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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오색단풍이 추풍낙엽 되어 만추의 쓸쓸함을 더하고 있다
 화려했던 오색단풍이 추풍낙엽 되어 만추의 쓸쓸함을 더하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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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오색 단풍은 어느덧 추풍낙엽이 되어 차가운 아스팔트 거리를 이리저리 뒹굴며 또 다른 계절, 늦가을을 부르고 있다. 모든 것이 가득하면서도 한편으론 텅 비어 있는 시기. 떠나 보내고, 떠나야 하는 만추(晚秋)는 서글픈 '이별의 계절'이다.

매년 이맘때, 가을이 깊어질 대로 깊어지면 어김없이 TV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와, 아련한 추억과 막연한 노스탤지어로 뭇사람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노래가 있다.

대중음악, 다른 말로 '유행가'는 특정한 시기에 대중의 인기를 얻어 많은 사람들이 듣고 널리 불러지다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상에 나온 후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사랑을 받으며 아픈 영혼들을 위로해주는 착한 노래가 있다.
 
가을비에 젖은 낙엽들이 차가운 아스팔트 거리를 뒹굴고 있다
 가을비에 젖은 낙엽들이 차가운 아스팔트 거리를 뒹굴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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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마지막 밤, 이용의 '잊혀진 계절'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다소 단조롭지만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피아노 반주와 함께 떨리는 목소리로 한 사내가 슬로 템포로 노래하고 있다. '지금도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기억하느냐'고···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꼭 그렇게 헤어져야만 하는 거냐'고 울부짖듯 묻고 또 묻고 있다.
 
1981년에 개최한 대규모 관제 축제 '국풍 81'을 통해 걸출한 가수 이용이 탄생 한다
 1981년에 개최한 대규모 관제 축제 "국풍 81"을 통해 걸출한 가수 이용이 탄생 한다
ⓒ 지구 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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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시월의 마지막 날에는 싫든 좋든 이 노래를 들어야 한다. 거의 모든 방송에서 이 노래가 동시 다발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가수 이용이 부르는 <잊혀진 계절>이다. 노래 제목 <잊혀진 계절>보다는 '시월의 마지막 밤'으로 더 많이 알려진 노래다.

제아무리 감성이 메마르고 무딘 사람이라도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가슴 한 편이 찡해지면서, 무언가 모를 그리움과 함께 누군가가 떠오를 것이다. 찬바람 송송 불고 가슴 한편이 시려지는 시월의 마지막 밤은 '흰머리 소년 소녀'들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 된다. 어떤 기념일보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 더 의미 있는 날로 다가온다. 밸런타인 데이나 화이트 데이보다 이날을 더 쳐준다.

실연의 경험이 있든 없든 먼지가 부옇게 쌓인 케케묵은 옛 추억을 소환해내며 이날 밤만큼은 '비련의 주인공'이 되기를 자처한다. 세상에 나온 지 사십여 년이 다 돼가는 닳고 닳은 이 노래가 아직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시간을 1980년대, 그러니까 지금의 중장년층들의 청춘 시대로 돌려 보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짓밟고 탄생한 제5공화국. 정통성이 허약할 대로 허약한 전두환 정권은 5·18 1주년을 앞두고 대학생들의 저항 의식을 약화시키고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1981년 5월 거대한 이벤트를 준비한다.

국민 화합을 명분으로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 이름도 거창한 이른바 '국풍 81'을 개최한다. 어마어마한 관제 축제로 닷새 동안 온 여의도 광장이 노래와 춤과 술판으로 흥청거렸다. 야간 통행금지를 일시적으로 해제하는 파격을 보이기도 했다.

이때 대학생 가요제에서 <바람이려오>라는 노래로 금상을 수상한 걸출한 가수, 이용이 탄생한다. 서울예술전문대학에 다니던 이용은 이때를 계기로 본격 가수로 데뷔하여 그 이듬해인 1982년 한국 가요계를 평정한다.

전설의 가왕, '영원한 오빠' 조용필을 제치고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이용을 'MBC 10대 가수왕'으로 등극하게 만든 노래가 바로 10월 하순이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명곡, <잊혀진 계절>이다.

멜로디뿐만 아니라 노랫말 또한 늦가을처럼 쓸쓸하면서도 낭만적이다.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해 가슴 아파하는 애절한 노랫말에는 작사가 박건호(1949 ~ 2007) 시인이 실제로 겪은 실연의 상처가 담겨 있다. 이별의 아픔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오랜 세월 동안 대중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다.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박건호 공원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박건호 공원
ⓒ 원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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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지만 당대 최고의 작사가로 더 알려진 박건호는 박인희의 <모닥불>, 지난해 개봉되어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택시운전사'에 삽입되었던 조용필의 <단발머리>등 3,000여 곡의 주옥같은 노래를 작사했다. 한국 대중가요의 품격을 한층 더 올려놓은 그의 공로가 적지 않다. 박건호 시인의 고향, 강원도 원주시에는 그를 기리는 '박건호 공원'이 있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 해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옛일을 잊으리라/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개 속에 가로등 하나/ 비라도 우울히 내려버리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하얀 겨울에 떠나요···"

또 한 남자가 어둠이 내리는 만추의 거리에서 우울하게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갈 곳을 잃고 헤매고 있다. 독백하듯 우수에 깃든 허스키한 보이스로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다.
 
가을엔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는 가수 최백호
 가을엔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는 가수 최백호
ⓒ KBS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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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애원은 몇 소절도 못 가서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는 처절한 절규로 바뀌고 만다. 대체 누구와의 이별이기에 이다지도 가슴 먹먹하고 절절한 것일까.

대부분의 명곡들이 그러하듯, 노래 속에는 그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인생사가 녹아 있다. 애잔한 바이올린의 선율과 함께 표효하듯 울부짖으며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도 가수 겸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 최백호의 아픈 이별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낭만가객'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최백호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 부산에서 태어났다. 국회의원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를 둔 금수저 중의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6개월 만에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고 만다.

최백호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정을 그리워하며 어린 시절을 쓸쓸히 보냈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지만 어린 최백호는 비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스무 살 무렵의 가을, 믿고 의지했던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저세상으로 떠나고 만다.
 
간절한 애원은 몇 소절도 못 가서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는 처절한 절규로 바뀌고 만다
 간절한 애원은 몇 소절도 못 가서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는 처절한 절규로 바뀌고 만다
ⓒ KBS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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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언덕이 무너지고 말았다. 꼬박 사흘을 울었다. 한동안 슬픔과 방황의 시간이 이어졌다. 최백호를 유일하게 위로해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래와 글'이었다.

그때 써놓았던 글이 노래가 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이 되던 1976년에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라는 타이틀로 세상으로 나온다. 당시 무명이었던 최종혁 작곡가가 그의 노트를 보고 흔쾌히 곡을 붙여 줬다. 노래는 나오자마자 대히트를 쳤고 그 이듬해 'MBC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최백호의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고독하고 가난한 스무 살 청년이 가을에 떠난 어머니를 그리며 쓴 '눈물의 사모곡'이다. 최백호의 '고독과 결핍'은 노래로 승화되어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의 쓰라린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고 있다.

인생사,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은 필연이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이별을 마주 하게 된다. 당사자들에겐 잔인한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이 담긴 노래는 누군가에겐 위로와 힘이 된다. 잘 만들어진 노래는 힘이 세다. 최백호와 이용의 노래처럼.

태그:#잊혀진 계절,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이용, #최백호, #국풍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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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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