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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수타니파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018년 10월 1일 오전 9시, 네팔을 향해 집을 나섰다. 퇴직하고 48일 만에 설레임과 두려움을 가득 안고 떠나는 아침, 과연 'Never Ending Peace And Love'의 땅인 네팔에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이전기사 : 10월 1일 난 혼자 히말라야로 간다, 왜냐면]

이번 여행 일정은 홀로 배낭 메고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하고, 이어서 푼힐 전망대와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걸은 후에 포카라에서 일주일 정도 쉬었다 오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네팔 히말라야 트래킹 준비물
 네팔 히말라야 트래킹 준비물
ⓒ l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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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가는 버스는 내가 얼마전까지 근무했던 곳 바로 앞을 지나갔다. 만감이 교차했다.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 그곳, 매일 아침 출근하던 사무실, 때로는 보람을 느끼며 행복해했고 때로는 심한 스트레스에 절망하던 곳을 버스는 무심히 지나쳐 달렸다.

순간 과연 퇴직이 잘한 선택일까 하는 회의가 밀려왔다. 머리를 흔들며 미련을 떨쳐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나의 길을 무소의 뿔처럼 앞만 보고 가야 한다.

인천에서 네팔 수도 카트만두까지는 직항으로 7시간 정도 걸렸다. 비행기는 히말라야 설산을 꿈꾸는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늘 누군가와 함께 하다가 나이 60이 다 되어 혼자서 비행기 타고 외국에 나가는 상황에 겁이 났다. 이제 최소 한 달 이상은 혼자 낯선 곳에서 지내야 하는데 잘 할 수 있을까!

저녁 무렵에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했다. 마치 도시에서 시골 5일장에 간 것처럼, 공항은 아담하고 소박했다. 공항에서 비자를 받고 출국수속을 하고 배낭 찾고 약간의 돈을 환전 후 휴대폰 유심을 네팔 유심으로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택시를 타고 카트만두 시내를 달려 미리 예약해둔 한인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니 밤 8시 반, 네팔의 첫날은 이렇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혼자 비행기 타고 외국에, 그것도 히말라야라니
 
스와얌부나트 사원 부처의 눈
 스와얌부나트 사원 부처의 눈
ⓒ l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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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에 근처 스와얌부나트 사원을 둘러보았다.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된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이다. 많은 네팔인들이 정성을 다해 마니차를 돌리고 불공을 드린다. 나도 부처님에게 두손 모아 진심으로 이번 여행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빌어보았다.              

네팔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하기 위해서는 팀스와 퍼밑이라는 허가증이 필요하다. 카트만두 시내버스를 타고 네팔 관광청에 가서 허가증을 만들고, 시외버스 정류소를 찾아가 안나푸르나 라운딩의 출발지, 베시사하르 행 버스표를 예약하였다. 인구가 300만이 넘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는 참으로 복잡한 도시였다.

거리에 교통 신호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수도이지만 도로포장이 엉망이고 건기이어서인지 안개가 자욱히 낀 것처럼 먼지가 도시를 덮고 있었다. 한국 미세먼지는 정말 애교 수준이라고 봐야 할까! 이런 먼지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카투만두에서 로컬 버스를 타고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시작하는 베시사하르에 갔다. 현지 네팔인들이 가득한 버스는 구 대관령 길을 연상시키는 구불구불한 왕복 2차선 도로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다.  200km 정도의 거리를 정확히 12시간 걸려 아침 8시 반에 출발하여 저녁 8시 반에 도착했다.

트래킹 첫째날, 드디어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시작하였다. 안나푸르나 써킷이라고도 하는데, 쉽게 말해 지리산 둘레길처럼 총 138km의 안나푸르나 둘레길을 걷는 것이다. 트래킹은 예전부터 네팔인들이 이용하던 마을들 사이의 길을 걷는 것인데 지금은 많은 부분이 차가 다닐 수 있는 비포장도로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걷는 것이 아니고 보통은 짚차를 타고 어느 정도 올라가서 본격적인 트래킹을 시작한다.

나는 차메(해발 2670m)라는 곳까지 지프차를 타고 8시간을 갔다. 길은 비포장도로인데 정말 1970년대 시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다닐때 신작로에서 버스 타는 것을 연상시켰다. 아니 그 몇 배 더 쿵쾅거리면서 까마득한 길을 한없이 올라갔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도로에는 먼지가 자욱이 일고, 삼삼오오 배낭을 매고 올라가는 세계 각국에서 온 트래커들은 먼지를 피하느라 길 옆으로 비켜섰다.

도로 한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이고, 협곡에는 설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무섭게 소용돌이 치며 흘러갔다. 지프차 운전수는 수시로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기어 조작을 하고 떠들며 운전하는 모습에 처음에는 정말 조마조마하였다. 오후 5시가 다 되어 차메에 도착, 네팔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유명한 한인 롯지에 짐을 풀었다.

식당에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 있고 70대 한국 노인 두 분이 식사중이었다. 용감하게도 안나푸르나 라운딩과 푼힐,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트래킹하려고 오셨다고 했다. 젊은이도 힘든 곳을 그 연세에 오셨다니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었다.

아무도 없는 롯지에서 설산 보기
 
차메 가는 짚차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 깊은 계곡 사이에 있는 예쁜 마을
 차메 가는 짚차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 깊은 계곡 사이에 있는 예쁜 마을
ⓒ l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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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어제 저녁에 잠을 자다 두세번 깼다. 잠자기 전에 고산병 예방약을 먹었는데 자는 도중 머리가 아팠다. 단순 두통인지 고산병 전조인지 의심이 들었으나 아침에 말짱하여 다 잊어 버리고 기분 좋게 배낭을 메고 본격적인 트래킹을 시작하였다.

호주에서 혼자 온 청년을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걸었다. 유럽, 미국, 인도, 중국 등 세계 여러나라의 트래커들 사이에서 한국의 가을 날씨 같은 화창한 햇볕과 약간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은 참으로 즐거웠다. 12시쯤 듀크레포카리에 도착하여 점심으로 우리가 늘 먹는 밥에 해당하는 네팔 주식 달밧을 먹었다.

입맛이 없어 절반도 못먹었다. 원래 계획은 여기서 자는 것이었는데, 다들 어퍼 피상까지 간다고 하여 점심 먹고 다시 출발하였다. 천천히 걸었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낭(11.5kg)이 점점 무겁게 느껴지고 어깨가 아파왔다.

목적지인 어퍼 피상(해발3305미터)을 앞둔 30분 정도는 아주 가파른 오르막이어서 정말 힘들었다. 간신히 롯지의 방을 잡아놓고서 휴식을 취하였다. 롯지에서 멀리 보이는 안나푸르나를 처음 보았다. 다들 탄성을 질렀다. 정말 좋았다.
 
어퍼피상 롯지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어퍼피상 롯지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 L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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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째날, 어제 저녁은 고산증으로 많이 힘들었다. 약간의 두통, 호흡곤란, 구토감, 식욕이 없고 그냥 기분 나쁜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호주 청년도, 한국 노인들도 모두 힘들었다고 했다. 고산증의 무서움을 실감하였다. 이틀만에 3천 미터 정도 올라왔다. 한국에서 오는 날부터 무리한 강행군을 한 결과였다.

최소한 하루 정도는 차메나 듀크레 포카리에서 쉬었어야 했다. 아니면 어퍼피상에서라도 하루 더 머물러야 했다. 더우기 나는 저질 체력에 나이도 60에 가깝고, 포터도 쓰지 않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가니 더더욱 몸 상태에 유의해야 했다. 허나 아침이 되니 몸이 그런대로 회복된 느낌이어서 달밧을 먹고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길도 완만하고 숲속 길이어서 아주 즐겁게 걸었다. 안나푸르나가 계속 보여서 사진을 찍으며 걷는 길은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노르웨이에서 온 할머니와 아들을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서양인들은 부모와 자식이 함께 와서 친구처럼 다정하게 트래킹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길은 점점 경사져서 갸루(해발3375미터)를 앞에 두고 1시간 정도는 정말 70도 이상 되는 경사길이 이어졌다. 3천 미터 이상 고지대에서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은 미치고 환장할 만큼 힘들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호흡곤란과 구토가 나오는 고산증을 느껴 갸루에서 자고 가기로 하였다.

다들 점심 먹고 마낭까지 가는데, 나 홀로 방에 들어가 침낭 속에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안나푸르나를 오후 내내 보았다. 주인 할머니 외에 아무도 없는 롯지에서 누워서 평화로운 마음으로 몇 시간 동안 설산을 보는 것도 나름 참 좋았다.
 
침대에 누어 롯지 창 밖으로 안나푸르나를 보며 오후를 보냈다.
 침대에 누어 롯지 창 밖으로 안나푸르나를 보며 오후를 보냈다.
ⓒ L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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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날, 안나푸르나 라운딩 길에서 가장 큰 마을인 마낭(해발 3540미터)까지 걸었다. 멀리 안나푸르나 설산이 계속 보이고 완만한 길이어서 마음이 즐거웠다. 다만 이따금씩 지나가는 차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성가실 뿐이었다. 점심 먹으러 들른 식당에서 60대 한국인 부부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다.

먹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 하니 밑반찬중에서 깻잎을 선뜻 내주었다. 그래서 네팔와서 처음으로 달밧 한 그릇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정말 감사했다. 난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어서 중국이나 태국에서도 아무 음식이나 잘 먹었다. 당연히 네팔에 오면서도 음식 걱정을 하지 않고 밑반찬 하나 가져오지 않았다. 허나 이상하게도 네팔 음식은 나에게 맞지 않아 내내 고생을 하였다.

음식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위생적이지 않은 네팔에서 먹는 문제는 참으로 나를 힘들게 하였다. 난 네팔에서 주로 죽 비슷한 포리지라는 것을 먹으며 버텼다. 마낭은 가게도 많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소 적응을 위해 이삼일 머무는 사람도 많았다. 당연히 롯지 구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200루피, 우리 돈 2천원짜리 벽이 합판이고 바닥이 시멘트인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마낭가는 길, 조용한 숲속길을 걷는 걷이 참 좋았다
 마낭가는 길, 조용한 숲속길을 걷는 걷이 참 좋았다
ⓒ l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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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날, 마낭에서 쉬르가르카를 거쳐 틸리초베이스 캠프(해발 4150미터)까지 하루 종일 걸었다. 멀리서 안나푸르나는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고, 고산지대에서만 살 수 있다는 야크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나무와 풀은 점점 키가 작아지다 4천미터 무렵부터는 수목한계선인지 아예 모습을 감추고 흙과 모래, 바위뿐인 황량한 산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오전에는 걸을 만했는데 오후가 되니 배낭이 점차 무거워지고 발길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혼자인 것은 한없이 자유롭지만 또한 쓸쓸함이 가슴까지 차오르기조차 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인 듯싶었다.

엄청나게 깊은 협곡 위에 아슬아슬하게 난 길을 오후 내내  걸어 틸리초 베이스 캠프(해발 4150미터)에 도착했다. 안나푸르나에서 녹은 물이 고여 만들어진,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를 보기 위해서 온 사람들로 틸리초 베이스 캠프는 만원이었다 . 롯지가 세 개뿐이어서 겨우 도미토리에 방을 구했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야크들, 마냥 평화롭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야크들, 마냥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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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설산은 마냥 그자리에 있는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설산은 마냥 그자리에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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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초 베이스 캠프 가는 길
 틸리초 베이스 캠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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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설산을 보며 하루 종일 걷다
 히말라야 설산을 보며 하루 종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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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날, 아침을 네팔 죽으로 대신하고 틸리초 레이크(해발 4920미터)를 향해 긷기 시작했다. 히말라야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허나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어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정말 아쉬웠다. 예비 배터리를 준비 안 해서 롯지에서 충전을 하곤 했는데, 틸리초 배이스 캠프 롯지는 전기 사정이 열악하여 충전을 할 수가 없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설산의 장관,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그저 눈에 담고 가슴에 간직하고자 애쓸 뿐이었다. 길은 가파르게 끝없이 이어지고, 4천 미터가 넘는 곳의 오르막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다. 마음속으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중얼거리며 극한의 고통을 무릅쓰고 호수에 도착하였다.

하얀 설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파란 호수는 정말 아름다웠다. 백두산 천지가 그대로 옮겨온 듯한 광경에 넋을 잃고 한참을 호숫가에 앉아 있었다.

일곱째날, 틸리초 베이스 캠프에서 쉬르가르카로 다시 돌아왔다. 여기서 다시 라운딩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야크카르카를 거쳐 토롱라(해발 5416미터)를 넘어야 한다. 쉬르카르카에서 점심으로 삶은 달걀 한 조각을 입에 넣는데 울컥하고 구토가 나왔다. 그래서 과감히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나만의 삶, 나만의 하루하루를 살아야겠다

이렇게 음식을 못 먹고 혼자 배낭 메고 강행군을 하여 라운딩을 계속하는 것은 진짜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소증이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나는 먹는 것으로 나타나는 듯싶었다. 트래킹 내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구토가 나와서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에서 트래킹을 그치고 포카라로 가서 쉬자고 결정했다. 그래서 다시 마낭으로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여덟째날, 마낭에서 바로 지프차를 구해 베시사하르로 갔다. 이 길도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다음 날 포카라 가는 버스를 타고 점심 무렵에 레이크사이드에 도착했다. 한인 식당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모처럼 꿀 같은 휴식을 했다.

내가 이번 트래킹에서 깨달은 것은 두 가지이다. 먼저 나는 운명처럼 정해진 길을 묵묵히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자랑할 만한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럽게 살아온 것도 아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고,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자는 생각을 늘 지니고 살아왔다. 그러니 이제는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가자.

다음에 한 생각은 앞으로는 남의 등만 바라보고 죽어라 쫓아가지 말고 내 속도대로 걸어가자는 것이다. 이번 트래킹에서도 내 자신의 체력, 준비,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남들 속도에 맞춰 성급하게 쫓아가다 지쳐버렸다. 늘 나도 모르게 남들 사는 모습을 흉내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고 나만의 삶, 나만의 하루하루를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태그:#퇴직,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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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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