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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군 ‘문해 교실’ 수강생 유필순 할머니가 쓰고 그린 시화.
  영덕군 ‘문해 교실’ 수강생 유필순 할머니가 쓰고 그린 시화.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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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수백 수천 년 전 선현들의 말을 새삼 인용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세상의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행위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세상의 지식'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선 가장 먼저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문해(文解)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엔 한글을 읽고 쓸 수 없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얼마만한 어두움과 답답함의 공간일까? '문해'가 가능한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30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부산의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80대 할머니 한 분이 잊히질 않는다. "해운대로 가는 100번 버스가 오면 좀 알려 달라"는 부탁을 주위 사람들에게 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해운대' '100'이라 쓰인 버스가 와도 그걸 읽을 수 없는 심정, 평생을 문맹(文盲)으로 살아야 했던 그분의 고통을 누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전국의 지방자치단체가 어려운 시절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추진해온 '한글 교육'은 드물지 않게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곤 한다.

일흔 살 혹은, 여든 살이 되도록 읽고 쓰지 못했던 할머니들이 6개월~1년 남짓 한글을 배워 서툴게 쓴 짤막한 시와 수필이 젊은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것.
경상북도 영덕군도 지난 2015년부터 '성인 문해 교실'을 열어 한글 수업과 미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문해 교실'을 통해 올해까지 50명이 넘는 노인들이 '글을 모르고 살았던 평생의 한'을 풀었다. 이와 관련 영덕군청 교육지원 담당자는 "문해 교실 수강생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고, 교육생들의 만족도 또한 높다"고 말한다.

사람들 심금 울린 아흔두 살 유필순 할머니의 시

'문해 교실'이 해를 거듭할수록 코끝이 찡해지는 장면도 늘어나고 있다. 늦게 시작한 할머니들의 공부 열기로 강의실이 뜨거웠던 지난해. 6개월의 교육 일정을 마친 수강생 15명이 수료증을 받았다.

수강생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아흔두 살 유필순 할머니는 직접 쓰고 그린 시화(詩畫) 한 점을 사람들 앞에 내놓았다. 아래와 같은 글이었다.
글공부는 마음공부

글을 많이 배우고 싶다
남한테 안 빠지게 살고 싶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서
굽은 허리 유모차에 기대서
열 걸음 걷다가 쉬고
열 걸음 걷다가 쉬면서
글 배우러 온다
글 배워서 맘이라도 편하구로.

 

매끄럽고 유려한 문장은 아니지만, 유 할머니의 진심이 담긴 이 작품은 영덕문화예술회관에 걸려 방문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손수건을 꺼내 드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글공부 마음공부’라는 시화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 유필순 할머니.
  ‘글공부 마음공부’라는 시화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 유필순 할머니.
ⓒ 경북매일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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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에서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라고 일갈했다. "감언이설과 꾸민 얼굴로는 어진 덕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유필순 할머니의 글에서는 감언이설도, 꾸민 얼굴도 발견할 수 없다. 그 솔직함이 사람들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정을 자극했던 게 아닐까?

문해 교육을 마친 15명 할머니들은 "이젠 나도 이름 석 자를 쓸 수 있다. 서툴지만 간판과 이정표도 읽을 수 있어 혼자 힘으로 어디든 찾아갈 자신감도 생겼다. 손자들 보기에도 부끄럽지 않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배우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주름진 얼굴에선 환한 웃음꽃이 피었고.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 '100세 시대 맞춤교육'으로

올해도 영덕군 '문해 교실'은 수강생과 강사가 함께 기뻐할 경사를 맞았다. 어려서 못 배운 서러움과 뒤늦은 배움을 통해 찾은 즐거움이 행간마다 담긴 할머니들의 시화 작품이 경상북도를 넘어 전국 단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은 것.

이순애(80) 할머니는 '엄마의 세월'이라 이름 붙인 시화로 최근 서울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전국 성인 문해 교육 시화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이에 앞서 개최된 '2018년 경상북도 문해 대잔치' 시화전 부문에선 김일리(82) 할머니가 입선했다. '경상북도 문해 대잔치'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국제 문해의 날'(매년 9월 8일)을 기념해 마련한 행사였다.

영덕군청 관계자는 "경북 문해 대잔치엔 우리 군 수강생 30명도 참석했다. 이분들의 늦깎이 열정이 풍성한 결실을 맺은 것이기에 어르신들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고 행사 당일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오늘. 사람의 배움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향한 열정은 나이와 무관한 것이 아닐까. 그 믿음이 '문해'가 가능한 사람과 불가능한 사람 모두의 삶을 밀어 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태그:#문해, #문맹, #유필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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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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