진가 문선호의 사진집에서 재촬영), (우) 이상

서촌에 살던 예술인 중 서양화가 '구본웅(具本雄, 1906-1953)'과 시인 '이상(李箱, 1910-1937, 본명 김해경)'의 만남은 하늘이 내린 인연이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참으로 운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은 외형적으로는 서로 가까울 수 없을 것 같은 이질적인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동안 '지음(知音)'이라 불렸던 수많은 인물들보다도 더욱 특별한 관계의 막역한 친구로 지낸다.

한 사람은 늘씬한 키에 이목구비가 단정한 인물로 태어났고, 한 사람은 선천적으로 척추 장애를 안고 태어나 작은 키에 잘나지 못한 용모를 타고났다. 그럼에도 한 사람은 한국 문학계를 놀라게 할 만한 문학적 천재라 불리게 되고, 한 사람은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사조의 태동을 전할 만큼 미술계의 큰 인물이 된다. 두 사람은 문학과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갈래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만, 한편으로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가게 되는 고단한 운명을 맞기도 한다.

구본웅과 이상은 나이 들어 만난 사이가 아니고,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자란 친구 사이였다. 두 사람은 네 살 차이였다. 일상적으로는 친구가 되기에는 나이 차이가 많은 편이다. 두 사람은 신명보통학교에 함께 다니는데, 본래 구본웅이 4년 선배이었다. 그러나 구본웅이 건강상의 문제로 학교를 들쑥날쑥하게 다녀 두 사람은 졸업 동기가 된다. 구본웅은 필운동 쪽에 살았고, 이상은 통의동에 살았는데, 두 집은 걸어서 5분 정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곳이었다.

구본웅의 미술적 재능과 미술수업
 

구본웅 <여인> 1930 ⓒ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지원한다. 그러나 신체적 결함 때문에 입학을 거부당하고 경신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고보를 졸업하고 종로에 있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 있던 '고려화회(高麗畫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그림과 조각을 공부한다.

그가 YMCA에서 그림과 조각을 배우게 된 계기는 스스로 미술을 좋아한 것도 있지만, 당시 YMCA 총무로 있었던 삼촌 구자옥의 영향도 컸다. 구자옥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였는데, 구본웅의 집과 가까운 필운동에 살아 자주 오가 사이가 각별했다.

구본웅은 처음엔 조각에 재능을 보여 1927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얼굴 습작>을 출품하여 특선을 한다. 그러나 체력이 따르지 못해 조각을 포기하고 서양화로 바꾼다. 서양화를 하려면 유학을 해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를 받고 얼마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1928년 도쿄에 있는 가와바타미술학교를 거쳐 일본대학 미학과에 입학을 하나, 서양화 작업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태평양미술학교로 옮겨 서양화과를 졸업한다.

구본웅이 도쿄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유럽의 인상파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파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야수파 화가 사토미 가츠조(里見勝藏, 1895-1981)가 많은 젊은이들의 주목을 받는다. 구본웅도 그에 매료되어 많은 영향을 받는다. 구본웅이 '한국 최초의 야수파 화가'라 불리게 된 것은 모두 사토미 가츠조의 영향 때문이다. 그의 작품 중 <여인>과 <인형이 있는 정물> 같은 것은 사토미 가츠조의 영향이 가득한 작품이다.

이상의 미술적 관심과 활동

이상은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시인이 되었지만, 어려서부터 미술에도 재능을 보인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에는 미술반 활동을 하며 교내 미술대회에서도 입상을 하였다. 또한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진학을 하여서는 1928년 3학년 때에 자화상을 유화로 그리기도 하였다.

이 자화상은 1956년 평론가 임종국의 저서 <이상 평전> 2권에 흑백 도판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원래 채색 유화로 그린 것이지만, 현재 흑백 도판만 남아 있다. 이 자화상은 극도의 내면 심리를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좌) 이상 ‘자화상’ 1928, 임종국 ‘이상 전집' 2권에 수록된 사진 / (우) 이상 ‘자상(自像)’ 1931,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서 재촬영

이상은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화가로서 활동을 한다. 출품작의 내용은 역시 '자화상'이었다. 첫 출품임에도 입선에 드는 성과를 낸다. 1928년에 그린 자화상과 연속성이 있는 내용인데, 내적 감정을 드러낸 표현주의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었다. 경성공업고등학교 시절의 작품이 매우 단정하고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면, 미전 출품작은 훨씬 세련되고 전문 화가다운 모습을 보인다.

입선한 자화상은 매우 독특한 색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화면 전체가 노란 색조로 가득해 매우 이채로웠다. 그래서 이승만이 "리상! 그림도 단단히 황달에 걸렸구려"라고 농담을 하였다. 그랬더니 이상이 하얀 얼굴 가득히 독특한 웃음을 짓더니 "내 눈엔 온 세상이 노랗게 보이오" 하며 농담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독특한 표현적 색채감각은 이승만의 눈에는 이상의 시처럼 천부적인 재능으로 보였다고 한다.

이상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면서 '김해경(金海卿)'이란 본명을 쓰지 않고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이 이름은 경성공업고등학교 다닐 때에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상'이라는 이름은 구본웅이 졸업 기념으로 사준 화구의 상자가 오얏나무로 되어 있어서 '오얏나무 상자'란 뜻의 '이상'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구본웅과 이상의 가족 관계 인연

구본웅과 이상은 친구이었을 뿐만 아니라 친족으로 얽힌 가족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구본웅은 만석꾼인 거부 구자혁과 어머니 상산 김씨 사이의 외동아들로 태어난다. 그러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 계모인 변동숙(卞東淑, 1890-1974)의 손에서 자란다. 변동숙은 고녀 출신의 매우 화통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변동숙의 동생이 변동림(卞東琳, 1916-2004)이라는 이이다. 변동림은 경기고등여학교와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닌 재원으로 시인 이상과 결혼을 하게 되는 신여성이다. 그러니 이상은 구본웅의 친구이지만 새어머니 동생의 남편이니 이모부인 셈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변동숙과 변동림의 나이 차가 26세나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설에는 변동숙은 그녀의 아버지 변국선(卞國璿)의 본 부인 소생이고, 변동림은 변국선이 소실을 통해 낳은 1남 2녀 중 장녀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변동숙과 변동림은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또한 변동숙은 나이 어린 이상을 "해경이! 해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데서 오는 호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이 폐결핵으로 죽자 후에 변동림은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재혼하고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개명한다.

삽화가 이승만이 그린 이상과 구본웅
               

삽화가 이승만이 그린 <이상과 구본웅>, 이승만의 <풍류세시기> 책에서 재촬영 ⓒ 황정수

 
구본웅과 이상이 함께 다니는 것은 당시 문화계 사람들은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이야기였다. 삽화가로 유명한 행인(杏人) 이승만(李承萬, 1903-1975)은 구본웅과 이상이 늘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간략한 소묘로 그린다.

이승만은 당시 서촌 지역 서양화가들의 좌장 같은 이였다. 그는 두 사람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이답게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다. 모필로 그린 간단한 것임에도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이 생동감 있게 잘 묘사되어 있다.

키가 큰 이상은 머리를 빗지 않아 제멋대로 날리고 수염도 덥수룩하게 길렀다. 옷은 망토를 입고 하얀 백구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당시 지식인들이 망토를 많이 입었다고 하지만, 이상의 모습은 지적으로 보이기보다는 기괴해 보인다.

곁에 구본웅이 서 있는데 머리가 이상의 어깨에 닿을 정도로 키 차이가 난다. 구본웅은 평소 신체적 결함을 감추기 위해 서양 정장 대신 한복을 즐겨 입거나, '인버네스'(inverness)라 불리는 망토와 비슷한 남자 외투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 그림 속 구본웅의 모습이 인버네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다.

키 차이가 많이 나는 그림 속의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우스우면서도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 일화 두 가지가 생각난다.

한 가지는 이들과 가까웠던 언론인 조용만이 전하는 이야기이다. 한 번은 구본웅과 이상이 길을 가다 언론인 양백화(梁白華)를 만나 술집으로 향하였다. 양백화는 육척 장신이었는데 걸음걸이가 늘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렸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을 보고 갑자기 동네 아이들이 나타나 '곡마단'이 왔다며 소리치면서 따라다녔다고 한다. 세 사람의 기괴한 행색에 아이들이 며칠 전 동네에 온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행인 이승만이 전하는 것이다. 이승만이 구본웅·이상과 함께 또 술집에 가는데 이번엔 소설가 박종화를 만났다. 박종화 또한 키 작기로 유명하였다. 그런데 키 큰 이상을 사이에 두고 한 쪽에는 구본웅이 서고, 한 쪽에는 박종화가 서서 세 사람이 앞서 걸어갔다. 이 모습을 이승만이 뒤에서 보자니 마치 '뫼산(山)'자 같았다. 그래서 웃으며 전하니 이상이 "하하! 우리의 모습이 마치 '뫼산'자와 똑 같군!" 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고 한다.

구본웅이 이상을 그린 <우인상>
              

구본웅 <우인상> 1935 ⓒ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과 이상의 인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미술품은 단연 구본웅이 이상의 얼굴을 그린 유화 작품 <우인상(友人像)>이다. 이 작품은 구본웅이 골동가게 '우고당(友古堂)'을 운영할 때 자주 찾아와 있던 이상을 모델로 그린 것이다.

우고당은 1934년경에 조선호텔 정문 건너편에 차렸는데, 이상이 늘 그곳에 와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대담한 색채 구사와 격정적인 필치로 감성의 해방을 추구한 미술 사조인 야수파의 기법을 잘 살려 그린 것이다. 강렬한 색채와 과감한 붓질로 그린 이 작품 속 이상의 얼굴은 개인의 불행, 시대의 어둠과 맞물려 진한 감동을 준다.

구본웅의 유족들 말에 따르면 이 그림에 <우인상>이란 제목을 붙인 이는 구본웅과 가까웠던 서양화가 이마동(李馬銅, 1906-1981)이었다고 한다. 본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이마동이 이상임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필자는 언젠가부터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불우한 짧은 인생과 함께 그의 소설 <날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주인공처럼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려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두 손을 옆으로 펴고 소리 없이 중얼중얼 거린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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