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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하차 문이 열렸다. 난 언제나 그랬듯 미리 문 앞에 서 있었다. 내릴 승객은 나 혼자뿐인가 하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런데 하차 문이 열리자 연세가 지긋한 노인들을 비롯, 걸음이 조금 불편한 몇몇 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나온다. 그 뒤로 성인 남녀들이 내릴 채비를 한다. 상당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렇다, 일본에서의 일이었다. 가깝고도 먼 이웃나라 일본.

최근 일본에 몇 번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시내에서 버스를 이용했다. 현지 사람들의 일상을 느끼기에 충분한 대중교통이 버스다. 버스라는 작은 공간에 사람들이 밀집해 있기에 자연히 그들의 교통 매너를 접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하차 문이 열리고 나서야 내릴 채비를 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다. 또 만원 버스일 땐 백팩을 앞으로 매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하차하는 순간까지 앉아있는 모습이다
▲ 교토 버스 하차하는 순간까지 앉아있는 모습이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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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동안 미리 준비하고 내리는 게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서울 도심을 달리는 버스 안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다. 내리기 위해 한 정거장 전에 미리 준비하고 서 있어야 사람들에게 민폐를 안 끼친다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늦게 내릴라치면 여기저기서 불편한 눈총이 득달같이 나를 향해 날아온다. 그런데 일본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지금까지 버스를 타며 행했던 '배려' 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고민하게 됐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나 어르신은 비장애인과 젊은이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버스 하차 속도가 느리다. 미리 준비하고 나오고 싶어도 덜컹거리는 만원 버스에선 도저히 중심을 잡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버스가 하차 한 후에 내려야 하는데, 우리가 이용하는 대중교통 문화는 그 틈을 주지 않는다. 대중교통의 '대중'이란 말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젊고 건강한 비장애인'에 맞춰진 사회 풍속이 대중교통이라는 단적인 예로 나타난 것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이런 고민 없이 40년 가까이 살았다. 아직 창창한 젊은 나이지만,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 느껴지는 '한국사회'는 내게 깊은 고민 거리를 던져준다. 아마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비슷한 과정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어진 시간표에 따라 인생을 고민할 틈도 없이 초중고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고, 또 군대를 다녀오고, 결혼하며 아이까지 낳는 숨가쁜 루트. 사람들은 이 과정을 '정상' 범주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정상이 될 것을 강요한다. '정상' 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친한 선배에게 이런 고민 얘길 했더니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나이를 한 해 두 해 먹어가며 어른이 되었지만, 나도 어른은 처음인지라 아직 낯설고 어색하다. 누군가 "어른은 이런 거야"라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기에 사회 생활을 하며 좌충우돌 부딪혀본다. 선배들의 말이 모두 맞는 것 같고, 그 길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한없이 작아 보이는 순간들.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되뇌었던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어른이 주는 함의가 무엇인지 혼란스런 고민이 끝없이 펼쳐진 요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올라온 신간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책은 제목이 절반이라던데 일단 맘에 쏙 와 닿았다. 책 제목은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이다. 고민이 일정 부분 해결될 것 같은 느낌.

이 책은 오랫동안 번역가로 활동하며 <퍼시픽 림>, <토니와 수잔>, <하우스 오브 카드3> 등의 작품을 펴낸 박산호씨의 에세이다. 최근엔 영어 교양서인 <단어의 배신>과 전문 번역가들이 풀어놓은 텍스트 분투기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펴내며 에세이스트의 면모를 보였다. 이번 책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저자에게 번역가를 넘어 에세이스트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저서라고 생각한다. 
 
아직 부족한 어른의 성장기.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가 출간되었다.
▲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아직 부족한 어른의 성장기.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가 출간되었다.
ⓒ 북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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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저자가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겪었던 고군분투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다는 저자는 다독가임을 뽐내듯이 여러 책에 담긴 내용들을 인용했고, 자신의 경험을 인용문에 녹여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또한 영국과 뉴질랜드로 혈혈단신으로 떠나 겪은 이야기를 비롯해, 어릴 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의 추억, 딸과 옥신각신 재밌게 사는 이야기, 힘들었던 과거 연애 이야기까지 책 한 권으로 저자가 살아온 서사를 파노라마처럼 접할 수 있다. 쉽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스토리 전개로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게 하였고, 분량도 많지 않아 단숨에 끝까지 읽어내려 갈 수 있었다.   

이 책에선 여러 챕터를 통해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과정과 그에 따른 성장통을 묘사했다.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청소년, 중년은?

어릴 때 어른들이 하셨던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린이는 앞으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였다. 이 말을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드문드문 듣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 가능성이 좁아지더니 이젠 미래를 바라보기보다 하루하루 현실에 충실한 내 모습을 발견한다.

어쩌면 지독하게 버티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뭔가 확 바꾸기엔 늦은 나이가 된 건 아닐까 씁쓸한 마음도 든다. 많은 이들에게 꿈이란 어릴 땐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점점 현실적으로 변모해 의사나 과학자를 거쳐 결국 로또 당첨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언제까지 로또 당첨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으니, 인생에서 소소한 행복과 목표를 찾아야하지 않을까. 저자는 중년에 접어든 시점에서의 꿈을 언급한다. 
 
"소망의 유효기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40대 초반까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다 그 시기마저 지나가버리면 그때는 확실히 알게 된다. 인생은 원한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다고 어디든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하고 싶다고 다 하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을. 그때부터 정말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선택'이다. 내가 이 생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성장의 한계를 냉정하게 인식하고 인정해서 받아들인 후 내게 주어진 유한한 자원(시간, 돈, 체력, 취향, 열정)을 최대한 현명하게 집중적으로 쓸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명하게 살아가는 법이자 앞서 살고 있는 어른이 젊은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선례가 아닐까." - 146p.

나를 알아가는 시간, 어른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를 하고 대학까지 진학하는 몇몇 친구들을 봤다.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몰라서 그랬을 거다. 내재된 잠재력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혹은 친구들, 그것도 아니면 점수에 맞춰 선택했던 인생의 주사위. 적성도 적성이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 기준을 잡지 못해 방황하는 시간들도 많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나와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면 다른 이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 텐데. 어른이 되어 간다는 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저자도 어른이 되어가면서 눈치 보지 않고 의사 결정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나를 잘 몰라서 항상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세상은 진정한 나를 찾아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야무지게 살아보라고 다그치는데, 정작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뭘 잘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 잠재력이 대체 있긴 한 건지 몰랐다. 모르니 날 제대로 굳건하게 세울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남들이 뭐라고 한마디만 해도 비바람에 온몸을 비트는 플라타너스 잎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만의 명확한 기준이 없으니 대학 동기, 고향 친구, 사회에서 만나는 직장 동료들과 끝없이 날 비교하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나는 더 작고 초라해졌다. 
(중략)
그렇게 꽤 오래 안개 속을 헤매듯 젊은 날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면서 나와 친해지고 나를 좋아하게 됐다. 누군가를 알아가면서 정도 들고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오랜 시간 나를 알아가면서 나란 사람에게 단점과 부족한 점만 있는 게 아니며, 힘든 시간이었지만 수도없이 깨지고 넘어져도 버티다 보니 맷집도 생기고 장점과 강점도 있다는 걸 파악했다. 무엇보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하고, 가고 싶지 않은 모임은 거절할 수 있는 용기와 강단이 생겼다." - 201p.

어른으로서의 포부

이제 어딜 가던 어른 대접을 받는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다고만 생각했던 내 옛 모습에 작별을 고하고, 떳떳하고 당당한, 나를 잘 아는 어른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그러나 잘할 수 있을까 한편으론 걱정된다. 이 책은 마흔을 앞두고 어른이 되길 두려워하는 내게 쓰담쓰담 위로를 건넨다. 마치 저자가 내 앞에서 "어른은 이런 거야"라고 얘기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한국 사회에서의 어른은 어떤 존재일까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사회에 대한 고민 없이 지냈던 지난 세월보다, 앞으로의 삶은 조금 더 사회 현상에 눈을 뜨고 같이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비혼주의, 다문화가정, 장애인과 비장애인, 페미니스트, 난민, 초고령사회, 건강불평등 등등 한국 사회에서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중 일부는 고도성장에 가려 음지에서 폭력 형태로 수수방관된 사건들도 많았다. 어른이라면 나를 잘 아는 것과 동시에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성찰도 필요할 것 같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 어른이 되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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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글까지 쓰는 이 순간, 난 또 어른이 된다. 누군가에게도 어른으로서 모범이 될 순간을 기다리며.  이 책을 어른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른이 되길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 어른인 척 말고 진짜 느낌 좋은 어른으로 살아가기

박산호 지음, 북라이프(2018)


태그:#어른에게도어른이필요하다, #박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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