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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전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야. 그 이전에 읽은 고전들은 축약본이나 동화로 각색한 것이었어.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여행기>, <톰 소여의 모험>은 동화나 만화로 읽었고, 다른 국내외의 유명한 고전들은 한 쪽짜리 요약본으로 읽었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누나의 국어 참고서 맨 뒤에 국내외 고전 소설을 한쪽 분량으로 소개한 것이 있었어. 그걸 재미나게 반복해서 읽었지. 한 쪽짜리 요약본인데도 흥미진진했어.

고전을 요약본이나 동화로 읽으면 당장은 심심풀이로 좋지만 부작용이 생겨. 스스로 그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한 쪽짜리 <무기여 잘 있거라> 요약본을 읽고 '아는 책' 이나 '읽은 책'이라고 생각해 원전을 안 읽는 경우가 많아. 
  
줄거리 위주의 요약본을 읽으면 작가의 의도를 깊이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경향도 있어. 그저 신기한 모험담으로만 생각했던 <걸리버 여행기>는 사실 부패와 탐욕이 판치는 인간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한 풍자소설이고, <로빈슨 크루소>는 당시 영국 시민에게 중요한 가치였던 고난을 이겨 내는 용기, 진취적인 개척 정신, 청교도주의적인 생활 방식이 고스란히 반영된 소설이라는 것을, 원문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지.   
 
무기여 잘 있거라 표지
▲ 표지 사진 무기여 잘 있거라 표지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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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거라>도 같은 경우야. 요약본으로 읽었을 때 이 소설은 그저 1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이탈리아군 장교와 영국인 간호사가 나눈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 이야기였어. 대학 때 원문으로 읽고 나서야 이 소설이 반전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지. 

전쟁을 비판하고 시대를 풍자하는 문학 작품은 많아. 작가라면 당연히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거든.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만 봐도 그래.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인기를 얻고 있는 조정래 작가를 생각해 보자. 그의 대표작 <태백산맥>은 해방 전후부터 한국전쟁까지를 배경으로 하는데 자료 수집에 공을 많이 들였어. 답사도 수없이 하고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그 당시 신문과 자료를 찾았거든. 

헤밍웨이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자료를 수집하거나 답사하는 대신 직접 겪고 목격한 사실을 토대로 소설을 썼어. 현장감이 높을 수밖에 없지.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켜보는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져. <무기여 잘 있거라>에 등장하는 풍경이나 상황 묘사를 보면 마치 헤밍웨이 자신이 그 이야기의 현장에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사실적이야. 

<무기여 잘 있거라>의 주인공 헨리는 군의관으로 활약하다가 전선에서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후송돼. 부상 치료를 받다가 자신과 운명을 함께할 연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결혼은 못 하지. 이것도 바로 헤밍웨이 자신의 이야기야.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는데, 그때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비극적으로 만드는지 경험했어. 전쟁을 반대하는 그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지. 전쟁에 참전하지도 않고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쓰는 작가들과 달리 직접 겪은 참상을 이야기하며 전쟁을 반대하니까 독자들은 헤밍웨이의 주장에 쉽게 수긍할 수 있었어.
 
'겨울이 시작되면서 비가 줄기차게 내렸고, 비와 함께 콜레라가 찾아왔다. 하지만 전염병은 곧 진압되었고 군대에서 그 병으로 죽은 사람은 겨우 7천 명뿐이었다.' - <무기여 잘 있거라> 11쪽

흔히 헤밍웨이를 하드보일드, 즉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체의 대가라고 부르는데 "군대에서 그 병으로 죽은 사람은 겨우 7천 명뿐이었다"라는 표현이야말로 반전 의지를 가장 잘 표현한, 헤밍웨이 문체를 대표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해. 그 많은 군인이 전투가 아닌 병으로 사망했는데 "겨우"라고 말할 만큼 전쟁이 무섭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잖아. <무기여 잘 있거라>에는 냉소와 허무를 드러내는 문장이 많아. 사실 글 전체에 냉소와 허무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지.
 
'언젠가 캠프에 나갔을 때 이런 것을 보았다. 내가 화톳불에 장작을 올려놓자 개미들이 그 장작에 잔뜩 달라붙었다. 장작이 타기 시작하자, 개미는 떼를 지어 먼저 불타는 중심부로 몰려갔다가 되돌아서서 장작 끝으로 달아났다. 끝에 몰린 개미들은 불 속으로 떨어졌다. 어떤 놈들은 몸에 화상을 입어 납작해져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불길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대부분은 불길 쪽으로 몰려갔다가 장작 끝으로 되돌아 나와 뜨겁지 않은 장작 끝에 떼를 지어 몰렸고, 결국에는 불 속으로 떨어졌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개미들로서는 세상의 종말이 온 셈이겠지. 구세주가 될 멋진 기회가 내게 왔으니, 화톳불에서 장작을 집어 개미들이 도망칠 수 있는 곳으로 던져 줄까? 하지만 나는 그저 장작에 물 한 컵을 끼얹었을 뿐이다. 그것도 컵에 있던 물을 비우고 위스키를 따른 다음 다시 물을 탈 생각으로, 불타는 장작에 끼얹은 물은 개미를 삶아 죽이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 - <무기여 잘 있거라> 428쪽 ~ 429쪽

많은 사람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해. 태어나자마자 사망한 자기 아들의 소식을 접한 헨리가 삶에 대한 냉소와 허무를 드러낸 것이라고. 헨리는 자기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을 마치 부러워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여. 세상의 규칙에 지배받고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개탄한다고도 볼 수 있지. 그런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 

헨리가 말하는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의 규칙은 전쟁이 아닐까?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가가 전쟁을 선포하고 개인을 전쟁터로 끌고 가는 것도 모자라 필요에 따라 소모품처럼 희생시키잖아. 화톳불에 장작을 올려놓는 것은 국가가 전쟁을 일으킨 것을 뜻하고, 개미가 떼를 지어 불길의 중심부로 몰려가는 것은 전쟁터로 끌려간 개인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영문도 모른 채 소모품으로 동원된 개인들은 전쟁을 겪으면서 세상의 종말과 다름없는 생지옥을 경험하지. 말하자면 헤밍웨이는 전쟁을 치르는 개인을 개미 떼에 비유한 것 같아. 전쟁이 개인을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키는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나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전후(戰後) 세대여서 어렸을 때는 한국전쟁을 먼 나라의 축구 경기처럼 느꼈어. 편을 나눠 싸우고 포로를 생포해서 고문하는 전쟁놀이도 즐겨 했지. 전쟁 드라마를 보고 흉내 낸 것에 불과하지만, 한국전쟁을 오래전에 일어난 무서운 사건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 

언젠가 네 할아버지의 서류 보관함을 우연히 열었다가 명함 크기의 '전사 통지서'를 발견했어. 신혼 때 한국전쟁에 끌려갔다가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전사 통지서였어. 한 부모의 금쪽같은 자식이었고, 한 집안의 장손이었으며,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남자가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전쟁터에 끌려가서 목숨을 잃었는데 국가는 등기 우편물 도착 통지서보다 초라한 전사 통지서 한 장만 달랑 보낸 거야. 전쟁이란 개인의 존엄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지.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통해 전쟁에서 개인이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불 속으로 돌진하는 개미 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줬어. 언제든 필요에 따라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 이 책은 전쟁을 무대로 한 로맨스 소설이 아니야. 로맨스를 소재로 한 반전소설이지.

무기여 잘 있거라 -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편소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열린책들(2012)


태그:#전쟁,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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