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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에게 소설 속 공간이 주는 의미는 상당하다. 스스로에게는 자신을 드러내는 정체성의 한 공간이고, 독자에게는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경우 소설의 분위기를 잡기 위해 '무진'(霧津)이라는 지명을 쓰고, 많은 작가들이 이런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알파벳을 넣어 'K시'처럼 지명을 모호하게 하기도 한다. 소설가 한강처럼 자신이 태어난 서울과 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도를 혼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작가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왕웨이롄 소설집 <책물고기> 표지
▲ 왕웨이롄 소설집 <책물고기> 왕웨이롄 소설집 <책물고기> 표지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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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왕웨이롄의 소설집 '책물고기'(김택규 역/ 글항아리 펴냄)에 나오는 공간이 주는 느낌은 독특하다. 30대 후반기에 들어선 작가는 중국 시안에서 태어나(바이두에는 출생지가 칭하이 하이얀(海晏)으로 나온다), 광저우에서 대학을 나왔다. 소설 속 느낌으로 작가의 부친은 젊은 시기에 발전된 도시인 광저우로 이주해,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쉽게 주소지를 옮길 수 없는 후코우 제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고향이라는 함의는 상당히 크다. 때문에 그 정체성을 변주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 위화가 항저우나 그 주변을 중심 지역으로 삼고, 모옌이 고향인 산둥성을, 지아핑야오가 샨시성을 배경으로 삼는 것도 그 이유다.

그런데 왕웨이롄은 이 소설집에서 공간을 좀 더 넓게 쓴다. '책 물고기'는 광저우, '걸림돌'은 광저우와 선전을 오가는 기차, '베이징에서의 하룻밤'은 베이징 허핑리다. '아버지의 복수'에서 아버지의 고향은 시안이 아닌 산동성인데, '베이징에서의 하룻밤'에서 주인공의 고향이 작가의 진짜 출생지인 시안이라는 점도 특이하다. 또 도시명은 나오지 않지만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는 칭하이성에서 시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꺼얼무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공간을 소설에서 잘 활용한다. 가령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의 장소적 배경은 중국 칭하이성 하이시에 속한 차얼한(察尔汗) 소금 사막과 칭장철도의 중간기착지인 꺼얼무다. 독자들은 라싸행 기차표를 사는 장소라는 말에서, 소설 속 묘사되는 소금 호수(염호)라는 공간이 주는 무한한 상상력으로 글의 인식 범위를 넓힐 수 있다.

필자도 칭장철도가 처음 열리던 2005년 인민일보 기자들과 함께 칭장철로를 따라 같이 취재한 적이 있다. 그때 꺼얼무 소금 호수가 주는 독특한 느낌에 빠진 적이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때 보지 못한 소금 호수의 낙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재개발을 앞둔 광저우의 낡은 주택가나 베이징 허핑리와 디탄공원 인근이 주는 느낌은 남달랐다.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왕웨이롄의 소설이 독특한 것은 앞에서 말한 다양한 상상력을 주는 요소들과 더불어 이야기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들이 독특한 것은 읽고 난 후 소설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는 오랜 시간을 지나 해후한 동창들의 변화무쌍한 삶의 여정이 있고, '아버지의 복수'는 대도시에서 '단순 노동자'로 살아온 시골 출신 노동자들의 힘든 여정이 있다. 대학 시절 연애를 지금으로 연결하는 '베이징에서의 하룻밤'도 사람들이 가장 호기심 있어하는 첫사랑 이야기 느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너무나 정형화되어 버린 시대에 작가들이 갖는 가장 큰 애로점은 이야기를 잃어버리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책 물고기'는 흥미롭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들에게는 카프카의 '변신'을 포함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 담고 있는 미스터리 코드 등을 상상하게 하는 흥미로운 요소들도 흥미롭다.

가령 표제작 '책 물고기'는 책에서 사는 벌레가 출판사 편집자인 주인공에게 침투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치유의 과정에서 벌레가 싫어하는 약재를 발견하는 방법이나 그 치료법 등도 흥미로운 상상력을 주는데, 이것이 소설의 재미와 연결된다.

그런 점에서 작가 왕웨이롄은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다. 우선 그가 2013년 출간한 장편소설 '구원을 찾는 사람'(获救者)도 기대가 된다. 장애인들만 사는 지하왕국에 빠진 세 사람을 다룬 이 소설은 폴 오스터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주는 흥미로운 부분에 접근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또 그의 소설이 지금까지는 중국을 배경으로 살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그 공간이 외국으로도 바뀌어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

책물고기

왕웨이롄 지음,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2018)


태그:#책물고기, #왕웨이롄, #김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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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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