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의 낭군님>.

<백일의 낭군님>. ⓒ tvN

  
tvN 사극 <백일의 낭군님>는 기우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가뭄을 극복하고자 나라에서 기우제를 지내봤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래서 왕세자 이율(도경수 분)은 천지만물의 막힌 데를 뚫어 비가 내리도록 하겠다며 미혼 백성들의 결혼을 장려했다. 그러던 중, 정변을 만나 평민 틈으로 숨어든 그가 홍심(남지현 분)이란 미혼녀와 우연히 만나 함께 살게 된다는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됐다.
 
종전의 사극들과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도 기우제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깔고 있다. 기우제에 대한 옛날 사람들의 관념을 미신처럼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기우제로 비를 내릴 수 있다고 옛날 사람들이 믿었을 거라는 관념이 드라마에서 표현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의 인류는 그 이전 인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혁명 이전 시대를, 비현실적 관념에 사로잡힌 미개한 시대로 치부하는 일이 많다. 옛날 문헌들에 나타난 비현실적 문구들을 토대로 그런 판단을 내리곤 한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의 눈에는, 오히려 현대인들이 훨씬 더 비현실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현대인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소설·영화·드라마·웹툰 등은 온갖 비현실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옛날 문헌 속의 비현실적 장면들을 뺨치는 것들이 우리 시대의 책과 동영상을 채우고 있다.
 
이것은 눈앞의 현실에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하는 인간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옛날 사람들보다 현대인들이 비현실적 상상을 더 많이 한다는 것은, 그 같은 인간의 특성이 점점 더 진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 소설 등에 나오는 비현실적 장면들을 근거로, 옛날 사람들의 머리가 현대인들의 머리와 크게 달랐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 지성의 척도 중 하나인 철학 발달이라는 면에서 볼 때, 인류는 지난 수천 년간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시대 사람들인 공자·맹자·노자·석가모니·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의 가르침을 아직도 밑줄 쳐가며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인들의 두뇌가 고대인들보다 우수하다고 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증표가 될 수 있다. 기우제를 지낸 옛날 사람들을 비웃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도 거기에 있다.
 
물론 정말로 비가 내렸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이 기우제를 지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기우제와 강우(降雨) 사이에서 직접적 인과관계를 찾은 것은 아니다. 신심(信心)에 과도하게 빠진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둘 사이의 직접적 인과관계를 믿지 않았다. 가뭄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에 하늘을 향해 막연히 빌어볼 수는 있었겠지만, 기도가 강우로 직접 연결되리라고 믿은 사람들은 지금이나 그때나 별로 없었다.
 
이 점을 보여주는 자료 중 하나가, 정조 임금의 지시로 측우기에 새겨진 글이다. <측우기명(測雨器銘)>이라 불리는 이 글은 한양·경기 일원에 가뭄이 극심했던 1782년에 작성됐으며, 30세 된 군주인 정조가 기우제를 지낸 이야기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측우기. 세종대왕 무덤인 영릉에서 찍은 사진. 경기도 여주시에 있다.

측우기. 세종대왕 무덤인 영릉에서 찍은 사진. 경기도 여주시에 있다. ⓒ 김종성

  
"금상(今上, 현직 주상) 6년 여름, 경기 지방에 큰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널리 지냈지만 영험한 응답이 골고루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리 성상(聖上, 거룩한 주상)께서 스스로를 책망하고 의견을 구하신 뒤 직접 기우단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일산(日傘)을 물리치시고 곤룡포와 면류관 차림으로 저녁이 지나서도 이슬을 맞으며 계셨습니다."
 
한여름에 임금이 양산도 없이 야외에서 온종일 기도를 올리는 것도 모자라 밤새도록 계속 이슬을 맞는 모습을 보고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임금은 하늘의 대리인이니 저렇게 하면 하늘이 감동해서 비를 내릴 거야! 이런 식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이날 도성의 남녀들이 우러러보며 감격했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이처럼 근심하고 애쓰시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지 않을 것인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비록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백성들이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비라도 맞는 모습 같았습니다."-<측우기명> 중에서.
 
백성들은 임금이 고난을 참으며 기우제를 지내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기우제가 강우로 직접 이어질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 아니라, 임금이 백성들을 위해 기우제를 지낸다는 사실 때문에 감동을 받았다.
 
농업경제 시대에는 가뭄의 극심함이 주식시장 폭락 같은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이를 방치하면 '주상 지지율'이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민심이반을 막는 길은, 군주가 기우제를 지내서라도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경기불황이 심각할 때 대통령이 작업복 차림으로 산업현장을 돌아보는 장면은 그 자체로 경기를 호전시키지는 못해도 국민들의 심리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기우제도 유사했다. 임금이 마술사처럼 비를 내리리라고 기대한 백성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기우제 뒤에도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면 군주의 체면이 깎일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작업복 입고 열심히 돌아다니는데도 경기불황이 날로 심각해지면 야당 대표가 "대통령의 현장 방문이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경기 호전에 도움도 되지 않는다"며 비판의 포문을 열 수도 있다. 옛날 군주들도 그런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에 대비해 군주들이 마련해놓은 장치가 있었다. 가급적, 군주 명의로 기우제를 열지 않는 것이었다. TV 사극에서는 군주가 기우제를 지내는 장면이 주류를 이루지만, 군주가 직접 나서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정조의 증조부인 숙종 이전만 해도 신하들이 기우제를 주관하는 경우가 주류를 이루었다.
 
위에 소개한 <측우기명>에 "경기 지방에 큰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널리 지냈지만 영험한 응답이 골고루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란 대목이 있었다. 그래서 정조가 직접 나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했다. 처음에는 신하들이 기우제를 주관하다가 막판에 정조가 나섰던 것이다. 기우제를 잘못 지냈다가 망신을 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한 또 다른 장치가 있었다. 임금 명의의 기우제를 거행해야 한다면 가급적 늦게 거행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비가 내릴 거니까, 가능하면 장마철에 임박해 기우제를 올리는 것이었다. 정조가 기우제를 지낸 시점도 음력으로 정조 6년 5월 22일, 양력으로 1782년 7월 2일이다. 장마철이 임박한 때였다. 
 
 정조의 초상화. 경기도 수원시의 화성행궁에 있다. 실물과 닮았다는 보장은 없다.

정조의 초상화. 경기도 수원시의 화성행궁에 있다. 실물과 닮았다는 보장은 없다. ⓒ 김종성

  
정조가 큰맘 먹고 기우제를 지냈지만, 하늘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모처럼 임금이 출동했는데도 하늘이 거들떠보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백성들은 감동했다. "성상께서 백성을 위해 이처럼 근심하고 애쓰시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지 않을 것인가!"라며 울먹이는 백성도 있었다.
 
정조가 이슬을 맞으며 밤을 샌 뒤에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까지도 하늘은 '무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오후부터 기적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기우제 다음날 오후에라도 비가 내렸으니 정조로서는 체면을 살린 셈이 된 것이다.
 
이때 정조는 비가 내렸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강우량을 발표하는 일에까지 세밀히 신경을 썼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조작'도 있었던 모양이다.
 
<측우기명>에 따르면 강우량이 1치 2푼이었다. 36밀리미터 정도 됐던 것이다. 이에 비해 정조 6년 5월 23일자(1782년 7월 3일자) <정조실록>에 따르면 1치 5푼 즉 45밀리미터 정도였다. 한편, 같은 날짜의 비서실 근무일지 즉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5푼 즉 15밀리미터에 불과했다.
 
객관적으로 정확한 강우량은 5푼이었다. 관상감의 측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조는 궁궐 측우기를 근거로 1치 2푼이라고 발표했다. <정조실록>에 나오는 1치 5푼이란 수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시됐다. 관상감의 측정을 무시하면서 정조가 내뱉은 한마디가 재미있다. 정조 6년 5월 24일자(1782년 7월 4일자)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승정원이 (대궐 안에) 측우기를 설치해둔 것은 정말 잘한 일이야!"
 
대궐 안에 측우기를 설치해두지 않았다면 관상감이 측정한 대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며 안도하는 정조의 표정이 읽혀진다. 측우기를 갖고 있었기에 관상감의 주장을 억누를 명분을 갖게 됐다면서 정조는 안도했다.
 
임금이 기우제를 지낸다고 해서 백성들이 곧바로 강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나라 경제를 책임진 군주로서는 이처럼 기우제라는 퍼포먼스를 벌여서라도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우제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거행됐다.
 
이런 옛 사람들의 고민이 오늘날의 사극에서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오늘날의 사극에서는 기우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마친 미신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옛날 사람들이 보면 서운해 할 일이다.
백일의 낭군님 기우제 측우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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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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