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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이른 아침에 간다면 한적한 강변길을 조용히 산책할 수 있다.
▲ 아르노 강변  조금 이른 아침에 간다면 한적한 강변길을 조용히 산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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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아르노강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강변에는 항상 수많은 인파가 붐빈다.

이 강변에는 여러 건물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갈릴레오 박물관(Museo Galileo)이 있다. 강변을 거니는 인파에 비해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도 네 번째 피렌체 여행에서 처음으로 방문했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도가 낮은 곳이다.

갈릴레오라는 이름에 걸맞게 예술품 중심인 다른 박물관에 비해 르네상스 시절 과학 기술을 모아놓은 박물관이다. 둘러보다 보면 당시 과학 기술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또한 과학의 원리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사람들이 적어 여유를 가지고 관람할 수 있어서 아이들과 방문하기에 좋다(입장은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그리고 이곳은 과학 기술의 발전뿐 아니라 과학이 어떻게 르네상스의 종말을 앞당겼는지 엿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놀랍고도 정교한 전시품들이 가득하다
▲ 갈릴레오 박물관 내부  놀랍고도 정교한 전시품들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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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 운동 법칙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 갈릴레오 박물관 내부  물리 운동 법칙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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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종말, 화약과 과학

많은 이들이 르네상스가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해서는 수없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찬란했던 르네상스가 무엇 때문에 끝나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여러 복합적이 원인이 있겠지만, 프린스턴 대학 역사학과의 시어도어 래브(Theodore Rabb) 교수는 르네상스가 끝난 원인으로 '화약'과 '과학'을 꼽는다. 화약은 당시 정치 질서를 변화시켰고, 과학은 기존 가치 체계의 붕괴를 가져왔다.

화약이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전쟁의 양상은 급격히 변한다. 예전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말을 타고 돌격하면 보병들이 뒤따랐다. 군주와 지휘관들은 자신의 리더십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앞에서 용맹을 과시해야 했다.

하지만 화약은 적군을 먼 거리에서 한꺼번에 사살할 수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대량 살상'이 가능했다. 앞장서서 돌격하는 것은 이제 용맹이 아니라 바보짓이 됐다. 전쟁 양상의 변화는 곧 정치체계의 변화로 이어졌다.
 
  화약의 전파로 더이상 '앞으로 돌격'은 용맹이 아니게 되었다.
▲ 과거 피렌체 군의 복장(단테 박물관)  화약의 전파로 더이상 "앞으로 돌격"은 용맹이 아니게 되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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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양상의 변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30년 전쟁이다. 처음에는 가톨릭 국가와 개신교 국가 간의 종교 전쟁 성격이었다. 하지만 가톨릭 국가가 개신교 국가와 동맹을 맺는 등 종교적 신념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으로 변해 간다.

여기에 본격적으로 화약이 사용되면서 그 전에 치렀던 어떤 전쟁보다 더 많은 신식 무기가 투입됐고 대량학살이 이뤄졌다. 30년 전쟁은 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남긴 전쟁이었다.

이전과 다른 전쟁의 참혹함은 사람들에게 반전 사상을 싹트게 했다. 이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1648)으로 이어졌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최초의 근대적 국가간 합의였다. 이것은 종교적 신념에 기반한 정치체제가 끝난 것을 의미했다.

교황의 종교권력은 약해지고 세속권력이 강화됐다. 이제 군주들은 앞장서서 돌격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외교술로 자신의 리더십을 증명해야 했다. 근대 국제 외교와 새로운 정치 체제의 시작이었다.

이와 함께 과학의 발전도 르네상스의 종말을 앞당겼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의 재발견이었다. 중세 시대의 인류보다 고대인들이 더 앞선 철학 체계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대 철학자가 다시 연구되었고 이성적 사고를 중시하는 풍조가 확산됐다.

고대 철학자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절대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고정돼 있으며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보다 더 빨리 떨어지며 세상은 흙, 물, 불, 바람의 네 가지 원소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철학자들의 세계관을 기독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사회와 자연을 이해하는 진리로 굳어졌다. 교황이 있는 바티칸에 이교도로 볼 수 있는 인물들이 가득한 '아테네 학당' 그림이 걸려 있는 것도 이런 분위기를 보여준다.
 
  총 54명이 표현되어 있는데 대부분 고대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운데 두 사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 아테네 학당(라파엘로, 1510년)  총 54명이 표현되어 있는데 대부분 고대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운데 두 사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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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기독교 최고의 종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근간으로 스콜라 철학을 만들었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태양에 대한 비유로 풀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태양을 맨 눈으로 직접 볼 수 없고 태양의 빛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신이 보이지 않는다며 의심하는 것은 태양을 직접 보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을 직접 볼 수 없듯이 우리가 신을 만나기 위해 중간 매개체로서 사제와 수도사가 필요하고 설명한다.

또한, 아퀴나스는 천상에서 지하까지 모든 것이 수직적 계층 구조로 이뤄져 있으며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봤다. 여러 계층으로 나뉘어진 천사들의 계급도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완성됐다. 

이런 수직적 계층 구조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아퀴나스의 생각은 당시 사회 구조를 합리화하는 것으로 기독교 철학의 근간이 되었다. 이런 교회의 생각은 르네상스 시대에도 크게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그런데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 과학이 발전하면서 이런 사회 구조에 균열이 생긴다. 실험과 관찰을 통해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법칙을 만들어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의 종교적 해석 없이도 세상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 범위가 점점 넓어지게 된 것이다. 실험과 관찰의 발전은 인류 이성의 큰 도약이었고, 그 중심에 갈릴레오가 있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자연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 갈릴레오의 망원경(갈릴레오 박물관)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자연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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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크기를 계산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피사의 사탑에서 실시한 자유낙하 실험과 지동설 주장, 그로 인한 종교재판과 '그래도 지구는 돈다'(Eppur si muove)라는 그의 독백은 매우 유명하다. 갈릴레오는 실험과 관찰을 중시한 근대 과학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르네상스를 끝낸 사람 중 한 명으로 볼 수도 있다.

갈릴레오는 1589년 피사 대학의 교수가 됐다. 갈릴레오는 17살 때부터 잠깐 피사 대학을 다닌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바람 때문에 의학부에 들어갔지만 그는 수학을 더 좋아했다. 대학에서 갈릴레오는 교수들의 비합리성에 크게 실망한다. 갈릴레오는 논리를 바탕으로 교수들의 이론에 딴지를 걸었다.

그는 점차 껄끄러운 '논쟁꾼'이 돼 갔다. 결국 갈릴레오는 학위를 받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둔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뛰어난 수학적 재능으로 조금씩 명성을 얻었고, 메디치가의 눈에 띄게 된다.

1588년, 메디치는 갈릴레오의 재능을 시험해볼 겸 자신의 저택으로 초청해 강연을 부탁했다. 강연 주제는 단테가 신곡에서 묘사한 지옥의 크기였다. 단테의 지옥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매우 진지한 연구 주제였다. 

갈릴레오는 이 강연에서 비례법을 활용해 루시퍼의 크기를 계산한다. 그는 '루시퍼는 로마 성 베드로 광장의 거인 조각상보다 43배가 크고 조각상은 단테보다 43배가 크다'는 신곡의 묘사를 참고했다. 그 결과 루시퍼의 키는 약 1800미터 정도이며, 지옥은 지구의 12분의 1 정도 부피인 원뿔 모양이라고 계산해낸다.

수학적인 논리에 입각한 이 결론은 이 문제에 도전했던 누구보다 훌륭했다. 청중들은 열광했고, 9개월 뒤 메디치는 갈릴레오에게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 자리를 제안한다.

당시 피사 대학교는 이탈리아 내에서 상대적으로 수준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만만했던 갈릴레오는 파도바 대학이나 볼로냐 대학을 내심 원했었다. 하지만 일단 피사에 자리 잡은 후 경력을 쌓아 옮기기로 하고 제안을 수락한다.
 
수많은 학자들이 신곡에 나온 지옥 입구의 위치, 지옥의 크기와 수용인원 등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다.
▲ 신곡의 지옥도(단테 박물관) 수많은 학자들이 신곡에 나온 지옥 입구의 위치, 지옥의 크기와 수용인원 등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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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와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시절부터 대학교들은 상급 학부와 하급 학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상급 학부는 의학, 법학, 신학으로 구성돼 있었다. 하급 학부는 다시 3과(Trivium)와 4과(Quadrivium)로 나뉜다. 3과는 문법, 수사학, 변론술이었고, 4과는 기하학, 산술, 천문학, 음악이었다. 이런 하급 학부 7과목을 '자유로운 학문'(artes libeales)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교양 과목 정도로 볼 수 있다. 갈릴레오는 교양 담당 교수였다.

학부 구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수학은 그리 중요한 학문이 아니었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갈릴레오가 처음 부임했을 때, 피사 대학교 학생 600여 명 중 2/3가 법학을 전공할 정도였다.

갈릴레오는 교수가 된 이후에도 학생 때처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규정상 교수는 반드시 가운을 입어야 했지만 갈릴레오는 계속 이를 거부한다. 심지어 가운을 입는 것은 자신의 '지적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경멸했다. 이러니 다른 교수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교수들 중 갈릴레오가 가장 경멸하는 인물은 지롤라모 보로라는 교수였다. 보로는 갈릴레오가 대학생일 때부터 교수였었다. 그는 피사 대학 최고의 학자였으며 강경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다. 보로에게 고대 철학자들의 말은 성서 다음으로 신성한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에 입각해 설명했다.

갈릴레오가 대학생일 때 피사에 우박이 내린 적이 있었다. 우박 덩어리들은 크기나 무게에 상관없이 똑같이 지면에 떨어졌다. 이를 보고 갈릴레오는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로는 우박들이 각각 다른 위치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무거운 우박은 더 높은 곳에서, 가벼운 우박은 더 낮은 곳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동시에 지표면에 닿는 것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이를 교묘한 말장난이라며 비난했다.

갈릴레오는 교수가 된 이후에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수업 중에는 학생들 앞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동료 교수들을 공개적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1590년,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큰 이벤트를 준비한다.

인류 이성의 위대한 도약, 자유낙하 실험

현재 피사의 사탑은 그냥 걸어 올라가기에도 중심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기울어져 있다. 당시에는 기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겠으나 무거운 금속공들을 옮기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조수를 동원해 금속공을 꼭대기로 옮겼다. 이 실험의 목적은 물체가 무게에 상관없이 똑같이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작은 규모로 손 쉽게 실험할 수도 있었겠지만 갈릴레오는 이렇게 대중의 주목을 끄는 극적인 연출을 좋아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실험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실험이 실제로 피사의 사탑에서 이뤄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어찌됐든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깨부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실험 결과, 두 물체가 동시에 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시차가 발생했다. 이를 두고 반대파들은 갈릴레오의 주장이 틀렸다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갈릴레오는 분노하며 이렇게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00파운드짜리 공이 100큐빗 높이에서 떨어져 땅에 닿을 때 1파운드짜리 공은 1큐빗 떨어진다고 한다. 나는 두 공은 동시에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판자들은 시험을 해보면 큰 공이 작은 공보다 2인치 앞서 땅에 떨어진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2인치 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99큐빗을 숨기고 있다. 오직 나의 작은 오차만 떠벌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엄청난 실수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교회의 적 과학의 순교자 갈릴레오>,마이클 화이트 지음,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104쪽)
   
  갈릴레오의 자유낙하 실험은 인류 이성이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 피사의 사탑  갈릴레오의 자유낙하 실험은 인류 이성이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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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사회 구조의 균열, 고대 철학자들도 '틀렸다'

갈릴레오는 점차 유명해졌고 동조자들도 생겼다.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새로운 과학자들의 노력은 고대 철학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밝혀낸다. 기존 중세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부활시켰던 고대 철학은 이제 새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두터운 벽이 돼 있었다.

26세의 갈릴레오가 했던 자유낙하 실험은 단순히 새로운 발견이 아니었다. 이는 훗날 종교재판까지 이어지는 시작점이었으며, 공고한 기득권 체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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