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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노량진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가톨릭노동청년회 - ⑥노량진 컵밥거리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노들나루공원의 역사, 노량진 나루터-노량진 정수장-한강선방어전투

박태보의 노강서원 터에서 사육신공원을 뒤로하고 길을 따라 큰길로 나오면 건너편에 노들나루공원이 있다.

노들나루공원은 과거 조선시대 한양과 삼남지방(충청, 호남, 영남)을 잇는 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가 있던 곳이다. 노들나루공원에는 이곳이 노량진 나루터가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푯말이 설치돼 있다. 
  
노량진 나루터 예전 표석 지금은 이 표석도 철거되고 서울시가 쇠로 만든 표지판을 세워 놓아 노량진 나투터가 있던 자리임을 연상하기 힘들게 되었다.
▲ 노량진 나루터 예전 표석 지금은 이 표석도 철거되고 서울시가 쇠로 만든 표지판을 세워 놓아 노량진 나투터가 있던 자리임을 연상하기 힘들게 되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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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나루터가 있던 이곳에는 1910년 일제에 의해 노량진 정수장이 설치된다. 이때부터 일본인이 많이 사는 멀리 인천까지 배수관이 연결돼 물을 공급하게 되면서 이곳은 노량진 정수장으로도 불리게 된다.

노량진 정수장은 2001년까지 서울시민과 인천시민에게 수돗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 처음 공원이 조성될 때 이름을 노량진배수지공원이라고 했던 이유도 이런 사연 때문이다. 지금도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남부수도사업소 시설이 남아 있다. 공원 안에는 이 곳에 노량진 정수장이 있었음을 알리는 '노량진 정수장 터' 기념 표석이 제법 크게 설치돼 있다.

노들나루공원에는 한강선방어전투 기념 조형물도 설치돼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한 상황에서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벌어진 한강선 방어전투를 기념해 당시 사망한 국군 이름이 새겨진 배경석과 기념 조형물을 조성해 놨다. 

한강선방어전투는 한국광복군 참모장 출신의 김홍일 장군(1898~1980)이 지휘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군 장교로 근무한 1932년 당시 이봉창 의사의 의거,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때 백범 김구의 지시로 의거에 사용할 폭탄을 제공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한강선방어전투는 전쟁 초기 후퇴하는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전투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노량진,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

이렇듯 볼거리도 많은 노들나루공원이지만, 그런 구경은 뒤로 미루고 오늘은 정자가 있는 벤치에 앉아 노량진 일대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노량진 일대는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노량진 일대가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된 이유는 노량진 나루터가 들어선 이래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던 지역의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량진 나루터가 활발하게 역할을 하던 시절 노량진은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삼남지방과 통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량진의 지위는 경인선 개통(1899), 한강철교(1900)와 한강 인도교 설치(1917)로 이어진 근대에도 변함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노량진 일대의 지역주민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획득한 정보에 기반해 높은 정치 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는 특성으로 인해 노량진 일대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될 수 있었다.

노량진 살던 박양순, 배화여학교 '3.1운동 1주년기념투쟁'의 선두에

1920년 3월 1일 경성 시내는 일제 경찰의 철통같은 경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경성 시민 누구도 1년 전 오늘이 한반도 전역을 뒤흔들었던 만세운동이 시작된 날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일제는 학생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열흘 정도 임시휴교 조치를 내리기도 하고, 3월 1일과 2일 이틀 동안은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의 하나인 천도교의 종교 행사마저 열지 못하도록 조치한다. 1년 전 크게 당했던 일제는 경성 시내에 경찰을 미리 풀어서 이번에는 모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3.1만세운동 1주년기념투쟁'에 끝내 나선 학교가 있었다. 바로 배재고등보통학교와 배화여학교, 신명학교이다. 이때 배화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노량진리(현 노량진동)에 살던 박양순(1903~?)도 배화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나선다.

당시 배화여학교 학생들은 3.1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기숙사 뒤쪽 언덕과 학교 마당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일제는 학교별로 주모자 수십 명 씩을 연행했다. 배화여학교의 스미스, 배재고보의 아펜젤러 등 두 외국인 교장을 '인가취소' 조치해 교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한다.

이때 박양순도 23명의 배화여학교 동료과 함께 주동자로 몰려 구속되는데, 그해 6월에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고 석방된다. 박양순이 수감돼 있던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는 박양순의 수감 당시 사진이 전시돼 있어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게 해준다.

박양순은 그동안 징역 6개월 이상의 경력자만 가능하다는 보훈처의 규정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2018년에야 규정이 바뀌면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됐다.
 
박양순의 수형기록표 3.1만세운동 1주년 기념투쟁의 배화여학교 박양순은 1920년 당시 17세의 소녀로 키가 147cm를 갖 넘었다.
▲ 박양순의 수형기록표 3.1만세운동 1주년 기념투쟁의 배화여학교 박양순은 1920년 당시 17세의 소녀로 키가 147cm를 갖 넘었다.
ⓒ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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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동리에 아지트를 두고 있던 승려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환

승려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환(1893~?)은 1921년 두 번째 체포될 당시 시흥군 북면 본동리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김경환이 일제에 처음 체포된 것은 1919년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스님이었던 김경환은 1919년 당시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이를 확산시키기 위해 경북 선산에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일경의 추적에 걸려 체포됐다.

6개월의 형을 산 후 출옥한 김경환은 만주로 망명해 대한독립단의 일원이 돼 활동하던 중 국내로 잠입한다.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김경환은 노량진 본동리에 아지트를 두고 멀리 상주와 선산 등 경북 지역의 사찰을 돌면서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일제의 판결문에 따르면 김경환이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곳은 경상북도 문경군 금룡사·대승사·고운사·예천군 용문사와 상주군 내서면 남장사 등이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자금 모금 중 박달준, 김봉률 등과 함께 또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된 김경환은 이번에는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는다.

경남 양산 출신의 김경환은 <동작구지>(1994)에 시흥군 북면 본동리 출신으로 소개돼 지금도 동작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는 본적지와 거주지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잘못이다. 더군다나 여러 차례 정정을 요구했음에도, 동작구청 홈페이지, 동작문화원 홈페이지에는 변함없이 동작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김경환을 잘못 소개하고 있다. 
 
김경환의 판결문 스님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환은 2차례 옥고를 치르는데, 두번 째 체포되었을 때 시흥군 북면 본동리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다.
▲ 김경환의 판결문 스님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환은 2차례 옥고를 치르는데, 두번 째 체포되었을 때 시흥군 북면 본동리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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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박두종, 6.10만세운동 선두에 서다

1926년 순종의 인산일에 맞춰 제2의 3.1만세운동으로 기획된 6.10만세운동은 원래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개량주의로 경도된 신파를 비판한 혁명파)가 중심이 돼 민족협동전선의 형성과 강화라는 전망과 결합해 추진한 사업이었다.

거사 직전 일련의 탄압으로 조선공산당의 권오설을 비롯한 핵심 멤버들이 연행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 학생 등을 중심으로 흔들림 없이 추진됐던 일제 강점기 3대 대중운동의 하나다.

이때 주동자 11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던 박두종(1904~1967, YMCA 영어과)은 함경남도 홍원 출신으로 노량진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만세운동 당시 시내 죽첨정(지금의 충정로)에 있던 박두종의 하숙방은 주동자들의 아지트로 사용되기도 했다.

주로 재정 쪽을 담당했던 박두종은 6월 10일 당일 황금정 5정목(지금의 을지로 5가)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선도하다가 체포됐다. 재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다음해 9월 20일에 석방된다.

당시 재판상황을 보도한 <동아일보>는 박두종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6.10만세운동의 본질을 호도하기 위해 색깔론을 들이대고 있었다. 요즘과 비슷하게 이념논쟁으로 끌고가 독립운동의 본질을 호도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재판장이 "피고는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는가"라고 박두종에게 물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박두종의 대답이 놀랍다.

"연구할 마음은 있었소마는 아직 착수는 안 했었오."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박두종의 답변에 재판장은 허를 찔렸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이어 재판장은 "만세를 부른 동기를 말해보라"고 질문한다. 이번에도 박두종의 답변이 빛을 발한다.

"동기는 삼척동자도 알 일이오!"

초조해진 재판장은 "피고는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있었던가"라고 질문해 스스로 '조선독립'을 먼저 언급하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6.10만세운동 관련자 재판을 다룬 동아일보 보도 기사(1926. 101. 3) 박두종은 재판정에서 재기넘치며 분명한 어조로 6.10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 6.10만세운동 관련자 재판을 다룬 동아일보 보도 기사(1926. 101. 3) 박두종은 재판정에서 재기넘치며 분명한 어조로 6.10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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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청년들, 노량진청년회·용흥청년회 조직해 독립운동에 나서다

3.1혁명 이후 1920년대 내내 전국 각지에서는 청년회 조직이 대대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노량진에서도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한 노량진청년회와 용흥청년회가 조직돼 활동에 나섰다.

1926년 70여 명의 회원으로 출발한 노량진청년회는 1924년에 결성된 노강(鷺江)구락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노강(鷺江)은 노량진 앞의 한강을 부르던 별칭이다. 이들은 '노량진의 목소리'라는 의미를 담은 기관지 <노성>도 발간하면서 노동야학, 강연회, 금주운동, 수재구호활동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처음 결성 당시에는 사무실도 구하지 못해 회원 인국현이 자신의 집을 사무소로 내놨다고 한다.

노량진청년회는 본동리에 있던 은로학교 대강당을 활용해 유명 연사를 초청한 강연회도 자주 열었다.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 1926년만 해도 8월에는 "생활개선의 철저한 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남녀대강연회를 개최해 강사로 백신애(경성청년연합회, 소설가), 박원희(경성여자청년회 집행위원) 등을 초청해 '여성해방과 경제조건' '우리의 사명' 등을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10월에는 노량진추계대강연회를 개최해 홍병선(중앙기독교청년회)과 유각경(YWCA)을 초청, '교육과 조선의 장래' '우리는 배움으로 나가자' 등의 주제로 강연했다. 
  
노량진청년회가 주최한 주민위안 공연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1928. 9. 5) 노량진청년회와 용흥청년회는 주민위안 공연도 종종 개최하였다. 노량진청년회가 개최한 3일간의 소인극은 매회 3,500-3,600여명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 노량진청년회가 주최한 주민위안 공연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1928. 9. 5) 노량진청년회와 용흥청년회는 주민위안 공연도 종종 개최하였다. 노량진청년회가 개최한 3일간의 소인극은 매회 3,500-3,600여명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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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청년회는 동아일보시흥지국의 후원을 받아 활동한 경우가 많았다. 동아일보시흥지국의 후원 하에 유명한 사회주의자 한위건(당시 <동아일보> 기자)을 앞세워 '현실을 직관하라'라는 제목으로 영등포, 안양, 군포 등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노량진청년회는 서울청년회 계열의 청년단체인 경성청년연합회, 경기도청년연합회,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해 활동했다.

노량진청년회는 무산아동 교육기관으로 노청강습회(1929, 이후)를 설치하여 운영하기도 한다. 이후 노청학원으로 이름을 변경한 듯한데, 1932년 '인가 없이 운영한다'는 이유로 폐지명령을 받기도 했다. 1933년에는 정식 인가를 받아 운영하면서 단기부인한글강습소(1935)를 열기도 한다.

용흥(勇興)청년회는 1926년 1월에 발기한 청년 조직으로 노량진 일대에서는 노량진청년회와 더불어 양대 청년 조직의 하나였다. 주로 조선일보시흥지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형성하며 운영됐다. 1927년에는 800여 원의 기금을 마련하여 용흥청년회관 낙성식을 하고 청년회관 내에 용흥강습소도 설치해 무산아동과 부녀자를 위한 교육 사업을 벌인다. 
 
용흥청년회의 용흥청년회관 낙성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사진기사(1927. 11. 21) 용흥청년회는 노량진청년회와 더불어 노량진 일대 청년 조직의 양대 산맥이었다.
▲ 용흥청년회의 용흥청년회관 낙성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사진기사(1927. 11. 21) 용흥청년회는 노량진청년회와 더불어 노량진 일대 청년 조직의 양대 산맥이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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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는 강습소 출범 1주년을 맞아 100여 명의 강습소 남녀 아동이 참여하는 용흥학예회를 개최했다. <동아일보>가 이날 있었던 재미있는 해프닝을 보도한다.

당시 시흥군 북면 면장 모씨가 축사를 하면서 "청년사업을 면사무소나 주재소에 지도를 구치 안흐며, 연락을 취치 안느냐?" "그리고 정복을 닙고 나팔을 불며 동리로 행진을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등 애원인지 탄원인지 중언부언 짓거리다가 주최 측의 중지 명령을 받는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용흥청년회가 지역사회에서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35년에 있었던 용흥강습소의 용흥학예회에는 무려 900여 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고 한다(1935. 11. 13, <조선중앙일보>).

용흥청년회도 강연회를 자주 개최했는데 1928년의 춘계강연회에는 이돈화(천도교 개벽 편집인), 방정환(어린이운동가) 등이 연사로 나서기도 한다.

용흥청년회는 박헌영, 김찬, 윤덕병 등이 주도한 신흥청년동맹과 긴밀히 연결된 청년 조직이었다. 

(* 곧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⑯(노량진길 - 노량진은 어떻게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나②)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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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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