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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신기철
 저자 신기철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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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그는 앞날과 정년이 창창히 보장된 대기업 정규직에 일부러 지원하지 않았다. 그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첫 취업을 한곳은 뜻밖에 인천의 한 금속공장이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그는 구로와 영등포 지역의 공장에도 취업하여 '직장생활'을 하고 노동운동을 하며 10여 년간 금속노동자로 일했다.

그 후 지난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기자와 함께 '직장동료'로 일하면서 그는 과거사정리기본법 제정운동에 참여했다. 위원회 활동이 끝날 즈음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이 이어지고, 과거사정리가 한국사회 이슈로 등장했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의문사 유족들이 한 겨울에 천막을 치고 철야농성을 하자 그도 '당연히' 참여하여 2005년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난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자 그는 이에 참여하였고 다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우리는 만났다. 이후 5년 동안 그는 부역혐의 사건을 담당하면서, 전부터 개인적으로 조사해 오던 고양 금정굴 사건을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해체되었지만, 국가범죄로 인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규명하기 위한 그의 개인적인 노력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신기철은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 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 나타난 민간인학살사건은 물론 이미 진실규명 된 사례들을 인권의 관점에서 심층 재구성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진실 역시 그가 결코 놓칠 수 없는 관심사다.

2010년 이후 그는 여섯 권의 책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멈춘시간1950>, <전쟁범죄>, <국민은 적이 아니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를 썼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펴낸 책이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죽은 자들을 위한 산 자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대한민국은 왜 자기 국민들을 학살했을까? 부모라는 이유로, 형이나 동생이라는 이유로 죽여야 했을까?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죽여야 했을까? 이 "평범한 악"을 숨겨 온 대한민국은 과연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등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가 금정굴 사건의 진실을 찾아 떠난 여정이 어느 덧 28년이 됐다. 이 책은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저자 신기철을 포함한, 산 자들의 활동 기록이다. 지난 9월 27일부터 10월 16일까지 저자와 이 책과 관련해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 싣는다.

희생자들, 여전히 '빨갱이'로 매도당해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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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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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금정굴 학살 사건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소개해달라.
"일제강점기 당시 경기도 고양시 탄현동에 금을 캐다만 광산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한국전쟁 중 9‧28수복 직후 경찰이 200여 명의 민간인을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우물같이 생긴 수직 금광이라 금정(金井)굴이라고 부른다.

금정굴 사건은 국가기관이 재판 없이 민간인들을 총살했으니 국가범죄이고, 적의 점령시기 적을 도왔다며 민간인을 집단 총살했으니 전쟁범죄가 되는 것이다. 피해자들 대부분이 부역혐의를 받는 사람들의 가족들이었고, 가해자는 고양경찰서와 그의 지휘를 받는 의용경찰대, 태극단, 치안대였다."

- 어느 부모 형제의 유골인지 구별할 수 없지만 같은 민족의 후손으로서 금정굴에서 학살된 희생자들의 유골을 편히 모실 수 있는 작은 위령시설을 마련하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진전이 없다.
"고양에서 금정굴 위령사업을 조직적으로 반대하는 집단은 자유한국당과 보훈단체들이다. 사실 나부터도 이들이 반대하는 합리적 이유를 알 수 없다. 금정굴 학살자 중 생존자는 태극단원들 뿐인데 이들 대부분은 고양 지역 사람들이 아니다. 재향군인회나 전몰군경유자녀 등 단체 회원들 역시 고양 토박이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들이 모두 반대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나는 그 이유가 "공범의식의 전국적 공유"에 있다고 본다. 자신들이 활동했던 어느 곳에서 학살이 벌어졌고 그 사건에 관련되었을 수 있음을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야를 넓혀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동안 독재권력의 국가주의로 특권을 유지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독재권력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곧 국가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민주화된 국가의 권위가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니 학살당한 민간인들을 '부역자'니 '빨갱이'니 매도하면서 '학살의 합리화'를 기도하는 것이다. 희생자들을 향한 '빨갱이'라는 주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보훈단체 태극기 부대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

그들에겐 전쟁이 오히려 호기였다
 

- 초기 한국전쟁사에 대한 우리나라 국방부의 공식적 입장은 지연 전투였다. 패전의 측면보다 전략적 후퇴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1950년 9.28 서울수복 후 이승만 정권은 왜 남한 국민들에게 인민공화국시절 부역의 책임을 지우고 그 엄청난 민간인학살을 자행했다고 보나?
"전쟁의 참상이 워낙 심각하다보니 정작 이승만 정권이 친미독재정권이었다는 사실을 놓치는 것 같다. 2017년 봄 '촛불혁명'이 진행될 당시 군의 쿠데타 계획이 공개돼 우리를 놀라게 했다. 1980년에는 실제 시행했고. 민주주의를 눈엣가시로 여긴 사람들에겐 전쟁이 오히려 호기인 것이다. 어차피 권력을 놓칠 상황에서 혼란기는 다시 한국사회를 독재체제로 리셋할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얼마 전 금정굴 위령사업 지원조례를 반대하며 고양시의회를 점거하던 사람들이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이 너무 바뀌었어. 전쟁이 다시 나서 이런 놈들 싹 죽여야 해.' 

나는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민간인학살은 이승만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리셋' 행위였다고 본다. 전국 각 지역의 반공시설을 보면 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고양의 태극단뿐 아니라 곡성 태안사의 경찰, 인천상륙작전과 영흥 덕적도 학살이 지금도 지역 주민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까지 확인했다. 비록 녹슬긴 했지만 잠재적 반대자는 물론 미래의 반대자까지 제거하려던 공격이었던 민간인 학살은 68년이 지난 지금도 마무리되지 않은 것이다."

- 태극단 단장이었던 이장복은 1999년 10월 14일 경기도의회 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참고인 진술에서 "태극단은 부역자 연행 과정에 1회 참여했을 뿐 어떠한 학살에도 가담한 일이 없고, 법치주의 국가이념에 따라 체포한 부역자들을 적법하게 인도하기만 했다. 또 금정굴 사건발발 이전에 군입대 지원을 위해 일산을 모두 떠나있었다"고 주장했다. 태극단은 어떤 조직인가? 그리고 위 이장복씨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태극단원들은 인민군 점령 직후인 1950년 7월 5일 탄생한 비밀결사로서 인민군 점령기 정보 활동을 주로 했으며 수복직전 점령체제의 혼란시기에 무력 저항활동을 했다. 용산 전쟁기념관에는 이를 증명한다며 총이며 칼, 머리띠, 태극기, 선전물과 등사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지만 조잡하기 그지없어 한숨만 나온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비교적 큰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 비록 소그룹의 저항활동이더라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이후에 발생하는데, 하나는 일부단원들이 후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사실이고,다른 하나는 상당수 단원들이 수복 후 금정굴 학살에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태극단원들이 학살당한 사건은 1950년 9월 28일 고양 송포면 덕이리 은장마을에서 벌어졌는데, 16명이 끌려가다가 3명은 도망치고 13명이 학살당했다. 6명은 고양 출신이고 7명은 파주 출신으로 모두 청석초등학교 교사로 보인다. 이 사건에서 생기는 근본적인 의문은 학살일인 9월 28일이 고양지역 전체가 수복된 날이라는 점이다. 수복된 날 나는 총소리가 인민군 측의 것이었을까?
 
 1995년 10월 4일 발굴된 유골의 모습
 1995년 10월 4일 발굴된 유골의 모습
ⓒ 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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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반대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다. 희생자 중 상당수가 선생님이었다는 사실도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부역자라며 죽임을 당하는 교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국방부 역시 이 사건 발생일을 9월 20일 또는 22일로 앞당기는 이유도 스스로 가해 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여튼 이 사건을 근거로 희생자가 38명으로 늘었다가 54명까지 부풀려졌고 대부분이 가묘인 공동묘지가 조성된 후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의해 제1호 반공유적지로 선정됐다. 현재는 현충공원으로 탈색되기에 이르렀다.

다음 발생한 문제는 수복후 금정굴 학살자로 가담한 사실에서 발생한다. 태극단원들의 군사 행위를 근거로 보훈대상으로 결정됐던 모양인데 실제 이들이 벌였다는 군사행위의 증거들은 모두 금정굴 학살에 가담한 증거들이라는 사실이다. 자신들은 경계만을 담당했다던가 인수인계만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검찰 기록에는 명확히 20명이 학살에 가담했다는 증언들이 일관성 있게 등장한다.

학살을 자백한 단원도 있다. 이들이 제시하는 사진이나 신분증, 머리띠나 완장을 보면 모두 인민군 점령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수복 후 치안활동을 하면서 사용하던 것을 근거로 무장저항투쟁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학살에 동원됐던 태극단원들의 이후 운명을 보면 금정굴 희생자유족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어디까지 사악해 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기도 한다. 이장복씨는 대원들이 마치 자원해서 군에 입대한 것처럼 설명했지만 이는 사실로 볼 수 없다. 북한점령지로 가서 선무공작을 한다며 청년들을 유인했고 결국 20여 명이 북파공작에 강제동원 되었고 이들이 HID 나 켈로부대원으로 투입되어 사선을 넘나들었다고 한다."

[다음 기사]"이승만 때문에... 죄 없는 가족까지 학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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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