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스스로를 위한 의미있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계간지 <딴짓>의 발행인인 프로딴짓러가 소소하고 쓸데없는 딴짓의 세계를 보여드립니다. "쫄지 말고 딴짓해!" 밥벌이에 지친 당신을 응원합니다.[편집자말]
"축구선수만 축구를 하라는 법은 없잖아."

밥벌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위한 의미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며 '딴짓 예찬'을 하고 다닌다. 축구선수만 축구를 하라는 법은 없다는 말은 '딴짓'이 꼭 잘하는 어떤 일이 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어떤 누군가가 '되어야 할' 의무는 없다. 빵 굽기가 좋다면 밀가루 반죽을 조몰락거려 볼 수도 있고, 소설 쓰기를 좋아한다면 등단하지 않아도 책을 만들어볼 수도 있다.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면 족하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딴짓 예찬을 한 지 3년. 1000일이면 연인도 결혼을 고민하고, 사업이라면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이제는 딴짓을 시작하는 것보다 어떻게 딴짓을 '지속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앞선다. 수익이 없어도 딴짓을 지속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인정이 없어도 딴짓을 계속할 수 있을까?   

5년간 소설가 지망생으로 사는 것  
 
글은 내가 쓸게. 등단은 누가 할래? <순풍산부인과> 짤
 글은 내가 쓸게. 등단은 누가 할래? <순풍산부인과> 짤
ⓒ SBS

관련사진보기

 
내게는 2년 전 등단해 작품 활동을 계속 하는 소설가 친구가 있다. 친구는 대학을 졸업한 후 단 한 곳의 기업에도 입사지원서를 넣지 않고 소설가 지망생(이런 단어는 없다고 생각하지만)으로만 5년을 살았다.

친구가 소설 쓰기에만 매진한 지 2년이 되었을 때 나는 친구 대신 손톱을 뜯었다. 3년이 되자 친구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격지심을 느끼지는 않을까 오지랖을 부렸다. 5년이 가까워져 왔을 때는 아직 소설을 쓰느냐는 질문을 하기조차 망설여졌다.

친구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도 '돈이 벌리지 않으니 소설을 계속 쓰기 힘들겠지'라는 나의 지나친 걱정이 부러 친구를 배려하게 했다. 그런 친구가 한 번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만두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 같아. 소설을 쓴다는 건 도를 닦는 것과 비슷해."

글쓰기를 한다는 건 돈이 벌리는 일도 아니오, 등단을 하기 전까지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힘들게 쓴 글을 보여줄 플랫폼도 많지 않다. 그런데도 글을 계속 쓰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친구의 말대로 그건 그만두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의 '수련'에 가까운 걸까?

'좋아한다'라는 것이 딴짓을 하는 가장 큰, 심지어 유일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수익과 사회적 인정 없이 딴짓을 지속한다는 건 얼마나 많은 자존감을 필요로 할까? 물리학 박사를 따고 지금은 국내의 대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다른 친구는 삶에서 힘들었던 순간으로 성과 없이 연구를 계속하던 때를 꼽았다. 

"성과를 확인하면서 나아가는 것은 의외로 쉬워. 공부의 어려움 같은 거야 오히려 즐길 만한 거지. 성과가 없으면서 지속하는 것이 어렵지."

자신의 가치를 밖에서 판단하게 내버려두면 삶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타인의 무심한 평가에 흔들리지 않을 든든한 자존감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피드백과 평판에 귀를 막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다.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에서 원동력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 원료에만 의지하기엔 삶도, 딴짓할 시간도 길다.   

한 번의 커다란 성공보다 여러 번의 작은 인정   
 
<이불밖은 위험해> 짤
 <이불밖은 위험해> 짤
ⓒ 나무위키

관련사진보기

 
딴짓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의외로 소소한 '인정'에 있다. 커다란 하나의 성과를 이루는 것보다 작지만 여러 번의 성공 경험을 쌓는 것이 전체 행복의 총량을 늘리는 데 좋다고 한다.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한 번의 경험에서 오는 만족감보다 작은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글이 조금씩 인정받아 종내는 소정의 고료를 받게 되는 그 긴 과정의 즐거움이 더 클 수 있다. 아마추어 댄서로 시작해 조금씩 큰 무대로 나아가는 것이 긴 암흑기를 지나 하루아침에 별이 되는 것보다 만족스러울 수 있다.

나의 존재가치를 소소하게 자주 확인하는 것은 자존감을 지키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된다. 조직에서 커다란 일로 인정받는 것만큼이나 오롯이 나의 것임에 분명한 '딴짓'에서 작은 일로 진척을 이루는 것도 큰 기쁨이다.

솔직히 말해 회사에서 경쟁 프레젠테이션으로 큰 일감을 따내었을 때보다 내가 직접 만드는 '딴짓'의 온라인 서점 순위가 올라갈 때 내 마음은 춤을 춘다. 하여 주변의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 소소한 인정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작지만 잦은 즐거움은 딴짓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되고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그 무언가의 성공 확률은 높아진다.

처음부터 거대한 목표를 설정하면 그곳에 닿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는 점은 달리기 할 때도 느낀다. 시작부터 42.195Km를 달리려는 러너는 없다. 10Km를 달려도 박수를 쳐주는 곳에서 시작하자. 박수를 받으면 다시 10km를 달릴 수 있을 테니까.  

인심도, 여유도, 곳간에서 생긴다. '딴짓'으로 돈 벌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수익이 생긴다면 그것을 지속할 힘은 훨씬 커진다. 반대로 딴짓을 할 때마다 지갑이 얇아진다면 아무리 좋아하는 딴짓이라도 계속하긴 힘들어질 것이다. 딴짓을 오래 하려면 딴짓으로 인한 아주 소소한 수익을 얻으려 노력해보는 것도 좋다. 적어도 언젠가는 이것으로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미약한 희망이나마 유지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나는 딴짓으로 <딴짓>이라는 잡지를 만들고 성산동에 '낮섬'이라는 책 읽는 바(bar)도 운영한다. 프리랜서 마케터로 일하거나 출판 워크숍을 진행하는 일로도 수익을 얻는다. 허나 좋아서 하는 이 모든 일이 전부 수입이 되지는 않는다. 출판사 <딴짓>은 3년 차가 된 지금에야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의 월급을 가져간다. '낮섬' 역시 바를 여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는 힘들다.

모두 좋아서 하는 일이오, 나의 가치관에 맞아서 하는 일이지만 나의 애정이 생계비로 돌아오지 않을 때는 심통도 난다. 애정표현을 하지 않는 연인에게 하는 구애, 보답받지 않는 사랑을 하는 기분이다. 하여 내가 선택한 내 나름의 노하우는 이렇다. 이 모든 딴짓에서 들어오는 수입을 정리해 월말에 내게 '급여명세서'를 지급한다.

하나씩 보면 적은 수입이지만 여러 개가 모이면 생계비가 된다. 급여명세서를 보면 소소한 딴짓이 모여 흰 쌀밥이 되고 한 잔의 커피가 되는 것이 눈으로 보인다. 내가 하는 딴짓이 철모르는 여자의 사치스러운 취미가 아니라 목구멍에 흰 밥을 밀어 넣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잠들기 위한 노동이라는 것이 보인다.  

딴짓으로 소소한 수익을 올리기 위해 노력해보자. 플리마켓에서 에코백이나 드라이플라워를 파는 것부터 시작해도 괜찮다. 물론 그날의 교통비와 밥값, 찾아오는 지인들을 위한 커피값 따위를 제하면 남는 돈은 많이 없겠지만 그럴 때는 '남는 돈은 없었어'라기보다 지출한 금액과 벌어들인 수익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생각하는 편이 낫다.

그런 위안이 딴짓을 지속하게 한다면 언젠가 딴짓이 쏠쏠한 이차 수입원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동네 조기축구에서 두 골을 연달아 넣었다고 해서, 그날의 MVP가 되었다고 해서, 삶이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같이 공을 차는 주민들의 칭찬과 술 한 잔 더 얻어먹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질 뿐.

그렇지만 그것으로도 그날 치의 행복은 충분하지 않은가. 그만하면 되지 않았을까.

태그:#딴짓, #프로딴짓러, #취미, #직장, #회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