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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삶에서 '도전'이라는 단어는 '일상'이나 '반복'보다 더 중요하게 쓰인다. 우리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늘 도전을 해야 한다. 진정한 '나'는 일상에 있지 않으므로 새로운 삶을 꿈꿔야 한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라는 문장은 수없이 들었어도 새로운 도전을 포기하라는 문장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 '일상'이나 '반복' 그리고 '실패'를 중요하게 쓰는 사람이 있다. 호프 자런의 삶이 그렇다. 호프 자런의 자전적인 에세이 <랩 걸>에서는 '여성' 과학자가 아닌 과학자로서 살아내는 삶과, 그 삶을 걸고 연구하는 나무의 삶이 교차된다. 
 
 <랩걸> 책 표지
 <랩걸> 책 표지
ⓒ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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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와 과학자의 나무는 씨실과 날실처럼 서로에게 기대어 하나의 면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은 '태도'에 대해서다. 단어에 대한 평등한 태도, '성공'이든 '실패'든 '특별'이든 '평범'이든 삶에서 마주친 모든 단어를 끌어안는 태도. 결국 이 책은 어떻게 살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다.

과학자의 일은 '도전'이나 '창의'라는 단어보다는 '반복'과 '실패'라는 단어에 더 가깝다. 삽으로 몇 시간씩 땅을 파고, 1센티미터마다 표본을 채취한 후에 정확한 위치를 일일이 손으로 적어 넣고, 미세한 조건을 바꿔가며 같은 실험을 반복하거나, 지원금을 얻어 내기 위한 보고서를 쓰고 또 쓴다.

자신만의 실험실을 간절히 원했던 호프 자런의 첫 실험실은 수없이 파이고 군데군데 찢어진 벽,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전기 스위치, 방 안에 빼곡한 곰팡이, 통기구에 진동하는 변질된 포름알데히드 냄새만이 남아 있는 '누군가 함부로 쓰다가 버리고 가버린 누추하고 작은 방'이었다. 이런 실험실을 두고 내 앞에 놓인 생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는 호프 자런의 태도가 마음에 남는다.

위기나 절망의 상황을 이겨내겠다는 다짐은 어쩌면 진부한 장면이다. 그럼에도 기꺼이 감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호프 자런의 태도는 무엇이든 잘 될 것이라고 믿는 긍정의 태도가 아니다.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인내하겠다는 종교적 태도도 아니다. 한 사람이, 자신 앞에 놓인 삶을 사랑하고야 말겠다는 진지함과 절박함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온 힘을 다해 기어이 살아내고야 말겠다는, '나'의 '삶' 앞에서 당당한 태도.
 
 딸기 밭의 꼬마 할머니
 딸기 밭의 꼬마 할머니
ⓒ 한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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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리 무츠코가 쓰고 나카타니 치요코가 그린 그림책 <딸기 밭의 꼬마 할머니>의 꼬마 할머니는 호프 자런과 많이 닮은 인물이다. 딸기 밭 아래 땅굴 속에는 꼬마 할머니가 살고 있다. 꼬마 할머니는 때가 되면 딸기 열매를 빨갛게 칠하는 일을 한다.

작은 붓으로 딸기 하나하나에 빨간 물을 들이는 일 뿐만 아니라 빨간 물을 만들기도 해야 하는데, 녹록지 않다. 먼저 땅 속 깊은 곳에서 맑은 물을 퍼서 땅 위에 내놓아 햇빛을 잔뜩 머금도록 해야 한다. 땅 속으로 들어가 물을 퍼서 땅 밖에 내놓고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물을 퍼서 땅 밖에 내놓고.

이 '반복'의 길은 계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할머니는 잘게 쪼개진 계단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꾹꾹 눌러 밟는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 땅 속에 있는 돌을 파서 잘게 부숴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햇빛을 잔뜩 머금은 물에 초록빛 돌가루가 녹아들어야 빨간 딸기 물이 완성된다.

밤낮없이 돌을 부수는 할머니의 골똘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실험실의 호프 자런이 떠오른다. 계단을 밟고 돌을 부수고 일일이 딸기 물을 칠하는 동안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지 않는다.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랩 걸>에 나온 나무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대부분의 씨앗은 잎을 틔우기 전 적어도 1년은 기다린다. 체리 씨앗은 아무 문제없이 100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잘 자란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감탄하지만, 그저 기다리고 있는 씨앗들은 내려다보지 않는다.

무관심이다. 발아래 씨앗들은 적정한 온도, 수분, 빛과 다른 조건들을 기다리며 살다가 거의 대부분 죽는다. 그럼에도 기다린다. 기다림은 씨앗의 열망이다. 내 앞에 삶이 기다림이라면, 당당하고 열심히 기다리겠다는 씨앗의 태도를 상상해 본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삶에 대한 의심과 불안으로 울퉁불퉁해질 때마다, 이 책들을 펼치기로 한다. 위로나 조언, 충고의 문장은 없지만 온 힘을 다해 기어이 살아낸 삶의 태도가 있다.

태그:#책,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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