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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출신이자 전 여수시의회 김유화 의원의 사회로 주철희 박사와 여순항쟁 토크를 진행 중인 모습
 방송인 출신이자 전 여수시의회 김유화 의원의 사회로 주철희 박사와 여순항쟁 토크를 진행 중인 모습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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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순항쟁에 화해와 상생이 등장했다. 그렇게 처참하게 죽은 가족들에게 국가가 한 번이라도 사과한 적 있나? 그 가족들을 여수시장이나 전라남도지사가 한 번이라도 보듬어 준적이 있나? 죽인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게 용서해달라고 한다. 그 아픔을 당하고 70년을 살아왔는데... 응어리진 마음들을 풀어주지 않고 이제 70년 되었으니 화해와 상생하자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여순항쟁 70주년 토크쇼에서 주철희 박사가 한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청중들은 박수를 쏟아냈다.

"여순항쟁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디딤돌을 마련하자"
 
이번 행사를 주최한 <여수넷통뉴스> 엄길수 대표와 임원들의 모습
 이번 행사를 주최한 <여수넷통뉴스> 엄길수 대표와 임원들의 모습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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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70주년 맞아 지난 19일 오후 전남 여수 예울마루 7층 전시실에서 '사진과 함께한 뮤직토크'가 열렸다. <여수넷통뉴스>와 <여수뉴스타임즈>가 공동으로 주최한 뮤직토크는 GS칼텍스예울마루, 여순항쟁7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여수정치개혁시민행동, 대한성공회 여수교회, 동부매일, 여수신문, 노마드갤러리, 문화공동체 '컬쳐큐브'가 후원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엄길수 <여수넷통뉴스> 대표는 "역사의 가치는 사람이 만든다"라면서 "올해 70주년을 맞이한 '제주4.3항쟁'에서 문재인 정부가 희생자 위령제와 대규모 문화행사를 개최해 국민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대통령의 4.3추념사는 큰 감동을 안겼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엄 대표는 "이제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아 여수지역사회에서도 할 일을 찾았으면 한다"라며 지역민의 관심과 참여를 호소했다. 지역에서 펼쳐진 여순10.19 특별법제정 서명운동 동참 촉구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읽힌다.

김경만 <여수뉴스타임즈> 대표는 "그동안 여순항쟁 행사는 유가족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했다. 여수시가 특정단체를 의식한 관 주도 행사를 하다 보니 시민의 관심이 적었다"라면서 "이젠 시민의 힘으로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이해 여순항쟁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디딤돌을 마련하자"고 덧붙였다.

종군기자 칼마이던스와 호남신문 이경모씨 담은 '그날의 참상'
 
예울마루 행사장에서 지난 12일부터 오는 12월 16일까지 ‘가장 위대한 기록 <라이프>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예울마루 행사장에서 지난 12일부터 오는 12월 16일까지 ‘가장 위대한 기록 <라이프>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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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당시 국군이 투입된 가운데 불타고 있는 여수시내 모습. 당시 여수시내의 1/3이 불탔다.
 여순항쟁 당시 국군이 투입된 가운데 불타고 있는 여수시내 모습. 당시 여수시내의 1/3이 불탔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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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당시 미군이 기관총을 든 가운데, 운동장에 모여있는 여수시민의 모습
 여순항쟁 당시 미군이 기관총을 든 가운데, 운동장에 모여있는 여수시민의 모습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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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도해온 예울마루재단은 지난 12일부터 오는 12월 16일까지 '가장 위대한 기록 <라이프>사진전'을 진행한다. 라이프 사진전은 보도사진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면서, 국제적 사건에 대한 사진을 비중 있게 다뤘다는 평을 얻고 있다.

특히 이번 라이프 사진전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을 가지고 있는 여순항쟁 당시의 모습을 현장에서 생생히 담아낸 종군기자 칼마이던스의 작품과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 지평을 연 광양출신 이경모씨가 직접 찍은 여순사건 사진 특별 전시코너를 마련했다.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가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아 특별전에 전시된 사진 해설을 하고, 당시 일어난 일들을 생생히 들려줬다. 이날 제주4.3유족회에서 40여 명이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여순항쟁의 도화선이 된 제주4.3항쟁으로 인해 그동안 고통 받았던 여수 지역 유족들과 아픔을 나눴다. 여순사건 특별법제정을 위한 서명운동도 이어졌다.
 
행사장에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는 모습
 행사장에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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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행사인 뮤직토크에서는 방송인 출신이자 김유화 전 여수시의회 의원이 사회를 맡아 주철희 박사와 여순항쟁 토크를 이어갔다. 이날 노래 공연에는 상록수 밴드를 비롯, 여수문화방송에서 방영된 여순사건 70주기 특집 '그 아픔과 선율'에서 '여수블루스', '여수야화'를 부르면서 알려진 서혁신씨와 빨치산 노래전문 밴드인 산오락회가 초청됐다. 여순사건 당시 불러졌던 여수블루스, 여수야화, 산동애가에 얽힌 사연은 가슴을 먹먹케 했다.

노래로 승화된 그날의 아픔, 여순항쟁
 
빨치산 노래전문 밴드인 산오락회가 산동애가와 부용산을 부르며 분위기를 한층 돋웠다
 빨치산 노래전문 밴드인 산오락회가 산동애가와 부용산을 부르며 분위기를 한층 돋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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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블루스'는 여수경찰 강석우가 노래를 만들면서 여수시민들에게 구전으로 전해진 노래다. 기록을 보면 반란군과 지방좌익들이 경찰을 죽이고 모든 지서를 불태워 버렸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노래를 작곡한 경찰 강석우는 국군에 의해 초토화된 여수의 아픔을 노래했다.

'여수야화'는 공식음반으로 나온 노래다. 1949년 7월에 남인수가 불렀고 목포의 눈물을 작곡한 이난영의 오빠인 이봉용이 노래를 작곡했다. 여수야화는 이승만 정부가 음반출시 두 달 만에 금지한 대한민국 최초의 금지곡이다. 

또, 산동애가는 구례 산수유마을 19살 먹은 처자의 이야기다. 노래의 내용은 이렇다. 처자에게는 세 명의 오빠가 있었다. 큰오빠는 일제감정기 때 징용으로 끌려가 죽고, 둘째 오빠는 10월 말에 국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고 셋째 오빠마저 또 국군에 의해 죽게 된다. 

기구한 인생살이에 어머니가 딸을 잡고 셋째 오빠마저 죽으면 대가 끊긴다고 하니 막내딸인 백순례가 자기 오빠를 대신해 죽으러 간다는 내용이다. 여순사건 때 흔했던 '대살'(대신해서 죽음)이 벌어지는데, 산동애가는 셋째 오빠를 구하면서 불렀던 구슬픈 노래다.
 
왜 여순항쟁인가?
 왜 여순항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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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이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가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것을 기점으로 1955년 1월 23일까지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4.3사건 투입을 앞둔 14연대는 동족상잔 절대 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며 출병을 거부했다.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군인들은 정부군에 진압됐다.
 
한 관람객이 여순항쟁 9일간의 기록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한 관람객이 여순항쟁 9일간의 기록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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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0월 19일 8시경에 봉기에 나선 14연대가 여수시내로 나온 시간은 새벽 1시경이라고 알려졌다. 이후 6시 반에 순천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여순사건 전문가 주철희 박사는 "당시 14연대 군인들이 여수, 순천, 광양을 점령했다는 것은 다 거짓이다"면서 "14연대 군인들의 목표지는 딱 한 곳, 지리산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제주에서 4월 3일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산으로 들어갔듯 부당한 명령을 어기고 남아있으면 죽음을 당하기 때문에 지리산으로 향하면서 이를 토벌하려는 국군과 교전이 일어난 지배 권력자의 부당함에 맞서 싸운 동학과 같은 궤를 이룬다"라고 말했다.

"'남로당의 지령에 의한 반란'으로 굳힌 박정희"
 
여순항쟁 당시 군인들에게 좌익으로 색출된 시민들 모습
 여순항쟁 당시 군인들에게 좌익으로 색출된 시민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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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힌 군인들의 모습
 붙잡힌 군인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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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박사는 "특히 14연대 반란의 주모자로 모든 기록에 지창수가 여순항쟁을 총지휘했다고 기록되었으나 이건 사실이 아니다"면서 "여순항쟁 총지휘자는 김지회 중위"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창수가 왜 14연대의 반란의 주모자로 등장하냐면, 정부는 끊임없이 남로당지령에 의해 여수지역 지방좌익과 결합되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게) 지금까지의 정설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려면 중대장이 이곳 출신이어야 하는데 김지회는 함경남도 함흥출신이다. 지창수를 반란의 주모자로 몰아 남로당의 지령에 의한 반란으로 공고화시키기 위한 박정희 짓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라이프 사진전 관람하는 시민들의 모습
 라이프 사진전 관람하는 시민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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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들의 질문도 이어졌다. '경찰가족이나 군인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반란'이지만, 시민단체는 '항쟁'이라고 말해 해석이 충돌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반란'이라고 말하는 이들 입장에서도 여순항쟁으로 받아들일 수 있냐'는 물음에 주철희 박사는 이렇게 답했다.
 
여순항쟁 당시의 모습을 현장에서 생생히 담아낸 종군기자 칼마이던스의 작품과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 지평을 연 광양출신 호남신문 이경모 기자가 직접 찍은 사진을 설명하는 주철희 박사 모습
 여순항쟁 당시의 모습을 현장에서 생생히 담아낸 종군기자 칼마이던스의 작품과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 지평을 연 광양출신 호남신문 이경모 기자가 직접 찍은 사진을 설명하는 주철희 박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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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에 나온 김원봉이 신채호 선생을 찾아가 조선혁명선언서를 써달라고 했는데 마지막에 '민중은 우리혁명(독립)의 대번영이다. 폭력은 우리혁명의 유일한 무기다'라고 썼죠. 부당한 지배 권력에 맞서 싸우려면 할 수 없이 폭력이 수반됩니다. 프랑스 혁명도 정치인을 가두고 있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침공하면서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6월 항쟁에서도 각목과 짱돌을 들었습니다. 이런 모순을 잘 알고 있듯 14연대 봉기로 우리 지역 우익도 죽고 병사도 죽은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경찰과 군경들을 가해자라고 지목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어쩔 수 없이 국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죠. 여수에 있는 보훈단체분들은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를 향해 가해자라고 말하는 것이지 이분들에게 가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순항쟁에 관해 중요한 건 특별법이기도 하겠지만, 이 사건을 올곧게 기억할 수 있는 장들을 마련하는 겁니다. 우리부터 '반란'이라며 잘못 인식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항쟁'이라고 부르라고 요구하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태그:#여순항쟁, #라이프 사진전, #주철희, #여수넷통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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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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