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0 13:31최종 업데이트 18.10.10 13:31
 

박재혁 의사. 박재혁의사 생가 부근 독립운동가 골목 모습 ⓒ 개성고등학교역사관 제공

 
박재혁은 구세단이 활동한지 6개월 만에 조직이 탄로나 체포되었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서도 암암리에 활동을 계속하였다. 1914년 최천택과 함께 마치 지방여행을 하는 척 하면서 울산ㆍ경주ㆍ김해ㆍ밀양 등지를 순회하였다. 

가는 곳 마다 은밀히 동지들을 만나 사귀면서 뜻을 모았다. 
밀양에서는 뒷날 의열단을 조직하여 계속된 의열투쟁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장본인 김원봉과도 만났던 것 같다. 아니면 김원봉이 영남 일대를 순방할 때 부산에서 최천택 등과 함께 박재혁을 만났을 것이다. 


김원봉이 중국 톈진의 독일계 학교인 덕화학당(德華學堂)에 입학할 때 최천택이 여비를 지원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때 밀양에서 박재혁과 함께 최천택이 김원봉과 만났을 개연성이 적지 않다. 이런 인연으로 하여 박재혁은 1920년 상하이에서 다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밀양에는 일합사(一合社)라는 비밀결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청춘의 일편단심을 합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일합사라고 한 이 조직은 김원봉이 중국으로 유학가기 직전까지, 그러니까 1914~1915년 경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일합사는 박재혁 등이 조직한 구세단과 연계하면서 항일구국활동을 하고, 두 조직을 연계한 인물이 김인태였다. 지하조직의 기밀상 구체적 연대나 활동 등은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이 시기에 박재혁은 밀양에서 김원봉과 만났을 것이고, 이들은(최천택과 3인) 의기상통하여 앞으로 구국투쟁에 함께 하기로 다짐하였을 것이다. 

박재혁은 19세가 되던 1915년 3월 22일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제4회 졸업생이다. 4년 동안 이 학교에 재학중 <동국역사> 배포사건과 구세단사건 등 고등학생의 신분으로서는 행하기 어려운 일을 하고 여러가지 고난을 겪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졸업생은 모두 27명이었다.
  

왼편 한복 차림의 박재혁의사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때 급우들과 함께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졸업사진을 찍을 때 동기생들은 교복차림인데 박재혁은 한복을 입었다. 민족정신을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고 고집이었다. 학창시절 몇 장 남아 있는 사진에도 한복을 입고 있다.

박재혁은 생계가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언제까지 노령의 어머니와 어린 동생에게 가정살림을 맡겨둘 수 없었다. 

그래서 1916년 4월 부산전기회사 전차 차장으로 취직하였다. 
상업학교를 졸업했으니 은행이나 금융기관에 취업하고자 했지만 '학생운동'의 전력 때문에 좌절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소한 전기가스회사에 취업하였다. 적성에 맞지 않아서 얼마 후 그만 두고 친척인 박국선(朴國善)이 경영하는 경북 왜관의 곡물무역상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김원봉과 만났을 때 나누었던 해외로 나가는 데는 무역회사가 수월할 것으로 보았다. 

박재혁의 생애에 일대 변곡점이 되는 인물, 김원봉에 대해 살펴본다.
  

약산 김원봉 장군 약산 김원봉 장군은 1920년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을 창설한 인물이다. 1930년대엔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 뒤 애국지사를 직접 길러냈다. 이후엔 항일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조선의용대를 창설, 총대장을 맡았다. 일본은 약산에게 지금 가치로 320억 원 이상의 현상금을 걸었다. ⓒ KBS 다큐영상 캡처

 
김원봉은 1898년 3월 13일(음) 경남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에서 태어났다. 

박재혁보다 3년 아래이다. 아버지는 김주익(金周益), 어머니는 이경념(李京念) 이다. 어머니는 차남 경봉을 낳고 병사하였다. 재혼한 천연이(千蓮伊)는 장녀 복잠과 6남 봉철, 7남 봉기, 8남 덕봉, 9남 구봉, 차녀 학봉을 낳았다. 아버지는 박순남(朴順南)이라는 여자를 별도로 두어 3남 춘봉, 4남 용봉, 5남 익봉을 낳았다. 넷째아들 익봉만 아이 때 사망하고, 10명의 자녀들은 성장하여 향리에서 살다가 해방 뒤 김원봉의 월북과 보도연맹사건 등으로 아버지는 굶어죽고, 봉철ㆍ봉기ㆍ덕봉ㆍ구봉 등 친동생 4형제가 처형되는 등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다. 

할아버지 철화(哲和)는 역관출신으로 비교적 일찍 개명된 분이었고, 할머니는 천씨(千氏)다. 아버지 김주익은 30 여 마지기의 농사를 지으며 중농 정도의 생활을 유지하였다. 김원봉은 김해 김씨 73세(世) 참판공파 42세 손이다.

김원봉의 어린 시절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평범한 시골 농사꾼 10명의 자녀 중의 하나인 그에게 특별한 기록이 있었을 리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