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랑꾼, 위대한 무표정, 버스터 키튼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은 할리우드의 무성 영화 시대를 풍미한 배우이다. 스톤 페이스라는 애칭처럼 영화 속의 그는 늘 무표정이다. 물에 빠지든 바닥이 꺼지든 간에, 늘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행여나 악마가 키튼의 감정을 훔쳐가 버린 것은 아닌지, 그 대가로 무성영화 시대의 위대한 몸 연기를 받은 것은 아닐지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무표정이 마냥 딱딱하기만 하진 않다. 키튼의 포커 페이스 속에는 보다 다채로운 감정이 느껴진다. 비유하자면, 그는 마치 검은색처럼 세상 모든 색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화면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검은색의 청년은, 그의 사랑스러움에 비견하면 너무나도 칙칙해 보인다. 무표정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흑백영화인 탓도 있다. 그러나 흑백영화라는 점은 그가 사랑스러움을 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한다. 키튼의 무표정과 과장되었지만 절제된 몸놀림이 합쳐지는 순간,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오즈랜드에 발을 내디딜 때와 같은 마법이 일어난다. 흑백의 필름 안에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 우리는 이제 그가 보내는 구애를 몸으로 받게 된다. 

키튼의 영화에는 항상 어느 여인이 나온다. 그리고 키튼은 항상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말하자면 키튼의 영화는 항상 사랑 영화이다. 가끔 예외도 있지만 거의 대다수가 그렇다. 그리고 그 사랑 영화들에서 키튼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과정과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 결과적으로 진정한 사랑을 마주하게 된다는 점은 같다.

말하자면 우리가 키튼에게서 목격하는 구애의 춤은 우리를 위한 게 아니라 그녀를 위한 것이다. 이때 그 구애는 그녀를 향한 것이니 작품 속 키튼의 목적 또한 사랑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키튼의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키튼 본인이 아니다. 키튼의 영화에는 키튼이 주인공이지만, 그는 사랑을 말하려고 자신을 도구로 이용한다. 키튼 본인이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점에서 키튼의 사랑이 핵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키튼 본인은 감독이기도 했으므로 사랑 그 자체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는 감독으로서, 주연배우이기도 한 스스로를 작품의 메시지를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영화 <세븐스 찬스>의 한 장면

영화 <세븐스 찬스>의 한 장면 ⓒ 버스터 키튼

 

영화와 배우와 사랑의 삼각관계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감독과 배우의 관계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한다. 그리고 배우들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다. 하지만 분명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것이 주종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감독이 배우를 기용하는 것이지만 배우가 없다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물론 배우가 없는 영화도 있지만, 키튼의 영화에는 항상 배우가 나온다. 그리고 그 배우는 바로 키튼 본인이다. 말하자면 그는 감독과 배우라는 두 가지 인격이 있다. 이 두 가지 인격은 서로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어느 하나만 있어서는 키튼의 영화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키튼의 영화는 감독의 관점과 배우의 관점, 두 가지로 보아야만 한다. 

이러한 사실은 키튼의 영화를 볼 때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다. 감독이 배우를 겸한다는 건, 자기가 생각하는 캐릭터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키튼은 자신이 기획한 각본으로 감독을 맡았으며 또한 주연배우기도 했다. 말하자면 키튼의 영화는 단순히 메시지에만 불과하지 않고 키튼 그 자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영화가 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를 로맨티스트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로맨티스트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지고 만다. 말 그대로 첫눈에 반해버린다. 이러한 모습을 한 단어로 줄이면, 운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해본다. 만약 이러한 운명이 키튼의 영화 전체를 이루는 주축이라면, 키튼은 운명 같은 사랑을 믿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키튼의 영화에서 키튼이 한 여자에게 첫눈에 반하는 것은, 관객 또한 이 영화에 곧바로 반할 것이라는 어떠한 예고가 아닐까?

배우로서의 그는 운명 같은 사랑을 믿고, 감독으로서의 그는 이 운명 같은 사랑을 관객에게 전하고 싶어한다. 말하자면, 감독이자 배우인 키튼에게는 사랑에 관한 강한 믿음과 그것을 전파하려는 깊은 신앙심이 있다. 그래서 그가 관객인 우리에게 보내는 예고장은 흡사 종교에 가깝다. 태초부터 우리에게 도달했고 반드시 열어보게 되리라는 예언에 가깝다(물론 나는 지금 키튼의 영화가 종교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이 예고장은 아주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키튼의 영화를 처음 볼 때는 그것이 예고장인지를 모르지만, 줄곧 그의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예고장이 어느 순간 영화 시작 전부터 우리에게 도착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그 예고장은 말 그대로 예고되어 있었다. 단지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키튼의 팬이 된 우리는 그의 영화가 항상 예고장을 보낸다는 것을 알아챈다.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아도 문맥상으로 느껴진다. 키튼을 줄곧 보아온 사람들에게는 키튼이라는 사람을 이루는 어떠한 구심점이 아주 또렷이 보인다. 

우리는 예고장을 받고 영화 관람을 시작한다. 그의 영화에서 키튼은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어떠한 고난이나 역경도 이겨낸다. 떠돌이 찰리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종착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과는 달리, 버스터 키튼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안다. 말하자면 그는 정말로 로맨티스트이다. 그가 사랑에 빠지는 건 우연이지만 이후로의 진행은 온전히 제 의지이다. 물론 키튼의 영화에서 키튼은 항상 우연하게 그녀를 마주하고, 그 순간에 바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서로 자주 만나서 호감을 쌓는 게 아니라, 그냥 첫눈에 반해 버린다. 혹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사랑에 빠져 있기도 한다. 이때, 키튼의 운명적인 사랑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다. 
 
 영화 <일주일>의 한 장면

영화 <일주일>의 한 장면 ⓒ 버스터 키튼

 

발레와 슬랩스틱

어떤 영화에서 키튼은, 이미 사랑에 빠져 있기에 그 사랑을 줄곧 유지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경우, 사랑에 관한 의지는 인물의 관계가 아니라 동작 하나하나에 스며들곤 한다. 이를테면 <일주일>에서 키튼은 앞뒤 맥락 없이 어느 여인과 부부 사이로 나오는데, 조립식 집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키튼은 이미 사랑에 빠진 상태이고, 그렇기에 사랑에 쏟을 에너지는 몸동작으로 간다. 말하자면 사랑스러운 키튼의 몸동작은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다르게 말해, 그의 몸동작은 표현이라기보단 방출이라는 수사어가 어울린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바깥으로 철철 넘치기 때문이다.

멀리 뻗은 손동작에서 고고한 리듬과 선이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이 리듬에서 한 마리의 새를 발견한다. 이것은 발레이다. 행동 하나가 우연한 실수를 만든다. 그리고 그건 몹시 우스꽝스럽다. 이것은 슬랩스틱이다. 말하자면 발레와 슬랩스틱의 공통점은 동작 하나하나에 어떠한 메시지도 없다는 것이다. 쭉 뻗은 손이 만들어 낸 한줄기 선에 어떤 메시지가 있다면, 그건 분명 보는 사람이 의미를 부여한 것일 테다. 선 속에 메시지가 있다고 할 만한 사례는 컴퓨터가 만들어낸 코드 정도밖에 없다. 그래서 그건 그냥 그 자체로 한줄기의 선일 뿐이다. 

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탄성이 나올 수도, 웃음이 나올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단순해서, 우리에겐 사소한 차이에도 같은 것이 다르게 보이는 때가 있다. 말하자면 어떤 발레도 슬랩스틱이 될 수 있고 어떤 슬랩스틱도 발레가 될 수 있다. 그러니 키튼의 영화도 어떤 사람에게는 충분히 발레로 보일 수 있다. 분명 그의 몸동작은 발레라고 불리기에 충분하다. 슬랩스틱이 저급하고 발레가 고급스러운 게 아니라, 관객에게 따스한 느낌을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예술의 가치는 동등하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생각해보아야 한다. 만약 두 예술이 동등하게 느껴진다면 단순히 개인의 견해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발레와 키튼의 영화가 공유하는 확실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무표정이다. 발레는 감정 연기가 아니라 리듬을 연기하는 것이기에 얼굴 근육을 괜스레 낭비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키튼이 하는 것은 연기지만, 감정 연기가 아니라 리듬을 연기하는 것이기에 얼굴 근육을 낭비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의 리듬이다. 언제 끊긴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게, 반드시 마지막까지 연주되어야 하는 판소리처럼 사랑의 리듬은 멈추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키튼의 사랑에 관한 행보는 예견되었고 우리는 그걸 나지막이 알고 있다. 말하자면 이 리듬이란 것은 운명이라는 말과 바꾸어 쓸 수도 있다. 즉 사랑의 운명, 사랑의 리듬은 키튼 영화를 견인하는 힘이다. 

꿈꾸는 무표정

키튼은 항상 무표정 상태로 과장된 동작을 선보이곤 하는데, 이른바 슬랩스틱이라 부르는 이 개그는 무성 영화 시대에 주로 흥행했던 것 중 하나다. 키튼은 무성 영화 시대의 사람이었고 무표정 슬랩스틱 연기는 그의 전매특허였다. 위기 상황에서 얼굴 하나 변하지 않는다는 점은 그를 더욱 어리바리하게 보이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분명 그의 영화에서 그는 단 한 번이라도 똑똑하게 보였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바보 같은 슬랩스틱 연기를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힘이 넘치는 손동작과 생기 없는 표정이 맞물려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바보도 천재도 아닌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일반인이라는 점이 영화를 특별하게 한다. 말하자면 키튼의 영화에서 사랑이란 불모지에서 일구어낸 것에 가깝다. 돈이 있거나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용기뿐인 그는, 다른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사랑을 움켜쥐게 된다. 어쩌면 신데렐라의 이야기가 이것과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키튼은 영화에서 항상 별 볼 일 없고 보잘것없는 일반인으로 등장하고는 한다. <셜록 주니어>에서 그는 탐정을 꿈꾸는 어느 영사기 담당직원으로 나오며, <카메라맨>에서 그는 특종을 잡고 싶은 어느 카메라 맨에 불과하다. <제너럴>에서는 지나가던 시민이었는데 악당들을 물리치고 장군이 된다. 

그러니까, 무표정이라는 그의 특성은 일반인이라는 역할과도 비슷한 것 같다. 무표정은 어떤 표정으로도 변화할 수 있고, 일반인은 어떤 직업도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키튼은 감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무(無)의 위치에 있다. 무표정과 일반인은 그 자체로 평범해서 아무것도 대변하지 못하지만, 그 무엇도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키튼의 영화는 항상 꿈을 품고 있다. 그래서 키튼의 영화에는 항상 여러 감정이 있다. 키튼의 영화는 마치 도화지처럼, 그 위에 무엇이든 그릴 수 있고 무슨 마음이든 품을 수 있다는 점이 몹시 매력적이다. 
 
 영화 <카메라 맨>의 한 장면

영화 <카메라 맨>의 한 장면 ⓒ 버스터 키튼

  
카메라를 멈추어선 안 돼!

키튼의 영화 <세 가지 시대>에서 그는 세 가지 인물이 된다. 고대, 중세, 현대의 세 가지 타임라인에서 그는 각기 다른 직업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각 시대의 그는, 어떤 그녀를 짝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키튼은 평행세계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각기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어느 인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어느 시대이든 간에 사랑을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점을 말하려 했다. 

그런데 이 인물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모습은 마치 메뚜기처럼 촬영되었다. 카메라는 키튼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을 수평으로 찍는다. 무표정, 일반인이라는 특성처럼 구도조차 평범하다. 정확하게는 평범하다는 말보다 평평하다는 말이 어울린다. 아마도 이것은 감독, 배우, 각본의 세 가지 역할을 홀로 해낸 그만이 할 수 있는 재주일 것이다. 감독은 수평 구도를 잡는다. 배우는 무표정을 연기한다. 각본은 그를 일반인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이 폴짝폴짝 메뚜기 같은 키튼에게서 우리는 리듬감을 느낀다. 마치 마리오가 위로 점프하듯, 그는 규칙성을 띤 채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구도도 수평이고, 그래서 리듬감이 만들어진다. 현대체조에서 휘날리는 리본이 물결 모양이듯이, 심장 박동이 가느다란 선으로 곡선을 이루듯이, 그가 하는 연기의 리듬 또한 그렇게 보이는 면이 있다. 
 
 영화 <제너럴>의 한 장면

영화 <제너럴>의 한 장면 ⓒ 버스터 키튼

  
아마 그래서 키튼은 영화 내내 뛰어다닐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영화 초반에, 사랑을 알기 전의 키튼은 어딘가 모르게 무기력하고 우울한 표정이다. 그런데 그런 키튼에게 사랑하는 이가 생기는 순간, 끊기지 않을 사랑의 리듬이 영화 끝까지 달려가게 된다. 한번 뛰기 시작한 심장이 멈추어져서는 안 되듯이, 판소리의 구슬픈 리듬이 완창 되어야 하듯이 말이다. 키튼의 영화에 기차와 자동차 같은 운송수단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를테면 <제너럴>에서 쉴 새 없이 달리는 기차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가기 위한 수단이다. 중간에 철로가 끊어지기도 하고 기차가 이탈하기도 하지만, 끝내 그는 여인을 구해 귀향한 후 장군의 직위를 받는다. 말하자면 키튼의 영화는 쉴 새 없이 달리는 영화이다. 발로 뛰든 무엇을 얻어 타든 간에 말이다. 
 
꿈꾸는 영화

키튼은 늘 달린다. 그것도 그냥 달리는 게 아니라 무표정에 과장된 몸짓으로 사랑을 향해 달린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키튼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아마 키튼의 영화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축에 속하는 <셜록 주니어>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것 같다. <세 가지 시대>가 그 자체로 만약을 가정한 시대적 소산이었다면, <셜록 주니어>는 키튼 스스로가 자신의 직업에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셜록 주니어>는 영화관에서 영사기를 돌리는 일을 하는 키튼이 꿈꾸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어느 순간 꾸벅꾸벅 졸던 키튼의 꿈으로 시점이 전환되는데, 키튼이 영화 스크린에 들어가 범인을 추리하게 된다. 스크린 안에 있던 키튼이 창문을 넘듯 밖으로 나오기도 하고, 밖에 나와서 위기를 모면한 후 다시금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말하자면 키튼은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키튼은 영화 속에 영화를 설정한 후, 그 속에 배우인 자신을 들어가게 함으로써 배우인 자신과 감독인 자신을 분리시켰다. 
   
 영화 <셜록 주니어>의 한 장면

영화 <셜록 주니어>의 한 장면 ⓒ 버스터 키튼

  
<세 가지 시대>가 키튼 자신이 세 가지 역할을 함을 말하는 것이었다면, <셜록 주니어>는 키튼이 영화로 어떻게 말할 것인지를 논한다. 감독 키튼은 영화 속의 배우 키튼을 카메라로 잡고, 배우 키튼은 다시금 영화 속의 영화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이때, 영화 속 영화의 키튼은 무엇일까? 감독 키튼이 배우 키튼을 촬영하는 것인데, 배우 키튼이 영화에 직접 들어가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것은 그가 감독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배우 키튼 또한 감독 키튼이 된다. 하지만 이 영화 속의 키튼이 '감독 키튼'과 다른 점이 명확하게 있다. 그것은 바로 스크린에 직접 뛰어든다는 점이다. 

작가가 메시지를 전하려 펜을 든다면 감독은 펜 대신 카메라를 든다. 말하자면 영화감독의 만년필은 무거운 카메라이다. 다르게 말해서, 도구가 없다면 그는 메시지를 전할 수가 없다. 스크린을 두고 관객과 감독의 위치는 분리되어 있고, 그래서 말하는 것처럼 평범하게는 전할 수가 없다. 끝내 감독을 비롯한 예술인들이 택하는 방법은 무언가를 직접 창조해내는 것이다. 눈으로 가시화된 자신의 신념, 메시지를 통해 관객은 작가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키튼은 <셜록 주니어>에서 손수 스크린 안에 뛰어들었다. 배우와 감독을 겸하며 스스로를 영화 도구로 여겼던 그는, 카메라가 되어서 전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영화 속의 영화, 그건 바로 키튼 안의 키튼과도 같다. 감독 키튼과 배우 키튼이 줄곧 반복되는 이 모습은 마치,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로 마주 본 거울을 떠올리게 한다. 말하자면 스크린 안과 밖은 한 쪽으로만 전달되는 게 아니라 서로 소통하게 된다. 

아마 키튼은 이 영화를 통해 내면의 자신과 직접 소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관객 스스로가 감독이 되어 또 다른 영화를 만들어 내기를 원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키튼의 사랑은 중첩된다. 리듬은 이제 원이 되어 하나로 이어진다. 사랑은 받은 사람만이 줄 수 있다는 말처럼, 영화를 사랑하는 키튼은 영화로부터 사랑받기도 하고, 사랑을 전하는 키튼은 관객 또한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셜록 주니어>는 사랑에 관한 키튼의 이야기이자 키튼 본인의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단지 꿈을 꾸기만 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완성은 우리가 키튼의 의도를 알아채는 순간이다. 

마지막 키튼으로 모든 키튼을 깨닫다

유성영화 시대에 키튼이 몰락한 것은 다른 무성 배우들처럼 목소리 때문이었다. 분명 몸짓의 리듬에서 목소리의 리듬으로 주도권이 넘어갔다는 점에서 그의 몰락은 예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키튼은 손짓으로 만든 리듬이 목소리의 리듬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몇 사람 중 하나이다. 유성 영화 시대의 유산이 목소리에 형태가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면, 무성 영화 시대의 유산은 정적이 소란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몸짓만으로 그가 보내는 구애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키튼은 무성 영화 연기의 달인이라고 부를만 하다. 

키튼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진 않았지만 이 공허함을 어떻게 채워넣을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표정으로 일반인을 연기했고, 아무런 말도 없이 여러 감정을 전달했다. 물론 기술 상의 문제로 말이 없던 것이었지만, 키튼을 기리는 추후의 다큐멘터리에 나온 그의 모습을 보면 그건 또 아닌 듯하다. 키튼은 그저 한없이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고, 그런 성향은 영화에 줄곧 반영되었다. 키튼을 기리는 사람들이 나이 든 키튼을 두고 만들어 낸 <레일로더>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영화 <레일 로더>의 한 장면

영화 <레일 로더>의 한 장면 ⓒ 버스터 키튼

  
1965년의 키튼은 70살의 나이로 마지막 무성영화를 찍었다. <레일로더>는 어느 노신사가 신문에서 캐나다 여행 광고를 보고는 작은 열차 하나를 훔쳐 그곳에 향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시대가 시대인 만큼 컬러로 촬영되었다. 기술이 발전한 만큼 과거보다 훨씬 유연한 카메라 구도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키튼이라는 사람만큼은 이 영화에 줄곧 남았다. 키튼의 20년대와 이 영화는 완벽하게 다르지만 그럼에도 키튼만큼은 같다. 여전히 키튼은 말이 없고, 교통수단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도 같다. 하지만 과거와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키튼은 이제 누군가를 사랑하기보단 떠나가는 걸 즐기는 듯하다. 사랑하는 이를 쫓던 열차가 이제는 홀연히 떠날 목적으로 달려간다. 노년의 키튼은 나이가 든 만큼 빛을 잃어버린 듯 보였다. 유성 영화의 시대, 27년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게 그 우울함에 대한 이유가 될까. 영화 속의 키튼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모습이었다면 영화 밖의 키튼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키튼의 영화는 시장으로부터 외면받았고, 가난에 시달리게 된 키튼은 이후의 삶을 몹시 우울하게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키튼의 영화에서 줄곧 보였던 사랑의 대상과 리듬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거진 40년 정도를 떠나 <레일로더>라는 유작을 남겼다. 후대 사람들이 잊혀졌던 그를 재발굴해 낸 덕분이다. 

이 영화에 키튼이 사랑하는 여인이 나오지는 않지만,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하는 키튼의 모습이 있다. 여행을 사랑하게 된 키튼은 젊은 시절보다는 여유 있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울해 보인다. 과연 이것이 젊음의 노동과 노년의 풍족함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키튼이 마지막까지 영화에 대한 짝사랑을 잊지 못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일 년 후 키튼은 세상을 떠났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키튼의 마지막 모습이자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애환을 담고 있기도 하다. 혹은, 재평가된 그가 마침내 소원성취를 했기에 한풀이 굿과 같은 느낌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키튼은 지금 우리 곁에 없다. 그는 정말로 무성이 되어 버렸다.  
 
버스터 키튼 무성영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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