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22 17:32최종 업데이트 18.10.22 17:33
 

박재혁 의사. 박재혁의사 생가 부근 독립운동가 골목 모습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박재혁은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과 수탈, 한국인의 도의심을 타락시키고자 자행하는 각종 범죄적 정책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항일운동을 계속하는 각급 항일단체들의 활동을 들으면서 거듭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중국으로 망명한 김원봉의 소식도 들었다.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김원봉이 망명하기 전에 두 사람은 은밀히 만났을지도 모른다. 절친인 최천택이 김원봉의 비용을 댄 것으로 보아 박재혁과도 만났을 것은 추론 이상에 속한다.


경북 왜관의 곡물무역상에서 일하던 박재혁은 아직 연소하여 조선국권회복단이나 대한광복회 등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으나, 어떤 형태로든지 연계는 되었을 것이다. 근거로는 1917년 6월 700원이라는 거액을 조달하여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는 기록이다. 송상도의 <기려수필>에 나온다. 

정사(丁巳) 6월(곡물무역상) 주인에게 청하여 700여원 자금을 얻어 상하이로 들어갔고, 다음 해 6월 집으로 돌아와 여러 달을 지내다 또 상해 및 싱가포르(新嘉坡)로 가 무역에 종사하였다. 

당시 700여원은 거금이다. 아무리 친척이지만 지방의 곡물무역상이 일시에 그만한 돈을 해외 무역자금으로 내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많은 돈의 출처와 박재혁이 상하이로 가게된 배경은 무엇일까. 

앞장에서 살펴본 대로 당시 풍기광복단의 박상진이 영주에 대동상점이라는 곡물상을 차리면서 각처의 독립운동 기관과 연락을 취하고, 조선국권회복단은 각종 상업조직과 연대하면서 활동하였다. 박상진의 상덕태상회, 서상일의 태궁상회, 윤상태의 칠곡군 왜관 향산상회, 안희재의 부산 백산상회, 통영의 곡물상 서상호, 마산 이형제의 원동상회와 김기성의 환호상회 등을 들 수 있다. 

서상일이 주도한 태궁상회와 윤상태의 향산상회가 국권회복단의 거점이 되고, 박상진의 상덕태상회와 영주의 대동상점은 대한광복회의 거점 역할을 하였으며, 안희재의 백산상회는 부산대동청년단의 비밀아지트가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재혁이 속한 왜관의 곡물상도 어떤 형태로든지 이들 조직과 연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700원이라는 거액은 이들 조직을 통해 해외독립운동 단체와 연계 또는 지원하기 위한 기금으로 염출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1917년 22세가 된 박재혁은 조국독립의 꿈을 안고 곡물회사 직원의 신분으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갔다. 

박재혁이 중국으로 건너간 1917년 전후의 나라 안팎과 독립운동 진영의 실태를 살펴보자. 

1915년 3월 유동열ㆍ박은식 등이 상하이의 영국 조계에서 신한혁명당을 조직하면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박은식은 이 해 12월 이곳에서 <한국통사>를 저술하였다.

국제적으로는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15년 1월 일본이 중국에 21개조 요구안을 제출하여 중ㆍ일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1916년 4월 조선총독부가 처음으로 대구에 신사(神社)를 설립한 것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 신사를 세웠다.

1916년 9월 대종교 교주 나철(羅喆)이 일제가 대종교를 불법화하자 이에 저항하여 구월산에서 수행을 하다가 일제의 학정을 비판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나철은 29세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잠시 관직에 있었으나 일본의 조선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했다. 1904년 호남 출신의 지사들을 모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구국 운동을 벌였다. 1905년 6월 이기(李沂)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하여 일본은 한국을 도우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일본 정치인들에게 보냈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 간 단식 농성을 하였다.

나철은 1906년 을사오적을 처단하기로 계획하고 박제순과 이지용의 집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 상자를 보냈으나 상자가 폭발하지 않아 실패했다. 1907년에는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오적을 모두 살해하려 했으나 경비가 삼엄해서 실패했다. 나철은 이 때 붙잡힌 동지들이 고문당하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낙도로 유배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그 해 풀려났다.

나철은 1909년 대종교를 창도했다. 이후 그가 창도한 단군 신앙이 일반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지자 1915년 일제는 대종교를 불법화했다. 나철은 1916년 가을에 구월산에서 자결했다. 나철의 자결 순국 소식은 조선민중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박재혁도 항일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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