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9월 30일 종영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 이유는 피날레를 장식한 의병과 태극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어 드라마 초반에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역사 속 잊혀가던 의병과 태극기를 재조명하면서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습니다. 태극기와 함께 이름 없는 의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가까이 있었으나 무관심으로 인해 미처 알지 못했던 의병의 이야기를 돌아볼 수 있는 구례의 의병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불원복 태극기
 
의병 활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고 전해지며 2008년 8월 12일 등록 문화재 제39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한 불원복 태극기 의병 활동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고 전해지며 2008년 8월 12일 등록 문화재 제39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관련사진보기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전사한 그의 아들 고인후의 12대 조손이 의병장 고광순입니다. 그는 구한말 1907년 연곡사 일대를 근거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습니다. 

불원복 태극기는 당시 고광순 의병장이 일본군과 싸울 때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니던 태극기로 '광복이 멀지 않았다'라는 뜻에서 '불원복(不遠復)'이라고 태극기에 써넣었습니다. 

그는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시켰습니다. 이때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연곡사에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과 순경들을 보내 공격하였고 1907년 10월 16일 화승총으로 맞서던 고광순과 의병들은 일본군에 의해 전멸당하고 연곡사는 불태워졌습니다.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의병장 고광순이 순국한 지 며칠이 지나서 우국지사 매천 황현 선생은 연곡사를 찾아 고광순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추모시를 남겼습니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마(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까마귀 떼만이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는구나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구례 사람들은 1958년 연곡사 서부도 근처 동백나무숲 아래에 의병장 고광순을 기리는 순절비를 세웠습니다.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 구례 연곡사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 임세웅

관련사진보기

 
'세독충정(世篤忠貞) - 나라를 위하여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친다'라는 글은 임진왜란 당시 금산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쓴 글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전주 침입을 막기 위한 웅치 전투 및 금산 전투, 그리고 이치 전투가 거의 동시에 벌어졌습니다. 웅치와 금산 전투에서 아군이 비록 패하였지만 이치 전투에서는 끝내 왜군을 격파함으로써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온 "임진년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을미년에 의병이 되죠. 을미년에 의병이었던 자의 자식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라는 대사처럼 임진년 의병의 후손이 이후 다시 을미의병, 을사의병이 된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듯, 의병 집안에 의병이 난다"라는 말처럼 대를 이어 나라에 충성을 바친 의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석주관 칠의사 전적지

호남 최고의 요새인 석주관성은 경남 하동과 전남 구례 경계 인근에 지리산을 끼고 섬진강변 가파른 산 능선에 세워진 고려 시대의 성곽입니다. 

석주관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군사전략상 매우 중시되었던 곳입니다.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랑치와 함께 호령 간 4대 관문의 하나로 고려 때부터 진을 설치하여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던 요새입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이 11월에 성을 쌓았고 구례 현감 이원춘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1593년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하동을 지나 남원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왕득인이 의병을 거느리고 지키다가 장렬히 순절하였고 11월에는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과 이 지방 출신의 선비들인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이 의병을 모아서 함께 지켰습니다. 

화엄사의 승병 153명과 양식을 지원받아 왜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으나 왕의성을 제외한 여러 의사들이 순절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싸운 의병장들을 석주관칠의사라 하며, 1804년(순조 4) 성터 옆에 사당을 세웠습니다.

정유전망의병추념비
 
칠의사묘역
▲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역
ⓒ 임세웅

관련사진보기

  
혈류성천 위벽위적
▲ 구례 석주관 혈류성천 위벽위적
ⓒ 임세웅

관련사진보기

  
위국응모(爲國應募) 나라를 위한 부름에 
 승려하택(僧侶何擇) 승려들인들 어찌 가리겠는가. 
 혈류성천(血流成川) 피가 흘러 강이 되니 
 위벽위적(爲碧爲赤)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 
 위주망신(爲主㤀身) 임금을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은 
 여대지직(輿儓之職) 신하 된 자의 직분이다. 
 편석추명(片石追銘) 돌조각에 옛일을 새기노니 
 천추불륵(千秋不泐) 천추에 길이 남으리라.

추념비 옆에 나란히 서있는 '전몰의병지위비' 뒷면에는 칠의사와 함께 처절하게 싸우다 순절한 이름 없는 의병과 승병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일반 의병 3500명, 승병 153명'라 적혀 있습니다.
 
구례 일반의병 3,500명 화엄사 승병 153명
▲ 구례 석주관 구례 일반의병 3,500명 화엄사 승병 153명
ⓒ 임세웅

관련사진보기

 
"피가 흘러 강이 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라고 하여 지어진 "혈천"을 순우리말로 풀어 낸 것이 "피내골(피아골)"입니다. 관군은 있으나마나 한 상태에서 의병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스님들도 살생을 금하는 계율을 어겨가며 왜적에 맞서 싸웠습니다.

수많은 이름 없는 의병이 숨져간 피아골의 가을 단풍이 그리도 핏빛으로 고운 것은 아마도 이 골짜기에서 수없이 죽어간 그들의 원혼이 피어났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연곡사 서쪽 동백나무숲에 외로이 서있는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와 섬진강변 가파른 언덕에 서있는 '정유전망의병추념비'는 구례 일대에서 항일 의병 투쟁을 벌인 구례의 이름 없는 의병들의 고귀한 정신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태그:#구례의병, #구례석주관, #구례칠의사, #의병장고광순순절비, #구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