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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득의 정치 책 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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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을 지킨 유명한 정치가다.

계급 간 대립이 극에 달하고 체제가 뿌리째 흔들리는 격동의 역사 가운데서 일신의 안위보다 공화정의 존립을 앞세웠다. 무명의 변호사로 시작해 위대한 공화주의자로 죽은 키케로는 당대 최고의 권력 앞에서도 움추러들지 않아 명성을 얻었으나 꼭 그와 같은 이유로 생을 마감했다. 그를 살해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무력을 앞세워 로마를 집어삼키려 했다면 키케로가 든 무기는 언제나 '언어'였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설득의 정치>는 키케로의 연설문을 한국에 최초로 소개한 책이다. 현재 전해지는 그의 연설문 쉰네 편 가운데 일곱 편을 고대 서양철학과 법학을 깊이 공부한 연구자들이 가려 뽑아 정성들여 번역했다. 이들 모두는 법정과 의회에서 키케로가 실제로 행한 연설로 역사의 한 가운데서 길어올린 귀중한 기록이라 할 만하다.

책의 배경인 기원전 1세기는 혼란한 시기였다. 400년 넘게 이어진 로마 공화정의 찬란한 역사가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귀족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평민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졌다. 검투노예 스파르타쿠스의 난이 이탈리아 남부를 휩쓸었고 조국을 향해 칼을 빼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가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화려했던 로마 공화정의 오늘도 어느덧 황혼이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특출날 것 없는 무명의 키케로가 일약 당대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건 기원전 80년 부친 살해 혐의로 고발된 섹스투스 로스키우스 사건을 통해서였다. 당시 스물여덟 초짜 변호사였던 키케로는 당대 로마의 실권자인 루키우스 술라의 최측근 크뤼소고누스에 대항해 기댈 곳 없던 섹스투스 로스키우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시골에서 아버지의 농장을 경영하던 섹스투스 로스키우스는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침입한 괴한들에게 농장과 노예, 재산을 모두 빼앗긴 채 길바닥으로 쫓겨난다. 황망한 그의 귀에 아버지가 로마에서 살해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로스키우스의 재산을 차지한 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척들과 이들의 뒤를 봐준 크뤼소고누스. 술라 밑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법을 어겨가며 농장과 노예를 포함한 로스키우스의 재산 전부를 몰수재산으로 지정해 경매에 부치고 시세에 훨씬 못 미치는 가격에 사들인다. 크뤼소고누스는 그렇게 얻은 재산을 로스키우스 암살을 공모한 범인들과 나눈다.

범인들은 죽은 로스키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살아 있으면 후환이 될 것이라 판단해 그의 목숨마저 빼앗으려 한다. 하지만 섹스투스가 아버지의 옛 친구들에게 몸을 의탁한 탓에 기회가 나지 않자 섹스투스를 부친 살해혐의로 무고하고 그에게 극형이 가해지길 바란다.

키케로는 이 재판에서 섹스투스에게 살해로 얻을 이익이 없으며 사건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유력자인 크뤼소고누스가 망자의 재산취득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을 들어 섹스투스의 무죄를 주장한다. 술라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누구도 감히 맡으려 하지 않았던 사건은 키케로의 활약으로 무죄로 판결난다.
고발당한 자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고발자를 어느 정도 저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의심스럽고 고발할 여지가 있는 것을 고발한 것이고, 우리를 대놓고 농락하거나 의도적으로 무고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전적으로 우리는 고발자가 최대한 많이 있어야 함을 쉽게 용인합니다. 죄 없는 사람은 고발당해도 무죄로 풀려날 수 있지만, 죄지은 사람은 고발당하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38p
로마 인민에게 더없이 진실되고 지혜로운 재판관이라 여겨진 루키우스 카시우스는, 소송에서 매번 "누구에게 이득인가?"를 묻곤 했습니다. 이득의 기대 없이는 범죄를 저지르려 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역자주: 루시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는 기원전 127년에 집정관을 지낸 후, 기원전 125년에 호구감찰관이 되었다. 그는 "Cui bono?"(누구에게 이득인가?)라는 말로 유명했고, 그 엄격함으로 널리 회자되었다.] -53p

키케로는 로스키우스 사건 이후 3년간 로마를 떠난다. 술라가 숨을 거두고 난 뒤 기원전 77년에야 로마로 귀환하니, 후환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많다. 저 유명한 에밀 졸라에 앞서 무명의 키케로가 권력에 맞서 약자를 변호한 것이다.

<설득의 정치>엔 로스키우스 사건 외에도 베레스·카틸리나·안토니우스에 대한 탄핵과 무레나·아르키우스·밀로에 대한 변호 연설이 실렸다. 이들 모두는 당대 유력자에 대항하는 사건으로 키케로는 이를 통해 명성을 얻기도,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특히 필립포스 연설이라 이름붙은 열네 차례에 걸친 안토니우스 탄핵 연설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고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에 의해 별장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책을 읽으며 놀라게 되는 점은 이들 연설을 통해 드러나는 당대 로마의 정치, 법체계가 놀랄 만큼 체계적이란 점이다. 고대국가의 한계가 없지 않겠으나 의회정치와 법치의 확고한 토대가 단단히 다져져 있다는 사실이 엿보인다.

때문에 키케로의 연설내용을 현실 사회에 그대로 가져다 대도 유의미한 부분이 적잖다. 부패한 지역정치인 베레스를 탄핵한 연설이나 반란을 도모한 카틸리나의 탄핵연설,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무레나 변호사건과 살인죄로 기소된 밀로에 대한 변호연설 모두에서 현대 법체계의 토대와 현실정치의 작동원리가 읽힌다.
 
예전에는, 법률 행위가 가능한 날과 가능하지 않은 날을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책력이란 걸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법률 자문에 응했던 법률가들이 큰 권세를 누렸습니다. 사람들은 법률가들에게 마치 칼데아인들처럼 날짜까지 자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나이우스 플라비우스라는 서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까마귀의 눈을 찌를 만한 사람으로 매일매일의 행사를 암기하여 책력을 대중에게 공포했고, 조심스럽게 비밀을 지키던 법률가들로부터 결국 지식을 훔쳐냈습니다. 그리하여 법률가들은 날짜 계산법이 널리 알려짐으로써 자신들의 협력 없이도 법률 행위가 가능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분노에 차 다시금 일정한 문구를 고안해 내어 모든 사안에 자신들이 몸소 관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비누스 농지는 내 것이다." "아니, 내 것이다." 이런 식으로 두 사람 사이에 재판이 시작되어 일이 극히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도 있었는데, 법률가들은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원고는 말합니다. "사비누스라 불리는 토지에 있는 농지는……" 벌써 아주 장황합니다. 그 다음에는 또 무슨 말이 나옵니까? "나는 그것이 로마 시민의 법에 따라 나의 것임을 언명한다." 그 다음에는? "그리하여 나는 법에 따라 접전을 위하여 너를 소환한다." 난삽한 언어를 구사하며 쟁송하는 원고에게 뭐라고 답변할 것인지, 피소된 피고 자신은 모릅니다. 그리하여 같은 법률가가, 라티움 출신 피리 연주자처럼, 원고에서 피고에게로 넘어갑니다. 피고는 법률가를 따라 말합니다. "네가 나를 법에 따라 접전을 위하여 소환한 그곳에서, 나는 너를 맞소환한다.
-178, 179p

키케로의 위대함은 로마가 이룩한 법과 정치의 토대 위에서 말로써 당대의 유력자들과 싸웠다는 점이다. 2000년도 넘게 지난 오늘 우리의 정치판에서 키케로와 같은 정치가가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면 그의 훌륭함이 생생히 전해진다 하겠다.

키케로는 생전 많은 글을 짓고 이를 출판물로 남겨 그 자신이 그랬듯 후대의 사람들이 읽고 깨우치도록 조치했다. 키케로가 그토록 지키고자 한 공화정체가 일부 선택된 사람의 품을 벗어나 모든 시민의 것이 된 바로 지금, 그의 뜻을 읽는 것만큼 가치 있는 독서도 많치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설득의 정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김남우 외 옮김, 민음사(2015)


태그:#설득의 정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민음사, #김남우,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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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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