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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에피소드 6>을 보면, 장군이 외계인이고 혁명군의 최후 지도자는 여성이에요. 세상을 바라보는 이런 시각들이 너무 좋았어요.
 <스타워즈 에피소드 6>을 보면, 장군이 외계인이고 혁명군의 최후 지도자는 여성이에요. 세상을 바라보는 이런 시각들이 너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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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장이 가득한 공간이 나타났다. 나는 그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건네지 않고 책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흡사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도서관을 옮겨놓은 듯한 곳에서 한때 나의 일부였으나 오래 잊고 있던 무언가를 만난 느낌이었다. 순간 그곳의 모든 책을 열어 보고 싶었다. 마음은 조급했고 눈동자는 빨리 움직였다. 마법과 괴물과 환상과 모험과 요정과 신화와 공포와 미스터리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가슴속의 한 지점에서 뜨거운 설렘이 시작되고 있었다.  SF&판타지 도서관 전홍식 관장을 지난 9월 14일 만났다. 

그가 나타났다

그가 관장으로 있다는 'SF&판타지 도서관' 앞. 잠겨 있는 문을 확인하고 계단에 앉았다. 잠시 후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그 소리가 3층에 다다랐을 때, 푸른 색 페도라를 쓰고 붉은 리본넥타이를 맨 한 남자가 작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여행은 아니고요, 약속 때문에 잠시 다녀오는 길입니다. 지금은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어요. 제가 시간강사로 지낸 지난 10년간 강사료가 단 1원도 안 올랐다는 게 재밌는 사건이죠. 가끔 책도 쓰고 대중 강의도 하고. 아, 저 캐리어, 제가 보통 짐을 저렇게 가지고 다녀요. 누군가는 마법의 가방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하도 이것저것 많이 넣어 다닌다고. 저걸 끌고 다니다 보니까 바퀴를 달고 있는 사람들은 참 불편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파란색 모자와 붉은색 리본 넥타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다 순간 멈칫했다. 바퀴를 달고 있는 사람이 누구지? 아, 휠체어를 말하는 거구나. 인터뷰에 집중해야 하는데 마음이 자꾸 흩어졌다. 오른쪽엔 츄바카(?0가 지키고 섰고 뒤쪽엔 둘리로 보이는 녀석이 그리고 화분 안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 생명체가 앉아 있는 공간. 이곳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내 두 눈은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SF&판타지 도서관을 만들게 된 건, 집에 하도 책이 많이 쌓여 있어서였어요. 쌓아만 두느니 다른 사람들이랑 공유하자는 생각도 있었고, 뭐 약간은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대부분 제가 사 모은 겁니다. 처음 도서관을 열 때는 8천 권 정도였는데 지금은 한 2만 권 정도 돼요." 

1974년생인 그를 사로잡은 것은 아마도 <은하철도 999>였을 것이다, 라는 내 생각은 틀렸다. 

"굳이 말하자면 <미래소년 코난>이 더 가까울 거 같은데. 어렸을 때 과학자를 꿈꿨고 그래서 그 분야의 책들을 많이 봤죠.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 버스타고 어린이도서관에 가서 SF나 판타지물을 찾아 읽었어요. 그러다 결정적으로 '아, 난 이거밖에 없어!'라고 느끼게 된 건 90년대에 재개봉한 <스타워즈>를 보고서였습니다."

그는 1977년 개봉작인 <스타워즈 에피소드 4>를 100번쯤 봤다고 했다. 주요 장면을 다시보기 해서 본 것까지 하면 200번이 넘는다고. 그한테 SF나 판타지밖에 없게 된 이유가 로봇이나 우주전쟁, 외계인 같은 것에 쉽게 매료되는 소년 감수성 때문일 것이라는 내 생각은, 또 다시 틀렸다. 
  
전홍식 회원이 운영하는 SF&판타지 도서관 내부
 전홍식 회원이 운영하는 SF&판타지 도서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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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주를 누비다

"대우주의 낭만이라고 할까요. 그냥 우주가 아니라 대우주. 지구 근처 정도가 아니라 전 우주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이었어요. <스타워즈>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바로 술집 장면이에요. 문을 열면 술집 안이 온통 다양한 외계인들로 가득해요. 그 안에서 인간은 인간의 언어로, 외계인은 외계어로 떠들고 있는데 그냥 말이 통해요. 아,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나도 이런 세계에 살고 싶다, 그런 꿈을 꾸게 된 거죠."

다스베이더의 위압적인 포스, 그에 맞서는 제다이들, 빛나는 광선 검과 끝없는 우주를 항해하는 우주선. 그러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 무엇으로도 존재들을 편 가르지 않는 세상, 그가 판타지에서 발견한 것은 이 드넓은 우주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하고 있을 평화와 공존의 세상이었다. 

"SF나 판타지의 세계는 상상의 경계를 확장시켜주죠. <스타트렉>을 보면, 냉전이 한창인 1960년대 작품인데 그 안엔 러시아인도, 동양인도 나와요.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의 키스 장면이 역사상 최초로 나온 드라마이기도 하죠. <스타워즈 에피소드 6>을 보면, 장군이 외계인이고 혁명군의 최후 지도자는 여성이에요. 세상을 바라보는 이런 시각들이 너무 좋았어요. 모든 존재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계, 저는 그게 미국이 가졌던 이상향 중 한 가지였다고 생각해요."

그는 한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SF&판타지 도서관은 한국 사회에서 SF와 판타지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척박하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미국이나 일본에는 'SF 도서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많은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전문적인 SF 코너가 따로 있다. 대학에는 수많은 SF 강좌가 있으며 SF 작가 기념관도 있고 SF 창작 클럽이나 강연회도 자주 열린다. 반면, 한국에서는 서점은 고사하고 도서관에서조차 SF를 찾아보기 어렵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치가 없는 것에는 시간과 돈을 쓰지 않아요. 자기계발서는 가치가 있고 인문학도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SF나 판타지는 보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폄하하죠. 사람들이 돈을 쓰는 문화콘텐츠는 영화밖에 없습니다. 가치의 다양성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순수문학이란 말을 만들어 놓고 장르문학을 무시하거나 SF, 판타지를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화에 대한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미국 마블사의 영웅물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는 것도, 퀴어 축제에서 기독교인들이 성소수자들을 향해 비난을 쏟아내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맘껏 좋아하지 못하고 나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그 가치를 짓밟아버리는 문화. 그러고 보면 척박한 것은 SF와 판타지만이 아니다. 극장은 몇 개의 영화로 도배가 되고, 외국의 유명한 상을 탄 이후에야 소설은 팔려나간다. 그곳엔 기준점이 되어야 할 '나'가 없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쫓기듯 한 방향으로만 밀려가고 있다.

폼 나게 살다 
 
"SF나 장르문학을 즐기는 사람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고립감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SF나 장르문학을 즐기는 사람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고립감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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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잘 모르는 것들을 두려워해요. 먹방 프로그램이 유행하는 것도 내가 직접 찾아다니면서 모르는 걸 먹어보는 게 아니라 검증받은 걸 원하는 거고요. SF나 장르문학도 마찬가지죠. 한 번도 본적이 없고 그래서 잘 모르겠으니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거죠."

그럼 SF나 장르문학 분야가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을까요?

"가장 간단한 건 검증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마련하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접촉의 기회를 늘려주는 것이죠. 제가 'SF&판타지 도서관'를 만든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구요. SF나 장르문학을 즐기는 사람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고립감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SF와 장르문학의 성장에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마치 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의 성숙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향해 자꾸자꾸 커져만 갔다. 

"신자유주의 질서 아래선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사람들이 무서우면서도 거침없이 하는 게 있어요, 번지점프나 청룡열차 타는 거. 왜냐면 거기엔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이죠. 결국 사회가 그런 안전장치들을 만들어줘야 해요. 그런 세상이 오면 사람들이 여유롭게 상상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도 맘껏 누릴 수 있게 되겠죠.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은데 저 하나론 안 되니까 참여연대 같은 곳에 후원하는 거죠."

실패 때문에 사람이 굶어 죽는 일은 없어야 하기에, 또 인간의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기에, 너무도 당연하게 그는 '기본소득주의자'가 되었다. 현실이라는 바닥이 단단해야 마음껏 그곳을 딛고 창공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모험을 꿈꾸고 여전히 상상의 날개를 퍼덕이는 이들에게 기적과도 같았던 'SF&판타지 도서관'은 그러나 11월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재정적인 어려움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제가 하고 싶은 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을 새롭게 만들고 싶어요. 오가다 편하게 들릴 수 있는 찻집 같은 공간으로 다시 만들고 싶은 거죠. 처음 도서관을 만들 때도 내 서재를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던 건데 여기 와서 규모도 너무 커지고 결정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방향성이랑 멀어졌다는 느낌이에요.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로 옮겨야겠다는 마음도 있고요." 

그는 솔직히 힘들다고 했다. 도서관만 해도 1년에 2천만 원가량이 들어가고 시간강사의 벌이는 넉넉지 않다. 몇 년 전 결혼도 했고 집은 월세다. 그럼에도 그는 '폼 나게 살고 싶다.'

"사람들이 'SF&판타지 도서관'도 있네? 아, 이게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 거로구나.' 이런 생각을 했으면 해요. 누군가는 제게 얼마나 돈이 많길래 도서관을 차리느냐고 하는데 이런 게 허영이라면 전 허영이 그렇게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 자신과 내 삶이 좀 더 멋지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이 모자도 이 리본넥타이도 다 폼 나 보이려고 하는 겁니다."

미래로 띄우는 편지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둘로 나눈다. 이성과 감성, 진짜와 가짜, 현실과 상상. '합리적 이성'으로 요약되는 근대적 가치에 짓눌려 우리는 신화와 전설을 잃었고 마법과 요정들을 잃었으며 상상은 헛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과학기술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상상'이라는 헛소리에 기대고 있는지. 로켓을 만든 과학자들은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에 매료된 아이들이었고 인간형 로봇 '아시모'를 만든 이들은 만화 <아톰>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었다.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한국어에는 과거에 해당하는 '어제'나 '그저께'는 있지만 미래를 나타내는 고유어가 없다고. '내일'도, '미래'도 모두 한자어예요. 사람들이 여유가 없으면 앞날을 생각하지 못하고 상상이란 걸 못하죠. 사회가 성숙해져서 사람들이 다양한 것들에 관심을 가질 때, 현재만이 아니라 먼 훗날도 바라볼 여유가 생겼을 때 SF문학도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길을 나서는 내게 그가 별자리가 그려진 포스터 한 장과 엽서 두 장을 건넸다. 엽서에는, 책을 높이 쌓아 만든 탑 위에 소녀와 로봇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 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공간 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문득, 영화 <컨택트>의 한 장면이 스쳤다. 

"네 삶 너머에도 너의 이야기는 존재해."

그의 도서관 한쪽 벽에 테드 창②의 친필 사인이 걸려 있던 게 기억났다.  

①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외계인 조종사, 온몸이 털로 덥힌 게 특징임
② 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쓴 미국 소설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호모아줌마데스는 아카데미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백인보’ 코너에 인터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진 이한나. 녹취 조연우. 이 글은 <참여사회>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SF, #판타지, #스타워즈, #스타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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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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