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6 16:25최종 업데이트 18.10.16 16:25
 

1924년 박용만의 잠입 시 남산에 있었을 조선총독부 ⓒ 미상

 일제강점기 특히 병탄 초기에 '총독부 말뚝'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였다. 

일제가 예부터 조선을 넘보는 가장 큰 이유는 기름진 땅에 있었다. 일본의 메마른 토지에 비해 한국의 농지는 기름지고 특히 쌀의 질과 양은 일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 삼한 시대부터 왜구들이 연안에 출몰하여 쌀을 훔쳐가기를 능사로 하였으며, 조선 말기 정부의 강력한 방곡령으로 쌀의 대일 반출이 어렵게 되자 직접 침략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공출미 수탈 현장 일제는 식민지 착취기관인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의 식량과 자원을 빼앗아 갔다. ⓒ 눈빛<일제강점기>

 
일제는 한국 병탄과 더불어 가장 먼저 토지수탈작업에 착수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8월 30일 재령(制令) 제2호로 토지조사령을 발표하여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토지조사령 제4조는 '토지 소유자는 조선총독이 지정하는 기간 내에 그 토지의 사위경계에 지목자 번호, 씨명 등을 기입한 표목(標木)을 수립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즉 길이 4척 이하의 말뚝에 군, 면, 리, 평(坪), 자호(字號), 지번, 지목, 두락수, 결수(結數), 소유자, 관리자, 소작인의 주소와 성명을 기재한 다음 그 말뚝을 1척 이상 땅 속에 박도록 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오래 전부터 토지 거래나 소작 관계를 특별히 문서로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당사자가 구두로 약정하고 마을에서 이를 인정하면 되는 불문률이 있었다. 그런데 총독부의 이런 조처는 농민들에게는 생소한 뜻밖의 일이었고, 관보에나 실린 토지조사령의 내용을 아는 농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 관리들은 욕심나는 땅이거나 소유주가 서류상으로 불명한 토지와 임야ㆍ하천부지는 총독부 소유의 말뚝을 깎아서 박았다. 이렇게 하여 빼앗은 땅이 전국적으로 수천만 평이나 되었다. 농민들은 옛날의 관례만 믿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땅을 빼앗긴 경우가 수두룩하였다.

일제는 병탄 전인 1908년 우리나라 산업자본의 조장과 개발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른바 제국의회에서 국책회사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서울에 본점을 두고 1천만원의 자금으로 설립한 동척은 우선적으로 조선의 토지를 사들이는 일에 착수했다. 

그래서 1913년까지 4만 7,148정보의 토지를 매수하고 1914년에는 전라도ㆍ경상도ㆍ황해도의 비옥한 전답을 강제로 매수하였다. 이리하여 1924년에는 6만 591정보의 토지가 동척 소유로 바뀌고, 정부 소유지 1만 7,714정보까지 출자받아 동척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강점한 토지는 소작농민에게 5할이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한편, 영세 농민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추수 때 2할 이상의 높은 이자를 현물로 받았다. 1924년의 통계에 따르면 소작료로 현미 2만 184석(전), 벼 45만 7.089석, 콩 6,409석, 잡곡 9,707석, 목화 7만 295근(斤), 현금 11만 6,260원 등을 징수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일제가 병탄과 더불어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대대적인 토지조사 사업을 벌인 것은 식민지적 토지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일제가 이토록 토지조사사업에 열을 올린 것은 ①토지매매를 더 자유롭게 하여 이를 헐값에 사들이고 ② 지세수입을 늘려 식민통치를 위한 조세수입을 증대시키고 ③ 국유지를 창출하여 조선총독부 소유지로 만들기 위한 것이며 ④광범위한 미개간지를 무상으로 점유하려고 하였으며 ⑤일본 상업고리대자본의 토지점유를 합법화하려는 것 ⑥강점 후 급증하는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토지불하를 의도하고 ⑦본격적인 미곡의 일본 반출을 위한 토지제도를 정비하고자 한 것이다. ⑧일본 공업화에 따르는 노동력 부족 문제를 우리나라 소작농을 임금 노동자화함으로써 충당하도록 하는 제도적, 구조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총독부 내에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고 '무장조사단'을 편성하였다. 

토지조사국 출장원, 헌병경찰, 면장, 이동장, 지주 총대, 주요 지주 등으로 구성된 무장조사단은 평균 12명으로 편성되어 전국을 분담하여 순회하면서 토지조사를 강행하도록 하였다. 

무장조사단은 조선 농민들의 반발에 대처하기 위해 권총과 대검으로 무장하고 망원경과 측량기를 들고 다니면서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의 구실 아래 농민의 경작지를 강압적으로 국유지에 편입하고 친일파나 일본인의 소유로 갈취하자 농민들 사이에 광범위한 토지조사 분쟁이 생겼다. 

조사 총필수 1,910만 7,520필 중에서 3만 3,937건, 9만 9,445필에 달하는 분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이 일본 관헌에 붙들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더러는 목숨을 잃었으며, 조상 대대로 일궈온 전답을 빼앗겼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임야까지 포함해서 1,120만 6,873정보를 국유지화 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조선 국토 총면적의 50.4%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국유지는 모두 총독부의 재산으로 귀속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 농민의 대부분이 토지의 소유권은 물론 소작권을 상실한 채 봉건적인 악질지주와 친일파, 일본인 지주의 소작농이 되거나 유이민화하고 도시의 임금노동자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소작농들은 고율의 소작료와 각종 세금으로 이중 삼중의 수탈을 당해야 했다. 

박재혁은 토지가 없어서 빼앗기지는 않았으나 이웃들의 아픔을 지켜보면서 일제타도의 목표를 세웠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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