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05 16:06최종 업데이트 18.10.05 16:06
 

박재혁 의사가 재학했던 '부산공립상업학교 교정' ⓒ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소수의 선지자 또는 선각자가 있었다. 

박재혁과 최천택 등 소년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숱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부산상업학교는 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고, 학교운영이 쉽지 않았다. 먼저 이 학교의 설립과정과 교명(敎名)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자. 


1896년(고종 32년)에 선각자 박기총을 중심으로 박기총 외 4인이 각 300원씩을 갹출하여 근대적 교육의 요람으로 부산 영주동에 사립학교 부산 개성학교(3년제)를 설립하였다. 교사 신축과정에서 자금이 부족하자 각 300원씩을 추가 투자하였다.

교명의 '개성(開成)'이란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典)> 제11장에 나오는 '개물성무(開物成務)' 즉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모든 일을 이룬다는 뜻이다. '개물(開物)'이란 사물의 뜻을 연다,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바를 개발한다. 미개발된 지혜를 연다, 만물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의미이다. 

'성무(成務)'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정하여 주는 것, 하늘이 하고자 하는 바를 사람이 모두 성취하게 하는 바를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은 천부적인 지혜와 능력을 타고나며, 항상적인 변화와 가능성의 존재로서 자연세계에 내재된 질서를 깨닫고 이에 호응하여 자신의 능력을 발현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정신과 적극적인 인간관을 담고 있다.
(주석 1)

개성학교는 해방 후 제16대 이영순 교장이 제정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온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인품을 함양하고
신체를 단련하며
실학을 연마하여
생활의 힘을 배양한다. 
(주석 2)

일제는 부산 개성학교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학생들의 잇단 항일운동과 졸업생들이 사회 각계로 진출하여 '의식 있는' 활동을 전개하자 당황한 총독부는 1922년 2월 제2차로 '조선교육령 및 실업학교규정'을 개정한 것을 계기로 이 학교의 학사에 사사건건 개입했다. 심지어 교명까지 바꾸도록 하였다.

모교의 교명은 현재까지 12번이나 바뀌었다. 
우리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식민통치를 펴면서 무력에 의한 통치를 감행하였다. 우리 민족은 이에 항거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식민지 정책을 바꾸어 종래의 무단 정치를 문화 정치로 바꾸고 한일 동일 대우를 표방하여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에 따라 1922년 2월 제2차로 '조선교육령 및 실업학교 규정'이 개정되어 본교도 이 해 4월 1일에 학칙을 변경하여 입학자 자격을 수업연한 6년의 보통학교 졸업자로 하였지만, 학교 교명을 일방적으로 부산진공립상업학교로 변경해버렸다. 

전통 있는 부산공립상업학교가 뜻밖에 교명을 고치게 된 배후에는 일본인 위정자들이 한국인 학교를 차별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전국에서 운집한 수재들이 경제계에 많이 배출되고, 3ㆍ1운동 이후 민족 봉기의 아성으로 쟁쟁한 투사를 낳은 한국인만으로 학교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기회 있는 대로 탄압을 가해 왔던 것이다. (주석 3)

일본인 학생들과의 차별도 심했다. 불의의 화재로 교사가 소실되자 총독부는 다른 학교와 합병을 서둘렀다. 일제의 잔학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항일ㆍ배일정신이 깃든 각급 학교의 경우에는 특히 심했다. 

주석
1> 개성고등학교ㆍ개성고등학교총동창회,『거룩한 백양(발자취 3세기(Ⅲ), 18쪽, 2015.
2> 앞의 책, 6쪽.
3> 앞의 책, 83~8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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