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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소녀"  손정옥 선생 퇴임 축하 모임 진여상 시절의 제자가 축하와 회고의 글을 읽고 있다
▲ "촛불 소녀" 손정옥 선생 퇴임 축하 모임 진여상 시절의 제자가 축하와 회고의 글을 읽고 있다
ⓒ 윤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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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이렇게 묻고는 대답했다. 사랑. 나도 가끔 묻게 된다. 교사, 혹은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여기 한 평교사가 있다. 올 8월 말로 정년퇴임 한 그의 이름은 손정옥. 얼마 전 가까운 지인들은 그를 위해 조촐한 퇴임축하연을 마련했다. 해운대 바보주막에서.

그 한쪽 벽에 붙여진 플래카드의 글귀는 이랬다. '촛불 소녀 손정옥 선생 퇴임 축하 모임' 예순둘을 꽉 채운 여교사에게 '촛불 소녀'라니? 그 이유를 나도 모르진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교사 손정옥은 세월호 참사가 난 얼마 뒤부터 퇴임을 한 지금까지 이른바 '해운대 촛불'의 한 구심으로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이 얘긴 좀 뒤로 미루고 학교 선생으로서의 그를 먼저 만나보자.

낮엔 미술 선생님, 밤엔 노동야학

손정옥이 미술 교사로 처음 교단에 선 것은 1980년, 부산의 낙동여중에서였다. 사상공단이 가까운 곳이었다. 공단 내 신발공장엔 전라도 등지에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돈 벌러 온 어린 노동자들이 숱했고 학교에 다니다가도 공장에 가야 한다며 자퇴를 하는 아이들도 적잖았다고 했다.

그게 너무 안타까웠던 손정옥이 한번은 한 아이의 부모에게 학비는 내가 댈 테니 얘를 고등학교는 보내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부모는 '당신이 우리 집 생계 책임질 거냐'라고 항변을 하더란다. 그곳에서 그는 2년 반 동안 야학을 했다. 노동야학. 어린 노동자들에게 무언가 희망을 주고 싶어서였다.

학교 부근 마을 '이장님'이 '선생님이 좋은 일 하시는데' 하며 마을 회관을 교실로 빌려도 주고 이런저런 도움도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때는 서슬 푸른 전두환 신군부 정권 초기. 부산지역 사상 최대 규모의 조작된 공안사건으로서 부림 사건이 터졌고(1981), 야학 때문에 몇 번이나 서부경찰서로 호출을 당하기도 한 그였지만 구치소에 갇힌 부림 사건 관련자들을 위한 영치금 모금에 팔을 걷고 나섰다.

그러니 그가 별 탈 없이 1984년 부산 진여자상업고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된 건 천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85년 공안당국은 교육무크지 〈민중교육〉의 내용을 문제 삼아 대대적인 공안몰이를 했고 이 광풍은 손정옥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손정옥은 교장실로 호출을 당한다. 내려가 보니 수사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불온서적, 불온사상, 불온교사, 어쩌고저쩌고… 대공 분실로 끌려가 당했을 고초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손정옥이 '착하고 똑똑하고 가난한' 명문실업고인 부산 진여상 학생들에겐 누구보다 소중하고, 따뜻하고, 정의로운 선생님이었다는 건 생략해선 안 된다.

"19세기의 시대사와 밀레에 대해 논하라."

기말고사 때면 미술 교사 손정옥은 이런 식으로 문제를 딱 하나만 냈다고 했다. 대신 사전에 문제를 알려주고 답안 준비를 위해 찾아가야 할 도서관과 서점들의 이름과 위치도 알려 주었다.

아이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가난 때문에 날개를 훨훨 마음껏 펼치기 힘든 아이들이 안쓰러웠던 그였다. 아이들은 B4 용지 크기의 답안지를 정성 들여 빽빽하게 채울 정도로 공부들을 해 왔다고 했다.

그랬기에 손정옥은 여상 학생이라 무시하는 일부 교사들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학생들에게 '너희들의 권리를 찾아라'며 데모까지 선동(!)한 까닭이다.

"우리도 제대로 된 수업을 받고 싶어요!"

운동장에 모이라는 학생회의 방송에 아이들은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 농성을 했고 손정옥은 그 맨 앞자리에 앉았다고 했던가. 어쨌거나, 손정옥은 공안당국에 의해 그 진여상에서 쫓겨난다. 부임한 지 1년 반 만이었다.

교사 소모임 운동의 불씨를 지피다 

첫 해직 후(미리 말하지만 그는 1989년 전교조 결성 당시에도 해직의 대열에 섰다) 그의 '의식화' 교육의 열정은 식기는커녕 더 뜨거워졌다고 말해야 한다. 나라가, 사회가 곧 학교였고 변화의 씨를 뿌려야 하는 박토였다.

그는 대연동 뒷골목 한 지인의 건물 지하에서 떡볶이 장사도 하고 그 공간을 나눠 복사점도 연다.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유인물을 비밀리에 찍어내야 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역사가 저만치서 오고 있는 중이었다. 전두환을 몰아낸 그 항쟁의 한 결실로 부산진고로 복직(1988년)을 하자 그는 도서원 운동에 뛰어든다. 책도 빌려주고 공부도 하고 모임도 하는 어떤 아지트.

그가 서면에 문을 연 아롬 도서원은 교사 소모임 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대체로 독서 모임이었다. 일선 학교 대표 교사들의 회합도 거기서 이루어졌다. 평교사회 건설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활짝 웃는 '천생 교사' 손정옥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교사의 길이지만 오늘도 그는 환히 웃는다
▲ 활짝 웃는 "천생 교사" 손정옥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교사의 길이지만 오늘도 그는 환히 웃는다
ⓒ 사진 작가 장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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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옥은 전교조 사태(1989년) 땐 해직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복직한 지 겨우 1년 반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부친의 한 마디는 그의 폐부를 찔렀다. "이번에 또 쓰러지면 우리나라 교육은 망한다." 손정옥은 두 번째 해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1994년 부산공고로 복직한 이후 지금까지 25여 년 세월 동안 손정옥은 어떤 선생이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 숱한 것들 중에서도 세 가지는 꼭 말하고 싶다.

첫째, 기를 쓰고 담임을 맡겠다고 했다는 것. 부산공고 4년 동안 교장은 한사코 그를 담임에서 배제했지만 1년 유보 끝에 기어이 담임을 하고 마는데 그것도 가장 힘들다는 토목과 학생들의 반을 맡았다. 부산공고 역사상 여교사가 그 반 담임을 한 건 60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던가.

두 번째는 '악착같은'(!) 미술수업이다. 그림 제출이면 그림 제출, 그림을 넣는 자서전 쓰기면 자서전 쓰기, '단 한 명도 대충 하거나 안 내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고야 만다는 것이다. 여기엔 타협이 없었고, 그것은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책무요 교육적 실천이었다.

세 번째로는 가는 학교마다 교문 교통 지도와 식당 질서 지도를 자청해서 2년이든 4년이든 일 년을 하루같이 한 것. 왜 그랬을까? 한 학교에서 그는 점심시간에 음식물이 엉망으로 흘려져 있는 식탁에 앉아 아이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들을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영양사를 통해 알아보니 사정이 있었다. 일손이 너무 모자란다는 것. 그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점심시간마다 내가 닦아 줄 수 있는가? 그리고 시작하면 끝까지 할 수 있는가? 결심이 서자 그는 실행에 옮긴다. 식탁 훔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도시락도 싸 다녔다. 그는 늘 그런 식인 것이다.

여러 학교에서 매일 아침 교문 지도를 결행한 건 또 왜였을까? 그에게 교문은 전교생 하나하나뿐 아니라 행인들에게도 상쾌한 인사를 던지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멋진 통로고 시공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산공고 시절 어느 날엔 매일 아침 교문 앞을 지나가는 한 초등학생으로부터 "공고 앞 선생님 덕분에 하루하루가 즐거워요"라고 쓴 예쁜 카드 한 장을 받기도 했단다.

"마고당 할매요, 좀 도와 주이소"

손정옥은 학교 안에서만이 아니라 동네의 교사, 세상 속의 교사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그는 2009년의 어느 날 해운대를 굽어보는 장대한 장산이 구청의 개발 계획(산 정상 부근의 데크 공사)으로 훼손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즉각 장산 살리기 운동을 결심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막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자.' 그것은 매일 새벽 5시에 장산 정상 부근을 올라 '환경 파괴하는 데크 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일인 피케팅을 하는 거였다.

마침 여름방학이었고 평소에도 산을 엄청 좋아하는 손정옥이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손정옥. 매일 새벽 그러고 있으니 산을 좋아하는 장산 '할배들'부터 하나둘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여론이 조성되자 구청에서는 마침내 '공청회'를 열기로 했다는데, 그날 새벽, 손정옥은 장산 중턱에 있는 마고당․ 천제단 앞에서 지역 수호신인 마고할미께 기도를 했단다.

"할매요 지는 장산을 지킬라꼬 나름 최선을 다했심더. 제발 좀 도와 주이소!"

정말 지성이면 감천? 그날 공청회에 나타난 구청장은 예상 밖에도 공사 중단을 선언했고 그 후 해운대엔 시민과 구청이 함께 하는 장산보존네트워크가 결성된다. 교실에서 환경 교육을 역설해온 교사 손정옥은 해운대 동네에서 그것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은 손정옥이 노무현 재단 운동의 일환인 바보주막을 살리기 위해 자청한 100일 자원봉사를 막 끝낸 무렵이었다. 그는 주위의 동지들과 '4. 16 해운대 촛불'을 결의하고 해운대 장산역 부근의 NC백화점 앞거리에서 촛불 집회를 가지기 시작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랬다. 처음 200일은 매일 했고, 그다음 2년은 월, 수, 금으로 이어갔는데 주 1회 수요 집회가 된 것은 얼마 전부터라고 했다.

나무, 산, 영화, 책, 사람을 좋아하는, '촛불 소녀'이자 '천생의 교사'로서 인간 손정옥의 길이 어디로 뻗어 나갈지 나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그것은 그가 '캄보디아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희망을 심기 위해 2007년에 설립된 NGO '캄보디아의 친구들'의 일원으로서 10년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2007년 봄, 첫 캄보디아 진료를 다녀오고 나서 알롱깡안 아이들의 검디검은 눈망울, 포댓자루 하나 어깨에 들쳐 매고 쓰레기장 곳곳을 돌아다니는 아이들 모습이 눈에 밟혀 두 달여 만에 결성한 것이 캄보디아의 친구들이다. 비록 초라하고 촌스럽지만 큰손이나 화려한 모금이 아닌, 고사리 같은 작은 여러 손이 합쳐 일을 해나가고 있다. (...) '캄보디아의 친구들'은 나에게 내려진 축복이다."

축복이라니! 운영이사로 활동하던 당시에 나온 '캄보디아의 친구들' 소식지(2011년 10월)에 실린 손정옥의 말이다. 이 또한 '촛불 소녀'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천생 교사'로서의 한 실천이라고 하면 손정옥은 또 손사래를 칠 것이다. (그라고 왜 허물이 없겠는가?) 하지만 내게 손정옥은 인연이 닿으면 스스로 자신의 '축복'을 만들어나갈 줄 아는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한 사람일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교조 신문 <교육희망>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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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현직 교사이다. <교육공동체 벗>의 조합원으로서 격월간지 <오늘의 교육> 필진이기도 하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