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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노량진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가톨릭노동청년회 - ⑥노량진 컵밥거리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탄압을 대폭 강화했다. 이어 중국 침략(1937)이 본격화되면서 탄압의 강도는 점차 거세졌다. 이렇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나섰던 사람들 중에 일제에 굴복하는 이도 늘어났다. 하지만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의 항쟁과 독립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지하운동의 형식을 취하면서 더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시기 노량진 일대는 기층 민중운동과 결합하려는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된다.

오성세, 노량진 한강반에 아지트를 설치하다

1925년에 결성돼 그동안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대표적인 단체의 하나였던 조선공산당이 1928년에 해체된 이후, 식민지 조선의 해방을 이끌 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활동은 여러 갈래로 진행됐다.
 
조선공산당재건설조직위원회 사건이 예심 종결 소식을 전하는 동아입보 이 사건으로 구속된 오성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이미 옥사한 상황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 중 5명이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 조선공산당재건설조직위원회 사건이 예심 종결 소식을 전하는 동아입보 이 사건으로 구속된 오성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이미 옥사한 상황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 중 5명이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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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아래 재건준비위)도 노량진에 아지트를 설치하고 활동했다. 재건준비위는 만주에서 조선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동만특위와 연계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자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특히 조직의 경기도 책임자로 만주에서 파견 나온 오성세(또는 오산세, 1907~1932)와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낸 정종명(1895~?)은 노량진 한강반에 설치한 비밀 아지트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다. 한강반은 일제가 조선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기초 조직인 반의 하나로 노량진리에 속해 있었다.

재건준비위는 1931년에 있었던 메이데이(노동절) 격문사건으로 조직원들이 대대적으로 검거되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이때 검거돼 검찰에 넘겨진 인원만 107명에 달해 당시 언론에서는 "1차 조선공산당 사건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오성세와 정종명도 이때 검거된다.

오성세는 함경남도 단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오주혁도 만주와 노령 지역으로 망명하여 무장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오성세는 1929년부터 만주 길림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다 1930년 국내로 파견돼 수원농림 출신의 한전종 등과 함께 재전준비위를 결성하고 조직부 책임을 담당했다.

1931년에는 아래로부터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재건준비위를 해소하고 노동조합전국평의회조직준비회 결성도 주도했다. 이어 쟁의부 책임을 맡아 메이데이를 맞아 서울시내 각 공장에 격문을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이끌다 체포됐는데, 1932년 11월 8일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스물여섯의 나이에 옥사했다.

정종명,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나서다

정종명은 전남 목포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다. 간호사 출신의 정종명은 1922년에 20여 명의 신여성과 함께 서울에서 '여자고학생상조회'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 정종명의 어머니도 1919년 3.1만세운동 때 거리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된 경험이 있었다.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정종명은 1925년에는 정칠성, 주세죽, 허정숙 등과 함께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했다. 이어 1927년에는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건설된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하여 김활란, 유각경, 황신덕, 최은희, 주세죽 등과 함께 집행위원을 맡았다. 

이후 중앙집행위원장과 의장을 맡으면서 사실상 근우회를 주도해 나갔다. 신간회 해소론이 제기됐을 때는 그에 발맞춰 근우회를 해소하고, 노동자와 농민에 보다 밀착한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때 재건준비위에 참여하여 모플(혁명자 후원회) 부녀부장을 맡게 되는데, 이때 노량진 한강반의 아지트를 출입하며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재건설조직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된 정종명(1933. 4. 28, 동아일보) 사진 맨 위가 정종명이다.
▲ 조선공산당재건설조직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된 정종명(1933. 4. 28, 동아일보) 사진 맨 위가 정종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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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명의 아들 박홍제도 정종명이 잡히기 1년 전인 1930년에 메이데이 격문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이미 김천소년감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하나 밖에 없는 어린 아들마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정종명은 1935년 7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다. 정종명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에 함경남도를 대표하여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위원에 선출되기도 한다. 1937년 출옥 후 어느 시점에 근거지를 함경남도로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분단과 함께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노량진 소년들, 비밀독서회 활동을 시작하다

1932년 설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벽두에 노량진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진다. 2월 23일과 25일 이틀에 걸쳐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노량진에 사는 어린 학생들이 대거 연행된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소년독서회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연행된 사람은 전 양정고보생 김명룡과 김만수, 김학수 등 총 9명이었다.

당시 용흥청년회와 함께 양대 청년단체의 하나였던 노량진청년회는 자매단체로 노량진소년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노량진소년회는 매년 어린이날 행사를 지역에서 주도하기도 했다.

연행된 9명의 학생이 참여했다는 노량진혜성소년독서회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노량진소년회 내에 비공개로 조직된 독서회 모임이었다. 이 조직은 오성세와 정종명이 참여한 재건조직위가 운영한 통일전선조직인 반제동맹과 연계돼 활동하고 있던 비밀독서회였다.
  
노량진소년독서회 사건을 전하는 동아일보(1932. 2. 25) 동아일보가 이 사건을 신속하게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은 노량진청년회와 동아일보시흥지국의 긴밀한 관계와 관련이 있다.
▲ 노량진소년독서회 사건을 전하는 동아일보(1932. 2. 25) 동아일보가 이 사건을 신속하게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은 노량진청년회와 동아일보시흥지국의 긴밀한 관계와 관련이 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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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독서회 사건의 관련자였던 김명룡, 김만수 김학수는 체포되기 6개월 전인 1931년 8월에는 <동아일보>가 주최한 브나로드 운동에도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이들은 당시에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시흥군 동면 상도리(현 상도동)와 봉천리(지금은 관악구의 청룡동 등 여러 동으로 나뉘어 있다)에서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자신의 기본 활동 기반인 노량진 일대의 상가를 직접 돌며 후원금도 모으고, 브나로드 운동을 주최한 동아일보시흥지국의 재정 후원도 받아가며 강습소를 운영했다.

당시 노량진에 살던 젊은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동료학생들을 조직하고, 노량진에서는 노량진소년회 활동에 참여하는 동시에 비공개 소년독서회도 조직하고, 나아가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브나로드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하는 등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헌신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불로 양조장 노량진 지점' 서기 이양재의 정체

1936년 1월 9일, '늙지 않는 술을 담근다'는 '불로 양조장'에서 노량진 지점 서기로 일하던 이양재(당시 25세)는 영등포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강제 연행된다. 그가 연행된 것은 노량진 주택가에서 분실한 조직의 비밀문서가 순찰 중이던 경찰의 손에 들어가면서 일경이 그 일대를 쥐 잡듯이 뒤진 결과였다.

이양재를 조사한 영등포경찰서는 곧 경성과 인천, 경기도 광주로 수사대를 급파하면서 이양재의 동료 14명도 연행한다. 당시 일경은 이를 '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으로 이름 붙여 발표했다.

광주공산당협의회는 경기도 광주에서 1930년부터 남한산노동공제회 활동을 하던 석혜환, 정영배(정영린) 등이 일제의 탄압이 점점 거세지자 결국 지하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1933년경에 만든 비밀조직이었다.

주도자 석혜환은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광주지회장으로도 활동한 저명한 사회주의자였다. 광주공산당협의회는 용산과 영등포, 인천 등지의 노동현장으로 조직원을 파견하여 노동운동을 벌이는 것은 물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삐라'(선전물)를 살포하는 등 정열적으로 일을 벌였다.

일경의 발표에 의하면 '불온서적' 1백 권을 공동으로 구매하여 함께 읽으면서 학습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량진에서 이양재가 영등포경찰서에 연행되면서 조직원이 대거 체포되고 말았다.
  
광주공산당협의회사건 관련 동아일보 기사(1936.3.6) <불로양조장 노량진 지점>의 이양재가 잡히면서 시작된 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은 군단위의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광주공산당협의회사건 관련 동아일보 기사(1936.3.6) <불로양조장 노량진 지점>의 이양재가 잡히면서 시작된 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은 군단위의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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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산당협의회가 얼마나 치열한 조직이었는지는 사건 직전 먼저 구속된 조직원 구승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경성 시내에 있던 '용일양조소 서부지점'에서 배달부로 근무하며 조선총독 암살 계획을 추진하다 '조선총독 암살미수 사건'으로 조안득('용일양조소 동부지점' 근무)을 비롯한 7명과 함께 먼저 구속됐다. 구승회는 폭탄을 만들어 일제 식민통치의 우두머리인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를 암살하고자 무려 네 차례나 기회를 엿보았으나, 아쉽게 실패하고 말았다.

광주공산당협의회의 활동은 군 단위의 지역에서 독자적인 비밀결사를 조직해 경성과 경기도 일대에 조직원을 파견하면서 일제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례로, 당시 일제에 맞선 대중적 저항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관술, 노량진 전차 종점에도 나타나다

경성콤그룹은 과거 경성트로이카(이재유그룹) 출신의 이관술 김삼룡 등이 주축이 되어 1939년에 결성한 후 1940년 3월 감옥에서 나온 박헌영을 영입하면서 조직의 틀을 갖춰 조직의 이름도 정하고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발간하면서 일제 말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조직이다. 1942년 이후 활동이 크게 위축됐음에도 해방될 때까지 조직을 보존하는 데 성공해 박헌영이 해방이후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경성콤그룹은 1940년부터 1942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에 직면한다. 이관술은 김삼룡이 이미 검거된 상황에서 검거 선풍을 차단하고 조직을 정비하고자 이주상의 연락으로 1941년 1월 3일경 김재병과 급히 만나는데, 그곳이 바로 노량진 전차 종점이었다. 이곳 노량진 전차 종점에서는 이틀 후인 1월 5일에도 이관술의 지침을 받은 김재병이 이주상의 연락으로 출판부문의 청목복기(창씨명)를 만난다.

당시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전차는 한강인도교를 건너 '명수대 입구'(흑석리는 일본인 목하영의 주도로 명수대로 부르기도 했다)에서 선 후 노량진 종점까지 왕복했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는 특성이 경성콤그룹 활동가들로 하여금 은밀히 만나는 장소로 노량진 전차종점을 이용하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긴급한 상황에서 이관술과 김재병의 다리 역할을 한 이주상은 충남 아산 출신으로 한학 외에는 근대적인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노동자 출신의 혁명가였다. 경성콤그룹에서 금속부문 조직과 선전을 담당했던 김재병은 경찰에 검거된 후 혹독한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42년 6월 병원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했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노량진에는 정조가 망해정을 인수하여 정비한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 있다. 정조는 화성행차 때 잠시 쉬어가던 곳으로 자주 이용하였다. '용양봉저정'이라는 이름은 "북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하고, 동에서는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꿈틀꿈틀하는 것 같고, 봉이 훨훨 나는 듯하다"면서 정조가 직접 이름 붙였다.

1907년에는 고종이 <용양봉저정>을 유길준에게 하사했는데, 그는 '조호정'으로 이름을 바꾸기도 하면서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용양봉저정>은 일제강점기 때 노량진 수산시장 근처에 있던 <월파정>과 더불어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고, 이어 요릿집 '태서관 별장'으로 전락한다. 나라가 망했을 때 명소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1932년 상하이에서 일경에 체포된 독립운동가 안창호는 1936년 일제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나온 직후 '용양봉저정'에 들러 사진을 남기기도 하였다. 안창호는 2년 후 고문 후유증으로 병사한다.

(* 곧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⑰(노량진길 편)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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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