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한 그는 천성이 부지런해서 차려주는 밥을 그냥 드시는 법이 없었다. 청소며 빨래, 김치 담그기, 화초 가꾸기, 쓰레기 분리수거까지 모든 집안일이 그의 손을 거쳤다. 94세가 된 나의 시아버지 이야기다.

24년 전, 그러니까 내가 결혼했을 때 시어머니는 허리디스크로 거동이 편치 않았고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그런 그녀를 보살피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하는 건 그에게 당연해 보였다. 그는 그녀를 끔찍이 아꼈다.
 
두 분이 먹는 밥상은 항상 정갈했다. 그가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밥상을 펴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두 분은 오래도록 식사를 했다. 그녀는 중풍으로 물을 마시다가도 자주 사레가 들리고 때때로 먹던 걸 흘렸다. 그는 그런 그녀가 밥상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도록 흘리면 닦아주는 건 물론 말도 함부로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녀라도 곁에 있으니 좋다고 오래오래 살라고 말을 건넨다. 그녀가 간암 말기 진단을 받고 대학병원에 치료받던 중, 더 이상의 치료가 무의미했을 무렵 그는 그녀를 집 근처 작은 병원으로 옮겼다. 그녀의 마지막을 중환자실에서 혼자 쓸쓸히 가게하고 싶지 않아서다. 벌써 17년 전이다.
 
나는 간호사다. 그래서 그는 나를 많이 의지했다. 2인실을 통째로 쓰며 그와 내가 그녀를 돌봤다. 삼십분 단위로 가래를 뽑아주지 않으면 금세 숨이 막혔다. 그녀는 하루에 7~8번 기저귀에 변을 봤고 밑이 헐어서 매번 대야에 물을 받아서 씻겨야했다. 위장까지 삽입된 관에 미음도 넣어주고 욕창이 생기지 않게 자세도 자주 바꿔줘야 했다. 사지가 굳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일생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안타까움, 좌절, 슬픔을 넘어서는 절절함이었다.
 
뇌경색에 걸린 아내 안느를 돌봐야 하는 남편 조르주
 
 영화 <아무르> 포스터

영화 <아무르> 포스터 ⓒ 티캐스트

 
영화 <아무르>(2012)는 평화롭게 지내던 80대 노부부에게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에 관한 이야기다. 음악가 부부인 남편 조르주와 아내 안느. 제자의 피아노 콘서트에 다녀온 후 조르주는 안느에게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안느는 뇌혈관이 막혔다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지만 오른쪽이 마비되고 만다.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온 안느는 조르주에게 다시는 자신을 병원으로 보내지 않을 것을 다짐 받는다. 뇌경색에 걸린 아내 안느를 돌봐야하는 남편 조르주.
 
일상이 무너졌다.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일은 보는 사람도 힘들다. 그 와중에도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조르주와 안느. 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져만 간다. 화장실에서 소리치는 안느. 그가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속옷을 올려준다. 수치심에 찬 그녀의 표정과 침착해 보이려 애쓰는 그의 허둥거리는 뒷모습.
 
어쩌다 한 번씩 들러 잔소리만 해대는 딸 에바(이자르 위페르)와 위로하러 잠시 방문한 제자도 그들에겐 외려 상처가 될 뿐이다. 그녀를 돌보느라 그는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이상해져가는 그녀의 행동에 혼란을 느끼며 그는 점점 고립되어 간다.
 
말도 어눌해지고 괄약근 조절이 안되는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소변을 보고 온몸이 흠뻑 젖는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때 느끼는 좌절은 그녀를 죽고 싶게 만든다. 어쩌면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 그녀에게는 해피엔딩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초점을 잃은 운동자. 데자뷔처럼 스치는 장면, 그날 그 병실에서 내가 봤던 내 시아버지의 눈빛.
 
죽기로 작정한 듯 음식을 거부한 아내 안느
 
 영화 <아무르> 스틸 컷

영화 <아무르> 스틸 컷 ⓒ 티캐스트


조르주역을 맡은 배우 장 루이 트린티냥은 고전명화 <남과 여>의 그 남자배우이고 안느역을 맡은 배우 엠마누엘 리바는 <히로시마 내 사랑>에 나왔던 그 여배우다. '명불허전'이란 말조차도 그들에게는 구태의연한 표현이다. 두 배우는 이 영화로 세자르상 남녀 주연상을 각각 수상했다.

안타깝게도 안느역의 에마누엘 리바는 작년에 별세해서 그녀의 작품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영화에 제자로 나와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 배우는 프랑스 출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이다. 첫 장면부터 알렉상드르는 첫 음만 들어도 심쿵한 슈베르트 즉흥곡을 연주한다. 이 곡과 쇼팽의 녹턴은 이 가을에 진리다.
 
하루하루 버티는 게 지옥 같은 안느는 죽기로 작정한 듯 음식을 거부한다. 그가 억지로 입을 벌려 물을 흘려 넣자 그녀는 이내 뿜어버린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때리고, 맞은 그녀도 때린 그도 당혹스럽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자신의 존엄을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그녀의 상처 입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혼자서 그녀를 감당하기 벅찬 그는 도우미 간호사를 부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간호사를 견딜 수 없어 해고한다. 그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는 간호사를 향해 그는 "언젠가 네가 환자한테 한 거랑 똑같은 대접을 받아도 전혀 자기를 보호할 수 없는 날이 올 거야"라는 가슴 아픈 대사를 날린다.

선진국으로 일컬어지는 프랑스 중산층 노부부조차도 삶이 이러할지니 정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고독하고 힘겨운 날들이 지나가던 어느 날, 알 수 없는 괴성을 질러대는 그녀를 그는 살해한다.
 
둘의 침실이었던 곳은 그녀의 관이 되었다
 
 영화 <아무르> 스틸 컷

영화 <아무르> 스틸 컷 ⓒ 티캐스트


둘의 침실이었던 곳은 그녀의 관이 되었다. 그는 그녀의 옷을 갈아입히고 꽃을 사다 주변에 뿌린다. 우연히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온 비둘기를 잡아 품에 안는 조르주. 살아있는 생명의 온기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참아왔던 울음이 목구멍을 타고 삐져나왔다.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할 만큼 했다고,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시어머니가 결국 돌아가신 그날, 그녀의 병을 더 일찍 발견하지 못해서 치료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그의 어깨를 안아주며 말했던 것처럼. 더 슬픈 건 그때는 그녀를 돌봐줄 그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를 돌봐줄 그녀가 없다는 사실. 오래 살아남은 자가 더 비참한 이유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어떤 개입도 하지 않은 채 죽음이라는 화두를 툭 던져놓는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냉혹한 현실과 이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감독은 예술가는 "사회의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영원히 소금을 발라대는 존재"라더니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확실히 예술가가 맞다. 평생을 사랑해온 아내를 죽였다. 그리고 제목을 '아무르(사랑)'이라고 떡하니 지어 놨다. 대체 어쩌라고. 사람 환장할 노릇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면 그의 행동이 사랑이 아니고 그 무엇이었겠는지, 다른 이름이 없다. 그는 이 영화로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여러 영화제를 휩쓸었다.
 
환상 속에 그녀를 따라 나서는 조르주(그의 죽음을 의미). 경찰이 왔다가고 모든 상황은 종료된다. 적막한 빈 집에 에바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카메라는 CCTV처럼 이 장면을 건조하게 비추고 그녀는 마치 다음차례 대기표를 손에 든 양 그와 그녀가 앉았던 거실의자에 앉는다.
 
영화가 끝나고 며칠을 앓았다. 그가 던진 화두가 명치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한꺼번에 보는 건 몸에 해롭다. 아주 가끔,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도저히 빠져나오기 힘들 때 그의 영화를 본다. 각각의 주제는 다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한순간 사로잡힌 생각에서 '탁' 놔질 때가 있다. 그의 영화 힘이다.
아무르 사랑 슈베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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