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1 10:39최종 업데이트 18.10.11 10:39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체결한 을사늑약문서. 이 조약에서는 외교권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규정했고,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제국주의 식민지가 된다. ⓒ 한겨레출판

김원봉이 7세 때인 1905년 한국의 국권을 일본이 장악하는 테프트·가쯔라 밀약이 이루어지고, 이를 토대로 을사늑약이 강제되었다. 

10세 때에는 일제가 한국농민의 농지를 탈취하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치되고, 11세 때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한국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처단은 한국의 청년들에게 의협심을 일깨워 주는 일대 쾌거였다. 김원봉 소년도 이 소식을 듣고 아마 의분을 감추지 못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것이다. 이듬해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병탄하고 국권을 탈취했다. 김원봉은 12세 때부터 나라 잃은 망국노(亡國奴)의 신세가 되었다. 5백년 조선왕조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4천년 조선의 역사와 나라를 빼앗긴 것이었다.

김원봉이 중국을 무대로 의열단을 조직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일제타도에 혈전을 벌였던 것은 어릴적부터 보고 들은, 국권상실과 침략자들의 만행과 수탈이 골수에 사무치고, 이것이 성장하면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김원봉은 고향의 명소인 영남루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남천강과 유서 깊은 표충사, 마을 뒷산인 재약산을 놀이터 삼아 석전(石戰) 놀이를 하면서 성장한다. 나라 망한 을사늑약의 사실을 어른들로부터 들었을 터이고, 조상 대대로 가꿔온 논밭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빼앗기는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뒷날 큰 뜻을 함께 펼친 윤세주(尹世冑) 등 마을 친구들과 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맹세했다고, 뒷날 마을 주민들이 전한다.

8세 때 서당에 들어갔다. 
마을 서당에서 여느 아이들처럼 <통감> 등을 읽으면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1세 때에 밀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여 한학에서 '신식'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조선총독부의 지침에 따라 보통학교에서도 일본어와 일본역사교육이 강요되었다. 잠시 동안의 서당 교육을 제외하면 성장하면서부터 일본식 학교와 일본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김원봉은 어렸을 때부터 정의감이 강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특히 일본식 교육에 반발이 심하였다. 고의로 일본어 수업시간에는 들어가지 않는 등 어린나이에도 항일의식이 강했다. 

시골 학교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 벌어졌다. 1911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른바 천장절 행사가 밀양공립보통학교에서도 거행되었다. 김원봉이 행사를 위해 준비한 일장기를 빼내어 학교 화장실에 처박아 버렸다. 

학교가 온통 난리가 나고, 이 사건으로 김원봉 소년은 윤세주와 학교를 자퇴하고 밀양 읍내에 있는 동학(同和) 중학 2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우리 속담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김원봉과 마을 친구 윤세주는 이미 소시적부터 항일의식에 눈을 뜨고 행동하는, 당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면에서 박재혁과 상통하는 바가 많았다.

두 소년은 보통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여 중학교 입학자격이 없었으나, 이들의 애국적인 행동이 널리 알려져 특별히 동화중학에 편입이 허용되었다. 일제가 지배하는 세상이었지만, 식민지 초기여서 아직 저들의 지배력이 시골 구석까지 미치지 못한 상태이었고, 국민들의 항일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두 소년의 행위가 높이 평가받게 된 것이었다. 
 

함께 선 김구 선생과 김원봉 장군 1941년 3월 1일, 3.1절 22주년 기념식. 김구 선생과 조소앙 선생, 신익희 선생, 김원봉 장군이 함께 선 사진이다. 매우 귀한 자료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동화중학교에서 김원봉은 일생의 지침이 되는 훌륭한 스승과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전홍표(全鴻杓) 교장 선생과 만남은 성장기 소년에게 정신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홍표 교장 선생은 애국정신이 남달리 강했던 민족주의자였다. 

"우리가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빼앗긴 국토를 다시 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언제나 슬프고, 또 언제나 비참하다." 라고 김원봉과 윤세주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다. 김원봉은 뒷날 두고두고 전홍표 교장 선생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항일투쟁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교장 선생의 훈도를 받으며 김원봉과 윤세주는 친구들과 연무단이라는 써클을 만들어 체력단련에 힘썼다. 앞으로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력이 튼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겨울에도 새벽에 마을 뒷산을 오르내리며 산행을 하고 냉수욕을 즐겼다. 새끼줄을 꼬아 만든 공으로 모래밭에서 축구를 하고 씨름도 하면서 체력을 단련시켰다. 김원봉이 험난한 군사훈련과 망명생활, 항일투쟁을 하면서 체력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릴적부터 단련한 건강이 큰 바탕이 되었다.

체력단련에 힘쓰는 한편 세계의 위인전이나 한국역사ㆍ지리, 그리고 중국의 병법을 학습하였다. 모두 교장 선생이 구해다 준 책들이었다. 개천절이면 친구들을 불러모아 개천가를 부르며 교정을 행진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 뜻을 알려주었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들의 유별난 행동이 일제 경찰 정보망에 포착되고, 결국 일제는 전홍표 교장을 위험인물로 지목하여, 학교 폐쇄명령을 내렸다. 일제는 이 학교의 재단이 부실하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래서 김원봉은 부모를 조르고 친척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80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모아 교장 선생에게 전달하며 학교를 살리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이 학교를 폐쇄시킨 이유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학교의 회생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교가 폐쇄되자 김원봉은 새로운 꿈을 그리며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는 할머니의 언니되는 분이 여승으로서 대단히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남들은 하루 세끼 식사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 할머니와 주위 사람들은 마치 딴 세상 사람들처럼 잘 먹고 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의감과 반항심이 남달리 강한 김원봉은 크게 반감을 느끼며 지체없이 고향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김원봉은 1년 여 동안 집에서 가까운 표충사에서 여러 가지 책, 특히 각종 병서를 읽으면서 조국광복에 필요한 무장투쟁의 이론을 탐구하였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 (四溟大師)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명명한 사찰이다.

<삼국사기>를 쓴 일연(一然) 국사가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법을 일으키기도 한 유서 깊은 곳이었다. 김원봉이 머물 무렵에는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공포한 '사찰령'에 따라 표충사는 31본산 중 통도사의 말사(末寺)로 편입되어 있었다.

뒷날 3ㆍ1혁명이 일어났을 때 본사의 승려 이찰수ㆍ오학성ㆍ손영식ㆍ김성흡ㆍ이장옥 등이 3ㆍ1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투옥되었다. 김원봉은 의분에 넘친 소년시절을 표충사에서 무장투쟁을 위한 병서를 읽고 역사의 혼을 체득하였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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