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여자배구 AVC컵 대표팀 경기 모습 (2018.9.18)

2018 여자배구 AVC컵 대표팀 경기 모습 (2018.9.18) ⓒ 아시아배구연맹

 
프로배구를 관장하는 한국배구연맹(KOVO)이 국가대표팀 규정을 묵살하고, 대한민국배구협회(아래 배구협회)가 보낸 공문까지 무시하는 사태가 벌어져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이 일은 배구계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특히 이번 사안의 심각성은 프로구단들이 대표팀 차출에 비협조적인 사태를 막기 위해 도입한 제도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발단은 한국도로공사 소속 이원정 세터(19세·177cm)의 V리그 출전 가능 여부가 논란이 되면서 시작됐다. 이원정은 지난 7월 AVC컵 대회(9.16~23) 대표팀 선수로 선발됐다. 선발 당시에는 부상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 소속팀에서 훈련 도중 팔꿈치 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입었다. 결국 '8주 진단'이 나왔다. 배구협회는 규정에 따라 이원정을 대표팀에서 제외했다.

배구협회 '국가대표 선발 규정' 제27조 2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돼 있다. "국가대표로 선발된 선수가 부상으로 훈련소집에 응할 수 없을 경우 협회는 지정병원에서 동 선수의 재검을 실시하여 진단기간을 확정한 후 아래 원칙에 의거하여 선수가 대표팀에서 제외될 경우 선수보호 차원에서 진단기간의 2배수의 기간 동안 일체의 국내대회 출전을 불허하며, 2배수의 기간이 경과하였을지라도 해당 국제대회가 종료되지 않았을 경우 대회 종료 후 대표팀이 귀국할 때까지 일체의 국내대회 출전을 불허한다. (아래 원칙) 진단기간 1~2주는 대표팀에 합류, 3주는 감독과 경기력향상위원회가 협의하여 결정, 4주는 대표팀 제외."

위 규정에 따라 배구협회는 지난 8월 이원정 선수의 AVC컵 대표팀 제외 사실과 일정 기간 국내대회 출전이 불가하다는 내용의 공문을 한국도로공사를 비롯해 다른 프로구단들에게도 동시에 보냈다. 해당 공문에는 "교체된 이원정 선수는 국가대표 선발 규정 제27조 2항에 의거하여 2018.11.2.(금)까지 일체의 국내대회 출전을 불허함"이라고 명시돼 있다.

2018~2019시즌 V리그 여자배구 경기는 세계선수권 출전 관계로 남자부와 달리 오는 22일 개막한다. 국가대표 선발 규정에 따라 11월 2일까지는 이원정 선수를 경기 출전 엔트리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

"대표팀 규정, 그건 배구협회 규정"... "KOVO가 다 따를 수 없다"

그런데 뜻밖에도 KOVO가 최근 '이원정 선수는 22일 개막전부터 출전이 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KOVO에서 이 같은 사안을 다루는 부서는 경기 운영과 제도 개선 부문을 전담하는 경기운영위원회, 경기운영실, 심판실, 사무2차장, 경기운영팀이다. 최고 책임자인 경기운영위원회 위원장은 조영호 전 대한배구협회 부회장이 맡고 있다.

이들 부서는 최근 내부 회의를 통해 이원정의 출전 가능 결론을 내렸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20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경기운영위원회 위원장, 경기운영실장, 심판실장 등과 함께 논의를 해서 이원정 선수 건은 V리그 경기 출전을 허용해야 한다고 결정했다"며 "한국도로공사 측이 문의를 했을 때 출전이 가능하다고 답변해줬다"고 밝혔다.

이어 "배구협회 규정과 KOVO 규정이 다르고 상충된다"며 "KOVO 규정(KOVO 규약 제33조 3항)에는 국가대표팀에서 프로 구단의 감독, 코칭스태프, 선수를 차출했을 때 '정당한 사유 없이 불응한 경우에만' 200만 원 이하의 제재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원정 선수는 부상이라는 정당한 사유로 대표팀에 못 나간 경우이기 때문에 V리그 경기 출전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현재 KOVO 규약에는 이 관계자의 설명대로 '정당한 사유 없이 대표팀 소집에 불응한 경우'만 제재금 부과 규정이 있다. 배구협회 대표팀 선발 규정에 있는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된 경우 진단기간의 2배수 기간 동안 국내대회 출전 금지' 규정은 없다. KOVO와 배구협회 규정이 다르다기보다, KOVO 규정에는 없지만 배구협회 규정에는 있다는 게 더 정확하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단호했다. '국가대표팀 규정인데 KOVO도 따라야 맞는 거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건 배구협회 규정"이라며 "우리도 규정이 있는데, 대표팀과 관련해서 배구협회 규정을 다 따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부상 제외시 출전 금지... 대표팀 거부 사태 막고, 선수 보호 차원

배구협회가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된 경우 진단기간의 2배수 기간 동안 국내대회 출전 금지' 규정을 도입한 데는 뚜렷한 이유와 명분이 있다. 프로구단들의 이기주의 때문에 대표팀 선추 차출에 비협조적인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부상 중인 대표팀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런 규정이 없으면, 프로구단과 선수가 대표팀에는 부상을 핑계로 빠져놓고 소속팀의 훈련과 경기에는 뛰는 상황을 막기 어렵다. 과거에 그런 사례가 많았다. 때문에 대표팀 감독만 되면 선수 구성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국제대회 경기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프로 선수들은 진단을 하면 대부분 4주 정도는 나온다. 어느 정도는 부상을 다 안고 있다. 일반인도 가벼운 부상을 당해도 4주 진단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진단서만 제출하면 대표팀에서 제외시켜준다면, 프로 선수 중에서 대표팀에서 뛸 선수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이 규정은 대표팀 차출에 비협조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또한 부상 중인 대표팀 선수를 보호한다는 명분도 있다. 소속 구단의 성적 욕심이 앞서다 보면 대표팀 선수가 부상을 참고 국내대회를 뛰는 경우가 발생할 여지가 많다. 충분한 치료와 재활 기간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도 제도적으로 일정 기간 국내대회 출전 금지를 강제한 것이다.

고교 감독 "도쿄 올림픽 중요한 시기에 하필 그런 결정을..."

그런데 KOVO의 이번 결정은 이 규정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향후 대표팀 운영과 관련해 큰 논란과 파장이 일 수밖에 없다. 대표팀 규정을 프로 선수들은 지키지 않겠다고 한다면, 규정 자체가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한 고교 팀 감독은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KOVO측 입장대로 하면, 학교 선수만 대표팀 규정을 지키고 프로 선수는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이라며 "그런 식이면 다 대표팀에 안 보내려는 분위기가 형성될 텐데, 차기 대표팀 감독이 선수 구성에 얼마나 힘들겠는가. 내년에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따느냐 못 따느냐가 걸린 중요한 상황인데, 하필 이 때 그건 아니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어 "대표팀에는 프로 선수도 있고 학교 선수도 있다. 대표팀 선수는 소속이 어디든 대표팀 규정을 따라야 한다"며 "KOVO가 자기 규정을 들어 묵살해도 되는 게 아니다. 당연히 따라주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에는 프로 선수들이 배구협회에 선수 등록이 안된 상태였기 때문에 배구협회 규정을 프로 선수들에게 바로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있다"며 "그러나 지금은 프로 선수들도 이미 배구협회에 선수 등록이 다 돼 있다. KOVO에 그런 규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배구협회에 규정이 있으면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프로구단들 "KOVO 일처리 방식 문제 있다"

프로구단들도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많다. A 프로구단 관계자는 "한국도로공사는 이효희라는 주전 세터가 있기 때문에 이원정이 출전하고 안 하고가 상대 팀에게 특별히 불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어느 팀에게 유불리를 떠나 KOVO의 일 처리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배구협회가 국가대표팀 규정에 따라서 이미 프로구단들에게 공문을 보내 '출전 불가 선수'라고 통보를 한 상태다. 규정이니까 당연하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며 "그런데 대회 개막을 앞두고 배구협회 공문과 KOVO 결정이 정반대로 가고 있다. 구단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KOVO가 미리 배구협회와 상의를 해서 조율된 안을 가지고 모든 구단에 공문으로 알려주는 게 맞다. 설사 대표팀 규정과 반대되는 결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유와 근거를 모든 구단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공문으로 보내줘야 한다"며 "그 중요안 사안을 일부 구단에게만 구두로 답변해주고, 다른 구단에게는 알려주지도 않았다"고 꼬집었다.

B 프로구단 관계자는 "올해 대부분 프로 팀이 어느 정도 부상이 있어도 대표팀에서 부르면 선수를 다 보내줬다. 국제대회 성적이 좋아야 배구팬도 늘어나고 프로 리그도 흥행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KOVO 결정은 대표팀 차출 규정을 무너뜨리고 다시 과거처럼 비협조적인 분위기로 회귀할 소지도 있다. 내년에 도쿄 올림픽 출전이 걸린 중요한 시기인데, 그런 결정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C, D 프로구단 관계자도 A·B 구단 관계자와 입장이 비슷했다.

배구협회 관계자 "KOVO 크게 잘못 생각, 심각하게 주시하겠다"

배구협회의 핵심 관계자도 발끈했다. 그는 "처음 그런 내용을 들었다. 말도 안된다.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며 "KOVO가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국가대표팀 규정은 KOVO 몇 사람이 앉아서 따를지 말지를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정"며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주시하겠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규정 위반 사태가 벌어지면 배구협회도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 배구가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느냐 못 하느냐는 한국 배구라는 큰 틀에서뿐만 아니라, 배구협회나 KOVO 두 단체에게도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국제대회 성적이 프로 리그 흥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KOVO에 더 절실한 문제이다.

내년에 남녀 배구 모두 도쿄 올림픽 출전권 획득이 좌절된다면, 그 파장은 가늠하기도 어렵다. 배구협회와 KOVO 집행부의 진퇴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여자배구의 경우 김연경 등 핵심 선수들의 나이를 감안할 때, 올림픽 출전과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대표팀 차출 규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결정은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차기 감독을 아무리 유능한 사람으로 세워도 프로구단들의 비협조적인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한국 배구의 경쟁력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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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V리그 KOVO 배구협회 김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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