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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50대 후반. 베이비 붐 세대 끝자락에 태어나 개발 독재와 민주화를 경험하면서 기성세대가 됐다.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 결혼, 자녀 양육, 집 장만 등 앞만 보고 달렸는데 어느덧 멈출 때가 됐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고, 이에 적응하지 못한 내 또래는 언제부터인가 퇴물이 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정년이 몇 년 남았음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2월 명예퇴직했다. '명예'라는 말은 의미 있지만 '퇴직'이란 말이 첨가되면 일터에서 나의 쓸모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퇴직 후 무료한 시간

3월부터 주체하지 못할 만큼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 아내와 아이가 출근하면 텅 빈 집에서 혼자 하루를 보내는 일상이 반복됐다. 집안일을 하지만 시간은 제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단 하루도 놀아보지 않았는데. 적응하지 못한 것은 직장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연말, 퇴직이 결정되면서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작성해 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직장에 다닐 때는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퇴직이 결정되니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2주 정도 빈둥대니 몸과 마음이 모두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도 생기고 생활에 활력이 없었다. 이때 불현듯 생각난 것이 어학연수였다. 영어가 자유로워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아내에게 이야기를 꺼내니 가타부타 답이 없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황당한 제안에 당황한 듯했다. 일주일쯤 지나 슬며시 나에게 물었다.

"어학연수 진짜 가고 싶어?"

어학연수 준비에 들어가면서 생활에 활력이 생겼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서점에 가서 관련 책자를 보면서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미국,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몰타, 필리핀 등 어학연수를 가고 싶은 나라는 많았지만 비용과 안전이 선택의 최우선. 백수인 내게 비용은 무시할 수 없는 장벽이었다.

몰타와 필리핀이 연수비가 저렴한 편이지만 몰타는 너무 멀어서 끌리지 않았고 필리핀은 안전이 문제였다. 캐나다와 뉴질랜드는 최적의 조건이지만 비용이 문제여서 집사람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어려웠다. "싸고 좋은 것은 없다"라는 격언처럼 저렴하면서도 최적의 조건을 갖춘 어학연수 국가는 없는 것이다.
   
필리핀 지도
 필리핀 지도
ⓒ 네이버 세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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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인터넷 검색을 하다 필리핀 북부 바기오라는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바기오는 마닐라에서 버스로 5시간 정도 떨어진 해발 1500m 산악 지대에 있는 휴양도시이자 교육도시. 필리핀에서 가장 치안이 안정됐으며 카지노나 유흥 시설이 없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곳.

더구나 대부분 어학원 원장이 한국인이며 교사와 학생 1:1로 진행되는 수업이 많다는 정보에 끌렸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50대 후반이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수업을 받는 것 자체가 고문일 수 있으니. 그렇게 난 바기오란 곳에 꽂혔다.
 
필리핀 북부 산악지대 바기오 모습
▲ 바기오 시내 필리핀 북부 산악지대 바기오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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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1번 출구

어학연수지가 결정되었으니 다음은 유학원을 선택할 차례. 서울에서 유학원이 밀집된 곳은 강남역 11번 출구. 강남역 주변은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자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곳으로, 어학원, 유학원, 사무실 등이 몰려 있다. 특히, 11번 출구 주위에는 유학원이 밀집돼 있어 유학이든 어학연수든 외국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유학원을 알아보면서 선배들의 조언이 생각났다. '직장과 세상은 다르다'라는 것. 퇴직금으로 섣불리 사업이나 장사를 해서는 안 되며 나에게 먼저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평생 직장생활을 했다는 것은 온실에서 자란 것과 같아서 세상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헤쳐나가기가 어렵다.

인터넷을 통해 바기오에서 마음이 끌리는 어학원을 몇 군데 선택했다. 그런 다음 강남에 있는 유학원 자료를 보면서 상담을 받고 싶은 유학원 목록을 작성하고 전화로 상담 시간을 정했다. 유학원은 천차만별이었다. 호텔 로비처럼 화려하게 장식하고 젊은 친구들이 세련된 복장과 각종 통계를 제시하는 곳부터 동네 복덕방처럼 후덕하면서 마음 편안하게 상담하는 곳까지.

며칠 동안 발품을 판 후에 한 곳을 선택했다. 원장님의 인상도 마음에 들었고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했으며 왕복 항공권까지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흡족한 마음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계약금을 건넸다.

선배들의 조언대로 세상으로 첫발을 제대로 띄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다른 유학원에서 전화가 왔다. 같은 조건인데 내가 계약한 금액보다 100만 원이 싼 비용을 제시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계약한 유학원은 필리핀 왕복 항공권을 제공하겠다는 것만 다를 뿐. 당시 항공권 가격이 30만 원 정도였다.
 
필리핀 마닐라행 아시아나
▲ 인천공항 필리핀 마닐라행 아시아나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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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수업료를 내고 세상을 배운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을 후회한들 소용없는 것.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3개월의 어학연수가 결정됐다. 막상 결정되니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0여 년 동안 한 번도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다.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낯선 외국 생활이 두렵기도 하고. 그렇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진리를 믿으며 4월 중순 인천국제공항에서 마닐라행 항공기에 올랐다.

3개월의 필리핀 어학연수가 시작된 것이다.

태그:#필리핀, #바기오, #어학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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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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