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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노량진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가톨릭노동청년회 - ⑥노량진 컵밥거리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사육신공원 입구 육교 앞 벽면에는 함석헌 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 함석헌 선생의 글 사육신공원 입구 육교 앞 벽면에는 함석헌 선생의 글이 새겨져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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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컵밥거리 앞에 놓여 있는 육교를 건너면 바로 '사육신공원'이 기다리고 있다. 사육신공원을 탐방하기에 앞서 공원 입구 벽면에 있는 함석헌 선생(1901~1989)의 글을 음미하는 일을 빠뜨리면 안 된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엔 배울 것이 있다.'"

위 글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에 나오는 대목이다. '의(義)', '의로운 삶'의 중요성을 압축적으로 강조하고 있어 읽기만 해도 숙연해진다. 함석헌 선생은 1960, 197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의 지도자 중 한 분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2014) 총리 후보로 지명된 문창극은 자신이 장로로 있는 교회 강연에서 '일제의 식민지배도, 남북 분단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들은 게으르고 자립심도 부족하고 남에게 신세지는 거 좋아하는 민족이니 시련이 필요하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는 거다'라는 식으로 우리 민족을 비하한 사실이 밝혀져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인 적이 있다.

그때 당황한 문창극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난을 희석시켜보려고 함석헌 선생을 엉뚱하게 끌어들이려고 했다. 사람들은 어이없어 했다. '고난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 불의에 맞선 저항을 강조'했던 함석헌이 어찌 '하나님의 섭리라며 저항을 거부하고 순종을 강조'했던 문창극과 같을 수 있겠는가.

'사육신'인가, '사칠신'인가 
 
사육신공원 안에는 사육신묘가 있다.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묘 6기에 김문기의 묘가 더 있다.
▲ 사육신묘 사육신공원 안에는 사육신묘가 있다.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묘 6기에 김문기의 묘가 더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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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공원은 사육신묘와 사당인 의절사(儀節祠), 전시공간인 '사육신 역사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 시원한 숲과 한강 조망대도 갖추고 있어 노량진 일대의 취업준비생과 학원생들에게는 아늑한 휴식 공간 역할도 한다.

그런데 사육신공원을 방문하는 이들은 곧 당혹감에 빠진다. 사육신묘의 무덤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모신 6기가 아니라 김문기의 묘가 추가된 7기라는 점, 의절사에도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는 점 때문이리라. 주변을 둘러봐도 이에 대한 뚜렷한 설명도 보이지 않는다. 기껏 안내판에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후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하였다"라는 구절만 있을 뿐이다.

사정은 이렇다. 1977년 서울시가 사육신묘 성역화 사업을 시작할 즈음에 김문기 집안인 '김녕김씨 종친회'와 일부 학자가 가세하여 '사육신이 잘못됐다, 사육신 중 유응부가 김문기로 바뀌어야 한다'고 문제제기 하면서 바로잡길 요구했다. 이에 곤란한 상황에 처한 서울시가 문교부를 통해 국사편찬위원회에 사실 여부를 가려달라고 의뢰한다.

국사편찬위원회 "김문기가 세조 때 가려진 6신"

그 결과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가 세조 때 가려진 6신이며, 김문기는 도진무로서 박팽년과 모의할 때 군사를 동원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충의공 김문기를 현창하여야 한다"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 사항'이 나온다.
 
사육신공원 옆에는 김녕김씨충의공파대종회관(백촌빌딩)이 있다. 그 옆에는 충의공김문기사육신현창비가 있고, 바로 그 현창비 옆에 이 동판이 새겨져 있다. 권력에 굴종한 최영희 위원장과 이병도 위원 등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명단도 볼 수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사항을 새겨놓은 동판 사육신공원 옆에는 김녕김씨충의공파대종회관(백촌빌딩)이 있다. 그 옆에는 충의공김문기사육신현창비가 있고, 바로 그 현창비 옆에 이 동판이 새겨져 있다. 권력에 굴종한 최영희 위원장과 이병도 위원 등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명단도 볼 수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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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김문기가 세조 때 가려진 6신"이라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견해는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세조 때는 사육신을 비롯해 '단종복위운동'에 나섰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충신이 아니라 '난신'이었다.

심지어 세조가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때 살해된 김종서, 황보인, 조극관, 민신 등도 난신이었다. 따라서 세조 때 사육신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근거로 삼은 세조실록에 따르더라도 1456년의 '단종복위운동'에 나선 인물들의 거명 순서는 일률적이지 않다. 유응부가 포함되든 김문기가 포함되든 특별히 6명을 구분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육신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곳은 세조실록과 같은 정사(正史)가 아니라, 생육신의 한 명인 남효온의 <추강집>이다. 그것도 성종 때 남긴 책이지만 발간하지도 못하다가 그의 외증손 유홍이 선조 때 처음 발간(1576)했다. 이들 육신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도 <육신전>이 포함된 <추강집>이 나온 이후인 선조 9년(1576)의 일이다.

더군다나 김문기는 1456년의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된 인물 중 유일하게 관련 사실을 부인한 인물이었다. <세조실록>의 기사(세조 2년, 1456)를 보면 "공초(供招)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운동이 실패하자 끝내 당당한 모습조차 보여주지 못했던 인물이 바로 김문기였다.          

권력에 굴복해 역사를 왜곡한 사람들

사정이 이러니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이 그대로 수용될 리가 없었다. 우선 서울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학술적으로 내린 결정에 따라 처리하고자 하나 '사육신묘'라는 명칭 하에서는 처리할 수 없"다고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1) 김문기 선생을 육신묘역에 봉안할 것인지 여부와 유응부 선생의 계속 봉안 여부, 2)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에 대하여 앞으로 육신묘역에 봉안해 줄 것을 요청해올 경우 이에 대한 대책과 사육신묘역의 명칭 문제"를 검토해달라고 재질의 형식을 빌려 문화공보부장관에게 요청한다.

이에 문화공보부는 국사편찬위원회에 의뢰해 "김문기를 사육신묘에 허묘로 봉안함이 타당하다, 유응부는 현상대로 존치함이 타당하다,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된 인사들을 충신사 또는 충신단으로 하여 그 위패를 봉안하는 것도 타당하다"는 입장을 전달한다. 사육신묘를 정비하면서 김문기의 묘가 추가된 사정이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역사를 왜곡한 사람들

반면, 충의공 김문기를 배출한 김녕김씨 (충의공파) 종친회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사항이 나오자 신속하게 움직인다. 종친회관을 사육신공원 옆으로 옮기고 '충의공김문기사육신현창비'를 세웠다. 또한 그 옆에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사항을 동판으로 구체적으로 새겨 놓는다. '가문의 영광'에 걸맞은 대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어도 문제는 정리될 수 없었다. 유응부의 천녕유씨 종친회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고, 이어 (사)사육신현창회에서도 들고 일어났다. 언론에서는 '1977년 당시 권력자였던 김모씨의 압력에 굴복해 사육신까지 조작하려 한다'는 의혹보도와 함께 사육신논쟁이 일어났다. 언론에 등장한 권력자 김모씨는 1979년 독재자 박정희를 저격한 '10.26 사건'의 주역이었던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김녕김씨 종친회 회장도 지낸 인물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결국 1982년에 이르러 "종래 사육신을 변경한 적이 없다"고 한 발 뺀다. 그런데 누가 봐도 비겁한 모습이었다. 이미 관련 당사자가 사망한 이후임에도 권력에 굴종했던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보다 책임 회피용 변명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그런 비겁한 행태는 지금까지도 사육신논쟁을 멈추지 않게 하는 뿌리이고, 사육신 문중 사이의 갈등을 계속 조장하는 원천이다.
  
권력에 굴종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행보 때문에 사육신공원 정비사업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 사육신논쟁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82. 11. 15) 권력에 굴종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행보 때문에 사육신공원 정비사업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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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녕 김씨들의 '사육신 포함 작전'은 1977년이 처음은 아니었다. 정조 11년(1787) <일성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예조가 아뢰기를 '봉산(鳳山)의 충의위(忠義衛) 김광엽(金光曄)의 상언에, '11대조인 고(故) 판서 김문기(金文起)는 명절(名節)이 모두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있으니, 육신사(六臣祠)에 추가 배향하거나 혹 자손들이 사는 고향에 사당을 세워 주소서' 하였습니다. 무술년(1778, 정조2)에 증시를 한 것도 드러내어 장려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육신사에 추가 배향하는 것은 결코 오늘날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당을 세워 받드는 것도 조정에서 지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여, 그대로 따랐다.

조선시대 정조 때도 김녕김씨 집안의 김광엽이라는 인물이 달성(대구)에 있는 '육신사'에 '추가 배향'해 달라는 요청을 조정에 했지만, 거절당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사육신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낳은 블랙 코미디

예전에 한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김녕김씨 종친회 발 '사육신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도 본질적으로 이와 유사하다. 단종복위운동 과정에서 죽은 인물이 사육신만 있는 것이 아닐 텐데, 후세에 사육신만 기억되다 보니 '사육신 못지않게 훌륭한 인물' 김문기를 조상으로 두고 있는 김념김씨 후손들로서는 은근히 열불이 났을 법도 하다.  

그렇다고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도 권력을 이용해 역사를 왜곡하려 한다는 것은 불의에 맞서 단종복위운동에 나섰던 김문기 선생의 정신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미 조선 정조 때 <세조실록> <육신전> 등을 검토하면서 단종의 장릉 정단에 배향할 '어정배식록'을 편정하면서 김문기는 조극관, 민신과 더불어 '삼중신'의 한 명으로 정리된 바 있다. 그때도 사육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응부를 포함한 그 사육신 그대로였다.

사육신 유응부의 수난, 가문의 힘이 너무 약해서?

유응부는 사육신 중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유응부를 제외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은 모두 집현전 학사 출신의 문신이다. 유응부만 유독 무장 출신이다. 더군다나 유응부 집안의 본관은 천녕(川寧)(지금의 여주)인데, 천녕유씨는 전국에 지금도 5000명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김녕김씨 집안의 공세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기계(杞溪)유씨 집안의 공세에도 맞서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기계유씨 집안에서 1965년에 뒤늦게 유응부를 기계유씨 족보(을사보) 본보에 올린 것이다. 인터넷에서 유응부를 치면 본관이 '기계 혹은 천녕'이라고 나오기도 하고, 기계(지금의 포항)라고만 나오기도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정조의 시문집 <홍재전서>에 단종의 장릉 정단에 배향할 32인을 정할 때 이야기가 나오는데, 유응부의 본관을 천녕으로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순조 11년(1811)에는 처음으로 예조에서 유응부의 종형제 유응두의 7세손 유대근을 봉사손으로 지정했고, 1820년대 초 예조에서 발급된 <봉사손 결정입안문서>와 1904년에 발급된 <봉사손 입안문서>도 천녕유씨 문중이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도 동작구청이 설치한 사육신공원의 안내 푯말이나 사육신 역사관에는 유응부의 본관을 기계로 표기하고 있다.

사육신공원에서 당하고 있는 사육신 유응부의 수난을 보고 있노라면,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 크로체가 한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말과 소설 <1984>의 저자 조지 오웰의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말의 의미가 저절로 실감난다.     

<단종충신 역사관> vs. <사육신 역사관>

사육신공원에 있는 '사육신 역사관'은 2011년 처음 만들어질 때는 '단종충신 역사관'이었다. 사육신공원에 건립한 역사관을 '단종충신 역사관'으로 이름 붙였던 이유는 197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된 인사들을 충신사 또는 충신단으로 하여 그 위패를 봉안하는 것도 타당하다"라고 한 잘못된 답변과 맥이 닿아 있었다. 
 
2011년 처음 건립될 때는 <단종충신 역사관>이었다.
▲ <사육신 역사관> 2011년 처음 건립될 때는 <단종충신 역사관>이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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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곧바로 "사육신 공원에 어떻게 '단종충신 역사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단종충신 역사관'은 단종이 묻혀 있는 영월의 장릉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사육신 후손들의 강한 비판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육신 역사관'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단종충신 역사관>으로 되어 있다.
▲ <사육신 역사관>의 옛모습.  <단종충신 역사관>으로 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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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투성이의 '동작구 홍보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고

'사육신 역사관' 안으로 들어가면 2층에 역사관이 있고 1층에는 '동작구 홍보관'이 있다. 그런데 이 '동작구 홍보관' 역시 오류투성이다. 일반적으로는 대부분 맞는 이야기에 한두 개의 잘못이 있는 경우인데, 동작구의 연혁을 소개하고 있는 곳을 보면 놀랍게도 한두 개만 맞고 대부분이 사실과 다르게 정리돼 있다.

가령 '1931년 이전 경기도 시흥군 북면, 동면이었음'이라는 부분을 보자. 사실은 동작 지역은 1936년 4월 1일 이전까지도 경기도 시흥군 북면, 동면, 신동면이었다. 1931년은 그 이전과 이후가 구별될 만큼 동작 지역에 특별한 변동이 없었다. 반면, 1936년에 동작지역의 대부분이 경성부에 편입된 큰 변동은 아예 표기조차 돼 있지 않다.

'1943. 6 서울시 영등포구로 명칭변경'이라는 대목도 어처구니없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당시에 일제는 서울시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경성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1963년 부분도 황당하다. 1963년에 관악출장소가 설치된 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작 지역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사안이다.

같은 시기 새로 서울에 편입된 사당동을 관할하기 위해 영등포구청이 설치한 출장소는 신동출장소였다. 관악출장소는 동작 지역과 무관한 관악 지역의 신림동, 봉천동 등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출장소였다.

오류를 지적하면서 고칠 것을 요구해도 동작구청은 예산을 이유로 몇 년째 방치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류투성이의 동작구 연혁을 담고 있는 '동작구홍보관을 운영하는지는 알 수 없다.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한데도 말이다.

'불의'에 맞서 싸운 사육신의 정신을 계승하려면

'불의(不義)'에 맞서 자신은 물론 집안의 목숨까지 내던지며 싸웠던 사육신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역사왜곡도 서슴지 않는 일부 후손들 때문에, 권력에 굴종하는 어용 역사학자들 때문에, 관료주의에 물든 동작구청 때문에 500년을 훌쩍 넘긴 오늘에도 새로운 형태로 수난을 당하고 있다. 그 현장이 바로 사육신공원이다.

'불의(不義)'에 맞서 싸운 사육신의 정신을 칭송하고 제대로 계승하는 게 진정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제 사육신공원을 제대로 정비하는 일을 더이상 뒤로 미뤄서는 안 될 것이다.  
  
(* 곧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⑭(노량진길 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태그:#동작 민주올레, #노량진길, #사육신공원, #사육신역사관, #동작구 홍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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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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