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의 낭군님>의 원득(도경수 분)과 홍심(남지현 분).

<백일의 낭군님>의 원득(도경수 분)과 홍심(남지현 분). ⓒ tvN

   
tvN 사극 <백일의 낭군님>은 평민층과 특권층의 삶을 함께 보여준다. 저격을 당해 정신을 잃고 평민한테 구조된 뒤, 홍심(남지현 분)과 결혼해 백성들 틈에서 살게 된 왕세자 이율(도경수 분)의 스토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율은 평민들 속에서 원득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다.
 
이런 드라마이다 보니, 양반뿐 아니라 평민의 삶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이거 실화냐?" 같은 최신 유행어가 자주 등장하고 홍심과 원득이가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현대적인 장면이 나오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시장 물가를 근사치에 가깝게 보여주는 등의 방법으로 평민들의 생활상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드라마다.
 
그런 가운데, 실제 역사와 배치되는 내용들도 나오고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조선시대의 법적 신분으로 노비·양인 외에 양반까지 거론하는 것이다. 지난주 월요일인 8일에 방송된 제9회에서도 그런 오류가 두드러졌다.
 
양반가 여성이 심부름센터를 찾아와 "남자를 떼어내 주세요"라고 부탁하자, 원득이는 선비 차림을 하고 '애인 대행'을 하러 나갔다. 이 여성과 함께 문제의 남자를 만나러 나가보니, 남자는 양반가 자제에다가 말까지 타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근데 하필 그때 일이 생겨, 원득이는 남자의 말을 빼앗아 타고 급한 용무를 보려고 현장을 떠났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말 도둑이 되어 버렸다.
 
'말 도둑'을 수소문하던 끝에 원득 부부의 초가집을 찾아오게 된 그 남자는 의외의 상황에 직면했다. 처음 만났을 때 차림새로 보나 승마 실력으로 보나, 누가 봐도 원득은 양반가 자제였다. 그런데 막상 원득의 집을 방문해 보니, 홍심의 차림새도 그렇고 주택 구조도 그렇고 누가 봐도 일반 평민이었다. 양반가 자제는 이렇게 고함쳤다.
  
 tvN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의 한 장면.

tvN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의 한 장면. ⓒ tvN

 
"양반인 줄 알고 몇 날 며칠을 수소문한 줄 아느냐? 헌데, 양인? 하! 양인 놈이 양반 흉내에···."
 
대사에서 드러나듯이 이 드라마는 양인과 양반을 신분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노비·양인 외에 양반이라는 별도의 신분이 있었던 것처럼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확한 사실은, 법적 신분은 노비와 양인 둘 뿐이었다는 점이다. 법적으로 타인에게 예속돼 있으면 노비, 그렇지 않고 자유인 신분이면 양인(良人)이었다. 신분상으로는 양반이란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양인은 누구나 과거시험에 응시해 무반과 문반의 양반 세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법전인 <경국대전>의 예전(禮典) 편에서는 "범죄를 저질러 영구히 임용되지 못하게 된 자, 부정부패를 범한 관리의 아들, 재혼하거나 행실이 부도덕한 여인의 아들과 손자, 서얼 자손은 문과와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여기서, 서얼 자손 부분은 나중에 점차적으로 완화되었다.
 
이 규정에 적힌 결격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한,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백일의 낭군님>에 묘사된 것처럼 '나는 양반이고, 너는 양인이다'라는 식의 대화가 나올 수 없었다. 양반 역시 양인이었기 때문이다. 
 
 1438년에 과거시험 급제자 박중신에게 발부된 세종대왕의 교지. 강릉시립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1438년에 과거시험 급제자 박중신에게 발부된 세종대왕의 교지. 강릉시립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물론 과거시험을 통과해 양반 대열에 들어서면, 일반 양인이 누릴 수 없는 특권을 향유했다. 2004년에 <역사학보>에 게재된 최이돈 한남대 교수의 논문 '조선 전기 현관(顯官)과 사족(士族)'에서 "입사(入仕, 관직 진출), 시험, 재판 등의 중요한 여러 영역에 걸쳐서 특권을 갖고 있었다"며 "이러한 특권은 본인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가족과 자손에게 미치는 상속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 것처럼, 관료뿐 아니라 그 가족도 양반층을 형성하고 이를 토대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양반도 엄연히 양인이었다. 일반 백성들도,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경제력과 시간적 여유를 기반으로 과거시험에 급제해 관료로서 기반을 잡으면 위와 같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법적 신분을 양인과 양반으로 구분하는 것은 역사적 실제와 배치된다.
 
양반의 반대 개념을 굳이 찾는다면, 쌍놈이나 평민이란 용어를 들 수 있다. 쌍놈의 '쌍'은 '보통'을 의미하는 상(常)이 경음화된 글자다. 쌍놈이나 평민이나 의미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 특권층인 양반 입장에서는, 일반 양인이나 노비는 모두 쌍놈이나 평민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양반과 마찬가지로, 쌍놈이나 평민도 법적인 신분 개념은 아니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양반들이 관청에서 공권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높게 보고 이들을 일반 양인과 구분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관청에서 공권력을 행사하는 직원 중에는 공노비가 훨씬 더 많았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전국 관청의 모든 직원들에게 봉급을 줄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국가는 가급적이면 관청에 속한 공노비한테 행정 실무를 맡기려 했다. 공노비는 무보수로 근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급 아전은 몰라도, 하급 아전 혹은 하급 서리의 상당수가 공노비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tvN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의 한 장면.

tvN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의 한 장면. ⓒ tvN

 
정조 임금 때의 성균관 유생인 윤기(尹愭)가 성균관 생활상을 시로 정리한 <반중잡영>에 따르면 이곳에서 일하는 하급 직원들도 공노비들이었다. 성균관 노비를 어머니로 둔 사람들이 글을 배워 이곳의 행정실무를 맡았다. 다른 관청들도 마찬가지였다. 관청에서 민원사무를 처리하는 서리나 아전의 대부분은 그곳에 속한 공노비들이었다.
 
그런 공노비들은 일자리 보장은 받았지만 봉급 보장은 받지 못했다. 이들은 최저임금도 받지 못했다. 법적으로 국가의 소유물이었으므로 원칙상 봉급을 지급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비번 때 경제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민원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야 했다.
 
남명 조식이 음력으로 선조 1년 5월 26일자(양력 1568년 6월 21일자) <선조실록>에 수록된 상소문에서 "지금 시대처럼 서리들이 나라를 마음대로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노비 출신 서리들이 행정실무를 꽉 잡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뇌물을 수수하는 일까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선비 출신 관료보다 이들이 범하는 부정부패가 훨씬 많았기에 이런 비판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공노비도 관청에서 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행정 실무까지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관청을 찾아간 민원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민원인 본인이 고위 관료이건 일반 평민이건 간에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는 노비이고 누구는 양인이고 하는 식으로 따지는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관청의 서리(왼쪽).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고려궁지(고려궁 터)에서 찍은 사진.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강화유수부 청사로 쓰였다.

조선시대 관청의 서리(왼쪽).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고려궁지(고려궁 터)에서 찍은 사진.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강화유수부 청사로 쓰였다. ⓒ 김종성

  
'법 앞의 평등'이란 관념이 우리 시대를 지배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우리 사회를 그런 방향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옛날에는 '왕 앞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귀족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노비들한테는 꿈같은 일이었다. 평생 소작농을 벗어나기 힘든 일반 양인한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군주들이 '왕 앞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어느 정도나마 전개했기 때문에, <백일의 낭군님>에서처럼 너의 신분은 어떻고 나의 신분은 어떻고 하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대놓고 떠들기도 쉽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랐거나 법적 분쟁에 휘말린 경우에는 감정적인 말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남의 신분을 함부로 들먹이며 화를 자극할 수는 없었다.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은 관청과 연관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가 낮을지라도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이면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이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는 점과, 예전부터 관청 하급 실무자는 주로 관노비였다는 점을 종합하면, 행정직원이 신분상으로는 관노비일지라도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었으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양인이면 법적으로는 누구나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고, 노비도 공노비인 경우에는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더라도 행정 실무자가 될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특권층 양반일지라도 일반 양인이나 노비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런 양반들도 꽤 많았지만, 그런 이들의 결과가 결코 좋지는 않았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불필요하게 권력을 드러내면 득보다는 실이 되기 쉬운 법이다.
백일의 낭군 양인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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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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