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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라는 간판을 달고 담배와 계란을 판다는 글귀와 공중전화까지 갖춘 이곳, 그러나 이곳은 가게가 아니었다.
 슈퍼라는 간판을 달고 담배와 계란을 판다는 글귀와 공중전화까지 갖춘 이곳, 그러나 이곳은 가게가 아니었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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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역 부근의 한 주민센터 앞. 소문을 들으니 이곳에 아주 특별한 곳이 생겼단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나를 반길 만한 명소는 없어 보인다.

어, 그런데 저건 뭐지? 눈에 들어온 허름한 슈퍼 하나. 동네 입구에 자리 잡은 허름한 이 가게는 드라마세트장에서나 볼법한 초라한 구멍가게 그 자체다. 자그마치 80년도 분위기를 간직한 이곳은, 구멍가게도 아닌 당당히 '슈퍼' 간판까지 달고 있다.

파란 그늘막, 백열전구로 된 외곽조명, 낡은 문틀, 촌스러운 쇼윈도, 거기에 간장이 담겨있을 듯한 장독대까지… 평상만 놓여있다면 금방이라도 막걸리 한 사발 얼큰히 낮술을 즐기던 욕쟁이 주인 할배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담배와 계란을 판다는 간판과 공중전화까지 갖춘 이곳, '커피집'이라는 작은 팻말이 없었다면 하마터면 무시하고 지나칠 뻔했다.

그랬다. 진짜가 나타났다. 간판에 커다랗게 쓰여있는 '밀림슈퍼'는 구멍가게 이름이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놀라셨죠? 여기 커피 가게 맞아요"
 
파란 그늘막, 백열전구로 된 외곽조명, 낡은 문틀, 촌스러운 쇼윈도, 장독대... 평상만 놓여있다면 금방이라도 주인 할배가 나올 것만 같다.
 파란 그늘막, 백열전구로 된 외곽조명, 낡은 문틀, 촌스러운 쇼윈도, 장독대... 평상만 놓여있다면 금방이라도 주인 할배가 나올 것만 같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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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부터 심상치 않다. 가게가 열린 것 같아 혹시나 하고 허름한 구멍가게 1층 문을 열고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헉,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상상도 못 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반신반의로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온갖 식료품이 '밀림'처럼 들어서야 할 자리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자개 진열장부터 나를 반긴다. 고개를 돌리니 모던하고 깔끔한 느낌의 커피머신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서 오세요. 놀라셨죠? 여기 커피 가게 맞아요. 주문 도와드릴까요?"

마음을 가다듬고 카운터로 다가서자 주인장 현인석(34)씨 부부가 환하게 반긴다. 이제서야 겨우 이곳이 슈퍼라는 이름의 작은 카페라는 사실이 실감된다. 요즘 패션을 시작으로 복고풍(레트로)과 빈티지가 전반적으로 유행한다지만 이런 곳이 생길 줄이야.
 
인수한 가게 이름 ‘밀림슈퍼’ 그대로 카페 이름을 지었는데, 이름에서 풍기는 레트로한 분위기를 그대로 살렸다.
 인수한 가게 이름 ‘밀림슈퍼’ 그대로 카페 이름을 지었는데, 이름에서 풍기는 레트로한 분위기를 그대로 살렸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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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중순에 문을 연 밀림슈퍼 주인 현인석(34) 씨 부부.
 지난 9월 중순에 문을 연 밀림슈퍼 주인 현인석(34) 씨 부부.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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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를 고민한 흔적도 크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고의적인 예스러움은 별로 없다. 간판, 색감, 아이템 하나하나 모두 고풍스러우면서도 레트로한 느낌으로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곳, 바로 이곳이 카페 밀림슈퍼였다.

부부는 결혼 전부터 6~7년 동안 자신들의 특별한 공간을 위해 전국을 물색했다. 그러다 지난해 가을 우연한 기회에 슈퍼가 있던 이곳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는 이 부부, 건물 매입 후 꼬박 1년동안 공을 들여 디자인했다. 그리고 이제 문을 연 지 딱 3주가 됐단다.

원래 가게 이름인 '밀림슈퍼' 그대로 카페 이름을 지었는데, 이름에서 풍기는 레트로한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려고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 특히 금속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던 현 사장이 창고형 카페 디자인과 조형물 제작에 참여했던 감각들은 가게 콘셉트에 큰 몫을 했다. 

"이제 카페는 커피나 차만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고 아이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카페들도 있지만, 우리 가게는 어릴 적 외할머니집에서 보던 자개장롱 앞에서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부부는 카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말 '원래 있었던 것'처럼 공간의 소품들에 자연스럽게 세월이 녹아들기를 바랐다. 그래서 요즘은 구하기 힘든 자개장을 구하려고 전국을 찾아 헤맸단다. 카페 하나 열려고 이토록 준비한 부부의 노력에 한번, 생각보다 넓은 2층의 시골다방 분위기에 두 번, 빈티지의 조화에 세 번이나 놀랐다.
 
2층은 몇 년 전까지 이 동네에서 오랜 시절 다방으로 운영됐다.
 2층은 몇 년 전까지 이 동네에서 오랜 시절 다방으로 운영됐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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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 있는 대형 자개장. 요즘은 귀한 자개장을 구하려고 전국을 돌아다녔단다.
 2층에 있는 대형 자개장. 요즘은 귀한 자개장을 구하려고 전국을 돌아다녔단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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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은 얼마 전까지 실제로 동네 슈퍼였고, 2층은 몇 년 전까지 오랜 시절을 이어온 다방이었다고 한다. 휴대전화 없던 그 시절, 넓은 공간 이쪽저쪽에 하나둘씩 죽치고 앉아 '사장님'이라 불리던 지역 유지들이 있었다. 대부분 아침 일찍부터 정장 차림으로 출근 도장 찍고 '김 사장님 카운터에 전화 왔습니다!'라고 부르면 테이블마다 모두 일어서던 그 시골다방 말이다.

그래서 2층은 그 시절 분위기를 담기 위해 고심했다. 그런 이유로 인테리어와 소품 대부분은 투박할 정도로 거칠다. 부서진 벽 마감과 멋을 내지 않은 은은한 조명은 오히려 실내 분위기를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탁 트인 공간은 수다를 떨기에는 최적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공부하거나 문서작업 등 집중력이 필요하다면 '빼박캔트'(빼도 박도 못한다는, 특정 상황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을 말함)다. 오히려 아이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뛰어놀기 더 쉬운 공간이다.
 
2층은 80년대 소품과 함께 오히려 아이들이 뛰어놀기좋은 공간이다.
 2층은 80년대 소품과 함께 오히려 아이들이 뛰어놀기좋은 공간이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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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을 즐기던 욕쟁이 할배의 밀림상회가 이제는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쉬어가는 사랑방이 되었다. 모두 젊은 부부의 노력과 예쁜 아이디어로 만들어낸 결과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단한 직업이 아닐지라도, 최선의 노력으로 추억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첫발을 내디딘 밀림슈퍼가 나름 명소가 됐으면 좋겠다. 커피의 맛은 섣불리 평가할 수 없지만 바쁜 와중에도 젊은 부부가 친절해서 좋다.

번뜩이니까 청춘이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지역유지들이 드나들던 옛날 다방을 개조한 탁 트인 공간은 수다를 떨기에는 최적이다.
 지역유지들이 드나들던 옛날 다방을 개조한 탁 트인 공간은 수다를 떨기에는 최적이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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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2021년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2019년 성교육 전문가와 함께 하는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2017년 그림책 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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