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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지 않았다면 우리 삶은 어땠을까? 다른 건 몰라도 직장인들은 저녁이면 혼마치니 신마치니 불리는 거리로 가서 한국말은 온데간데없고 일본어로 한잔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 문턱까지 갔던 게 사실인 듯하다. 해방 전 식민지 수탈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절 진고개길이었고 지금은 충무로인, 당시 혼마치로 불리는 거리 사진들을 보면 여기가 과연 우리나라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눈을 의심케 한다.

기모노를 입고 다니는 일본 여성들이 보일 뿐 아니라 도회화된 조선인들도 양장이나 양복을 입고 다닌다. 그 사이로 여전히 흰색의 한복을 입은 우리 선조들도 보인다. 적어도 해방이 되지 않았다면 '신마치(묵정동)-혼마치(충무로)-남대문로'길은 지금의 종로보다 더 서울의 중심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제시대 혼마찌(진고개길)과 2018년의 충무로 거리(1가 인근) 경술국치 이후 진고개길은 혼마찌로 바뀌었고 식민지 시절 내내 번화했다. 해방 직후 바로 혼마찌라는 이름은 충무로로 바뀌었다. 2018년 촬영한 진고개길 입구 충무로 1가는 아이러니하게 관광객의 거리가 되어 그시절의 분위기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 일제시대 혼마찌(진고개길)과 2018년의 충무로 거리(1가 인근) 경술국치 이후 진고개길은 혼마찌로 바뀌었고 식민지 시절 내내 번화했다. 해방 직후 바로 혼마찌라는 이름은 충무로로 바뀌었다. 2018년 촬영한 진고개길 입구 충무로 1가는 아이러니하게 관광객의 거리가 되어 그시절의 분위기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 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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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자국 거류민들의 상권 확대의 출발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진고개길(충무로)과 선은전 광장이라 불렸던 지금의 서울 중앙우체국 앞 분수광장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고 경술국치 이후 이곳의 북쪽인 지금의 시청 그리고 심지어 광화문까지 진출해 갔다.
 
1920년대 선은전광장의 모습 일제시대 금융가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한 선은전 광장은 일제의 조선수탈 중심지였다
▲ 1920년대 선은전광장의 모습 일제시대 금융가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한 선은전 광장은 일제의 조선수탈 중심지였다
ⓒ 인터넷 수집 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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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의 전차, 정말 진고개 풍경일까?

전차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자면 tvN의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진고개 거리 중앙으로 전차들이 오가는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심지어 진고개 가로등 점등식 당시에도 전차가 오고 간다. 아무래도 신문물이 넘쳐나는 격변기였던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데는 전차만 한 것도 없어서일 거다.

이 전차를 인정한다면 아마도 한성전기회사가 1899년부터 운영하던 용산선일 거다. 용산선은 종로에서 을지로 입구, 진고개 입구를 거쳐 남대문, 구용산으로 갔다. 그렇다면 <미스터 션샤인>의 극중 장면처럼 진고개 길 안쪽으로 전차가 다녔을까?
  
구한말  남산에서 명동성당 방향으로 바라본 한성 예장골 일본 공사관 아래로 밀집해 있는 일본식 가옥들이 보인다.
▲ 구한말 남산에서 명동성당 방향으로 바라본 한성 예장골 일본 공사관 아래로 밀집해 있는 일본식 가옥들이 보인다.
ⓒ 인터넷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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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개는 남산의 잠두봉에서 시작되어 북쪽 수포교 지점에서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냇물이 있었는데 그 냇물길의 중간 정도 현재의 세종호텔 뒤편에 있었던 고개를 일컫는다.

이 물길은 수량이 풍부하지 않은 건천이어서 깊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폭우로 수량이 늘면 남산에서 내려온 토사가 좌우로 퍼져 진고개 일대가 진흙탕이 되기 일 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말로 진흙 고개, 한자로 泥峴(이현)이라 불리다 진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1885년 일본의 곤도 대리공사가 조선정부로부터 명동성당 후문 또는 진고개 일대를 일본인 거류지역으로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다. 임진왜란 때 한성을 공격하는 왜군의 주둔지가 남산에 있었고 그곳이 왜성터라고 불렸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 일대를 거류 지역으로 정한 이유가 짐작이 된다.

이곳은 소위 말하는 남촌인데 남산골 샌님을 '딸깍발이'라고 부른 것이 샌님들이 신고 다니던 나막신 소리 때문이었다. 다만 짚신 살 돈도 없어서 나막신을 신었다는 설도 있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맨날 진흙탕을 다녀야 하기에 나막신을 신을 수밖에 없었다는 설도 있다. 북촌에 조선의 잘 나가는 양반들이 살았다면 이곳 남촌에는 샌님들이 살았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남촌의 주인공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진고개터 표석 진고개터 표석은 현재의 충무로 2가에 있는 세종호텔 뒤편 모서리에 세워져 있다.
▲ 진고개터 표석 진고개터 표석은 현재의 충무로 2가에 있는 세종호텔 뒤편 모서리에 세워져 있다.
ⓒ 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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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개 길(현 충무로)이란 현 한국은행 대각선에 있는 서울 중앙우체국 오른쪽 골목에서 세종호텔을 지나 현 충무4~5가 인쇄거리, 명보극장, 중구청 인근에 이르는 길이다. 구한말 초기 일본 거류민들은 공사 인부 정도였는데 이후 거류민들이 증가하면서 음식점에 각종 물건을 파는 상점 등 상업이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진흙 때문에 장사는 물론이거니와 거주마저 힘들 지경이어서 공사관이 주도를 해 상인들로부터 자금을 모금하여 진고개의 흙을 2.5미터 가량 파내어 고개의 높이를 낮추고 도로를 확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길 아래에 지름 1.5미터 정도의 하수관로를 파묻어 물을 흘려보냈다.

이로 인해 진고개의 고질적인 진흙탕 문제는 해결이 되자 일본인들은 진고개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황금정(현 을지로 4가), 동쪽으로는 신마치(현 묵정동, 소피텔엠버서드호텔 인근), 서쪽으로는 남대문까지 상권을 넓혀갔다. 남산 아래에 국한되어 있던 일본인들의 활동무대가 서울 주요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대 ‘경성유람안내도’ 검은색으로 표시된 도로가 진고개길(일제시대 혼마찌)이며 빨간색이 전차노선도인데 진고개길 안쪽으로는 전차길이 없다.
▲ 1920년대 ‘경성유람안내도’ 검은색으로 표시된 도로가 진고개길(일제시대 혼마찌)이며 빨간색이 전차노선도인데 진고개길 안쪽으로는 전차길이 없다.
ⓒ 인터넷 수집 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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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의 극중 시점이 1902년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03년이라면 결론적으로 진고개길 안쪽으로 다니는 전차는 없었다. 나중에 창경궁 오른쪽(현 창경궁로 중간)에서 남쪽으로 을지로 4가역을 지나 중구청 사거리에 이르는 본정선(本町線 또는 창경원선, 1910)이 생겼다. 경성관광유람도에선 중구청 쪽 종착점을 진고개 입구의 반대편 끝지점임에도 불구하고 본정(혼마찌)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이곳에 본정선이 들어온 것은 황금정 신마치가 혼마찌에 이어 일본인들의 중심가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별 전차 노선도를 확인해보면 진고개 길을 따라 운행된 전차노선은 결국 생기지 않았다. 이윤에 민감한 미국인들의 주도하에 진행된 전차 사업이 요금 때문에 대한제국 백성들의 구매 저항이 있을 것을 예상했다면 일본인 승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극중 시점에서 진고개를 가는 사람들이 하차를 해야 하는 곳은 어디일까?

일본의 조선수탈 중심지 '선은전 광장'

진고개를 전차로 가려면 하차를 해야 하는 곳은 현 한국은행(화폐박물관)과 서울중앙우체국, 신세계백화점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선은전(鮮銀前)광장'이다. 선은전 광장이란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 앞 광장이라는 뜻으로 식민지 시절 내내 센긴마에히로바라고 불렸다. 이곳에 내리면 진고개 입구 혹은 혼마찌 입구로 들어갈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 광장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903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발간된 '한국경성전도'를 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일제시대 ‘선은전 광장’과 1903년도 발행 ‘한국경성전도’ 분수광장인 일제시대 ‘선은전 광장’은 한성의 구조를 감안하면 상당히 넓게 잘 닦여진 거리였으며 경술국치 이전인 1903년도 모습은  ‘경성전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다음 그림 참조)
▲ 일제시대 ‘선은전 광장’과 1903년도 발행 ‘한국경성전도’ 분수광장인 일제시대 ‘선은전 광장’은 한성의 구조를 감안하면 상당히 넓게 잘 닦여진 거리였으며 경술국치 이전인 1903년도 모습은 ‘경성전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다음 그림 참조)
ⓒ 인터넷 수집 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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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전 광장 인근은 당시 그야말로 일본의 관청과 금융기관과 주요기업이 몰려 있거나 인접해 있었다. '한국경성전도'에 의하면 1903년 이곳에 조선은행(1912년 건축)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서울중앙우체국 자리엔 '일본거류민역소'와 '일본우편진신국'이 있었다. 그 건너편 신세계백화점 자리엔 '일본영사관'이 이었다.

광장의 규모는 당시 한성의 도시 구조를 감안하면 꽤 넓었으며 남대문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기에 전차 선로를 이곳으로 깔기에 좋았을 것이다. 남대문로는 종로 보신각(종로구 관철동 45번지)에서 시작해서 남대문(남창동 20-1번지)까지 1500여 미터 이어진다. 애초 조선 한양 천도 이후 경복궁 앞 주작대로가 세종로 사거리에서 종로길과 만나고 다시 종로길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졌지만, 이 길이 확장되고 활성화된 것은 일본의 조선 침탈 계획의 일환이었다.
 
1903년 당시 서울 중앙우체국 앞 ‘분수광장’ 인근 모습(경성전도 확대) 조선은행은 아직 지어지기 전으로 인근에 영사관, 거류민역소, 우편전신국, 경찰서 등이 집중되어 있다.
▲ 1903년 당시 서울 중앙우체국 앞 ‘분수광장’ 인근 모습(경성전도 확대) 조선은행은 아직 지어지기 전으로 인근에 영사관, 거류민역소, 우편전신국, 경찰서 등이 집중되어 있다.
ⓒ 인터넷 수집 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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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은전 광장에서 진고개 방면에 자리한 '일본거류민역소'와 '일본우편전신국'은 결국 일본인 거주인구 증가에 따른 편의시설이었다. 원래 일본인들은 한성 안에 거주할 수 없었다. 1880년 서대문 바깥, 지금의 금화초등학교(서대문구 천연동)자리에 있었던 천연정 청수관을 사용하던 일본 공사관에 40여 명이 기거한 것이 최초 거주자들이었다.

1년 뒤 일본 공사관은 임오군란으로 청수관이 불에 타자 성안으로 진출해 이종승 금위대장 집을 임시로 사용하다가 바로 박영효 대감의 집(현 천도교회관 옆) 자리에 공사관을 지었다. 이때 공사를 빌미로 일본인 인부 70여 명이 한성에 들어왔는데 이들은 기존 일본인들과 달리 민간인 거주자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일부 완공하여 사용 중이던 공사관 건물이 또 불에 타 버리자 일본정부는 조선정부에 생떼를 써 1885년 2월 일본인들의 성내 거주를 허락받게 되었다.
  
천연정터 표석 현재는 천연동 금화초등학교 앞 인도에 당시 천연정터였곳임을 알려주는 표석만 남아 있다.
▲ 천연정터 표석 현재는 천연동 금화초등학교 앞 인도에 당시 천연정터였곳임을 알려주는 표석만 남아 있다.
ⓒ 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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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 공사관이 남산 예장골에 있던 녹천정을 허물고 자리를 잡음으로써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남산 아래 명동성당 후문 앞에서 시작해 예장동, 주자동, 진고개, 진고개 입구(충무로 1가)까지 빠르게 확대되었고 인구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예장골은 조선시대 군사들의 무술 연습장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한양을 공격하기 위해 왜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녹천정은 철종이 세운 정자였는데 이때 일본에 의해 강제로 빼앗겨 허물어져 사라졌다.

일본인들은 임진란의 기억을 잊지 않고 그 곳을 중심으로 조선 수탈을 본격화해갔다. 남산의 일본공사관은 이후 통감부로 바뀌었고 통감부 인원이 늘어나면서 현재의 서울에니메이션센터 자리에 새로운 통감부 건물을 지었다. 기존 건물을 통감관저로 사용했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가끔 등장한 일본 공사의 사무실은 바로 녹천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남산의 소방 방재청 인근일 것이다.
 
남산 녹천정(예장골)에 자리 잡은 일본공사관(통감부) 1905년 을사늑약으로 공사관이 통감부로 바뀌었으며 1906년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초등학교였던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칭했다. 왼쪽 검은색 원안의 건물이 남산에 중턱에 있던 일본 공사관 건물이다. 오른쪽 사진은 1906년 당시 일본 천황 메이지의 생일(11월3일)인 ‘천장절’을 맞이하여 학생들을 동원하여 거행한 기념식 장면이다.
▲ 남산 녹천정(예장골)에 자리 잡은 일본공사관(통감부) 1905년 을사늑약으로 공사관이 통감부로 바뀌었으며 1906년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초등학교였던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칭했다. 왼쪽 검은색 원안의 건물이 남산에 중턱에 있던 일본 공사관 건물이다. 오른쪽 사진은 1906년 당시 일본 천황 메이지의 생일(11월3일)인 ‘천장절’을 맞이하여 학생들을 동원하여 거행한 기념식 장면이다.
ⓒ 인터넷수집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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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사관은 공사관 내에 있다가 1885년 현 남산 1호 터널에서 명동방향으로 내려와 만나는 사거리 우측 주자동 6번지, 즉 녹천정 자리의 일본 공사관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 거주자 관련 업무가 많았던 영사관은 진고개 일대 일본인 거주자가 늘어나자 1896년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 즉 진고개길 입구 건너편에 2층 양옥을 지어 이전하였으며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영사관은 경성이사청으로, 경술국치 후 경성부 청사로 사용되었으며 경성부 청사가 현 서울시청으로 신축해서 옮기자 그 자리에 미쓰코씨 백화점이 들어서게 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해방 후 미군정 시절 적산불하 과정에서 불하되어 백화점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경성이사청(이전 일본영사관)과 이후에 같은 자리에 세워진 미쓰코시 백화점 분수광장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2층 양옥의 일본 영사관건물은 경성이사청, 경성부 청사로 사용되다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1930년 일본의 ‘미쓰코시 백화점’이 세워졌다.
▲ 경성이사청(이전 일본영사관)과 이후에 같은 자리에 세워진 미쓰코시 백화점 분수광장 신세계 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2층 양옥의 일본 영사관건물은 경성이사청, 경성부 청사로 사용되다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1930년 일본의 ‘미쓰코시 백화점’이 세워졌다.
ⓒ 인터넷수집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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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거류민 역소'는 청일전쟁 이전까지 소공동, 서소문, 북창동 일대가 청국 상인들이 중심지였기에 청국 상공인 단체의 '중화회관' 건물이었지만 전쟁 패배로 한성에서 청국 상인들이 대거 철수하면서 진고개길에 초입 최고의 위치를 일본인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1903년 일본인 거류민 역소와 영사관이 진고개 입구에 있었다는 것은 일본인 거주의 중심지가 진고개 중간 명동성당 부근이 아니라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그 넓이 또한 엄청나게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고사흥 대감의 밀지와 모리 다카시의 전보

일본인들의 활동의 중심지가 된 진고개 입구 선은전 광장엔 1903년 당시 영사관과 거류민 역소 외 또 하나의 중요한 시설이 있었는데 바로 훗날 경성의 중앙 우체국 역할을 하는 '경성우편국'의 전신 '일본 우편전신국'이다. 당시엔 전화도 보급이 잘 안되어 있던 시절이라 우편과 전보는 조선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 정부기관이든 조선 땅에서 돈을 벌려는 일본 기업과 장사꾼들에겐 더 없이 중요했던 시설이었다.

 <미스터 선샤인> 13화에서 우국충절 고사홍 대감은 일제가 제일은행권으로 조선의 경제를 유린하고 물자를 수탈하고 있음에 개탄하여 전국의 뜻있는 유생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밀지를 발송하는데, 친일파 우체국 책임자가 가로채서 친일파 수장인 외부대신 이완익에게 넘긴다.

그리고 20화에는 조선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일본군 장교 모리 다카시가 조선의 정세와 반일 인사 및 항일의병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수집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유진초이가 한성 우체사의 전보 수발신 내역을 조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둘 다 한성의 우편시설에 관련된 이야기들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옥에 티이거나 허구의 정도가 좀 심하다.
 
2층으로 지어진 초기 ‘일본우편전신국’ 건물과 3층으로 지어진 ‘경성우편국’ 건물 ‘일본우편전신국’은 1900년에 현 분수광장이자 진고개 입구인 충무로 1가 일본거류민역소 뒤편에 지어졌고, 이후 1915년 거류민역소를 허물어 버리고 그 자리에 최신식 ‘경성우편국’ 건물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 2층 건물은 경성우편국 부속건물로 사용하였다.
▲ 2층으로 지어진 초기 ‘일본우편전신국’ 건물과 3층으로 지어진 ‘경성우편국’ 건물 ‘일본우편전신국’은 1900년에 현 분수광장이자 진고개 입구인 충무로 1가 일본거류민역소 뒤편에 지어졌고, 이후 1915년 거류민역소를 허물어 버리고 그 자리에 최신식 ‘경성우편국’ 건물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 2층 건물은 경성우편국 부속건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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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모리 다카시가 조선의 은밀한 정보를 전보를 통해 한성의 밀정들로부터 받았다면 한성의 대한제국 우체사가 아니라 일본 거류민 역소 뒤편에 있던 일본 우편전신국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일본 우편전신국은 일본인들이 본국이나 제물포항까지의 교신을 위하여 독자적으로 운영하던 시설이어서 대한제국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다카시나 밀정들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면 한성 우체사를 이용했을 리가 없다. 유진초이가 다카시의 밀정들을 찾고 싶었다면 구동매의 힘을 이용해 진고개 입구 '일본 우편전신국'을 조사했어야 말이 된다.
  
우편으로 발송된 고사홍 대감의 밀지 고사홍 대감의 밀지는 한성우체사의 소인이 찍혀져 발송되었다. 사진은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
▲ 우편으로 발송된 고사홍 대감의 밀지 고사홍 대감의 밀지는 한성우체사의 소인이 찍혀져 발송되었다. 사진은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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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사흥 대감의 밀지와 관련된 스토리는 무엇이 문제일까? 고사흥 대감의 밀지는 진고개의 일본 우편 전신국에서 붙인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우체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아마도 1895년에 우편업무를 시작한 종로구 세종로에 있던 한성우체사를 이용했을 것이다. 물론 외부대신 이완익이 주무르는 친일파 우체사 총판에 의해 밀지를 절취당하지만 이미 조선의 우편 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렇듯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우편이나 통신서비스는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침략의 걸림돌이었다.
 
한성우체사와 통신원 총판 민상호 대감 1895년 다시 우정사업을 시작하면서 처음 한성에 개설한 한성우체사 모습과 1900년 우정사업을 관장하는 통신원이 생기면서 총판을 맡은 민상호 대감(1898년 미국화가 휴버트보스가 그린 초상화)
▲ 한성우체사와 통신원 총판 민상호 대감 1895년 다시 우정사업을 시작하면서 처음 한성에 개설한 한성우체사 모습과 1900년 우정사업을 관장하는 통신원이 생기면서 총판을 맡은 민상호 대감(1898년 미국화가 휴버트보스가 그린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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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880년대 이미 자주적인 전신 및 우편 체제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1884년 우정총국을 두어 우편업무를 개시하려 했으나 12월4일 바로 그 우정총국 낙성식을 기해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1895년 다시 농상공부 산하에 우체사(농상공부 통신국 체신과)를 두어 본격적인 전국 규모의 우정사업을 시작했다. 1900년 3월 우정사업을 전담하는 통신원이 설립되었을 때 이미 전국에 38개의 우체사가 있었고 그 해에 만국우편연합에도 정식 가입을 했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친일파 이완익에게 붙어 고사홍 대감의 밀지를 불태우고 다시 변절하여 구동매에게 밀지 중 남아 있던 마지막 본을 전하는 '윤총판'이라는 자는 우체사 총판이 아니라 통신원의 총판이어야 맞다.

친절하게도 드라마에선 총판이 우체사의 최고 직위라는 자막까지 제공하고 있지만 이는 옥에 티다. 우정총국의 최고 책임자가 총판이었듯이 당시 총판은 통신원의 최고 책임자 관직이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보면 고사홍 대감의 밀지가 총판에 의해 친일파에게 넘겨지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스터 선샤인 윤총판과 한성우체국 실내 모습 극중에서 우체사의 최고 책임자로 표시되지만 당시는 통신원 책임자가 총판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구동매와 유진초이가 한성우체사에서 일본인 장교 모리 다카시와 관련된 전보수발신 내역을 조사하고 있다. 사진은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
▲ 미스터 선샤인 윤총판과 한성우체국 실내 모습 극중에서 우체사의 최고 책임자로 표시되지만 당시는 통신원 책임자가 총판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구동매와 유진초이가 한성우체사에서 일본인 장교 모리 다카시와 관련된 전보수발신 내역을 조사하고 있다. 사진은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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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한제국 내 우편전신 사업은 일본인들 외에도 조선인들과 대한제국 거주 외국인들까지 이용하게 함으로써 대한제국 우정사업의 국권확립을 방해하고 있었다. 급기야 1903년엔 대한제국의 통신원이 일본 우편전신국의 영업이 불법이라고 강력히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당시 실재 총판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반일 친미파 민상호 대감이었다. 이 사실을 기초로 극이 전개되었다면 고사홍 대감의 편지를 총판이 가로채 이완익에게 넘겨주는 스토리는 성립될 수가 없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반일성향이 강했던 민상호 대감 대신 스토리의 전개를 위해 친일파인 가상의 인물을 만든 것이다.

결국 대한제국의 통신원은 일본의 침략이 더욱 거세져 1905년 한일통신합동조약이 체결되고 12월 20일 통감부 통신관서제도가 발표되면서 통신관리국하의 우편소가 관장하게 되었지만 일제에게 통신권을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1906년 7월 통감부령에 의해 통신원은 완전 폐지되고 만다.

통신원이 폐지되면서 한성우체사를 흡수한 진고개 입구의 '일본우편전신국'은 1905년 이미 '경성우편국'으로 바뀌었고 그 해에 2층 양옥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1915년에는 이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3층에 벽면은 붉은색과 흰색 화강석으로 올리고 옥상은 돔형태를 취한 연면적 4400여 평방미터 새로운 우편국 건물이 완공되어 바로 옆 혼마치(진고개길)와 함께 일제시대 동안 일본인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그대로 사용되다가 1949년에 서울 중앙우체국 간판을 달았지만 한국전쟁 때 반파되었고, 휴전 후 반파된 건물을 복구하여 사용하다가 1957년에 완전히 허물어 3층짜리 새 우체국 건물을 세우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우정사업을 방해한 것은 결국 고사흥 대감의 밀지처럼 조선의 의병이나 항일 세력의 성장을 막기 위한 치밀함이었다.

아쉬운 역사의 순간, 구한말

갓 쓰고 도포 두르고 다니던 대한제국에서 고작해야 마차나 인력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시절에 전차의 도입은 일본의 교토와 도쿄 다음이었다. 전등이 점화된 것은 에디슨이 전구를 개발하고 8년 후였다니 꽤나 혁신적인 사건들이었다. 문호개방이라는 명목 하에 청나라와 더불어 서구열강의 이권 쟁탈전이 치열했던 조선에서 새로운 사업으로 부상하고 있던 전기서비스를 둘러싼 이야기는 그만큼 우여곡절로 가득 차 있다.

실제 전차를 도입하자마자 바로 어린아이가 치여 죽는 사고가 있었고 조선 인력거꾼들은 손님이 떨어져 불만이 엄청났다. 심지어 공중에 떠 있는 전선줄 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는 헛소문까지 나돌고 전차 운전수나 매표원들에 대한 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전차도입 초기 운전수였던 일본인들이 총을 소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고도 한다. 실제로 조선인들이 무서워 이들 일본 전차 운전수들이 모두 그만두는 바람에 한동안 전차 운행이 정지되기도 했다.

전차 사업의 주축세력은 미국 공사 알렌의 비호를 받고 있던 미국인들이었고 한동안 한성은 전차를 둘러싼 잡음과 반발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전차나 전등, 우정사업 등이 대한제국 정부의 초미의 관심사였고 그만큼 독자적인 근대화의 열망이 엄청났음에도 외세 침략에 전전긍긍하는 면만을 그려낸 것이 아쉽다.

당시는 아직 경술국치 이전이어서 식산흥업 정책을 펼쳐가고 있던 대한제국이 주도가 되어 전기사업이 도모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꿈을 망친 국가가 바로 일본과 미국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일본에 비해 미국을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국가로만 그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 외세에 의한 한국 독립의 파괴’(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 서울대 출판부, 2007)책 표지와 저자 캐롤 카메룬쇼(Carole Cameron Shwa, 72세)
▲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 외세에 의한 한국 독립의 파괴’(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 서울대 출판부, 2007)책 표지와 저자 캐롤 카메룬쇼(Carole Cameron Shwa, 72세)
ⓒ 캐롤카메론쇼,서울대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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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비분강개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한성전기를 둘러싼 이야기를 파다 보면 많은 의문이 든다. 과연 한성전기가 콜브란에게 줘야 할 돈이 그렇게 많았을까? 한성전기는 왜 적자였을까? 왜 조선인들에게 운영과 기술이 전수되지 않았을까?

신문물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를 직접 도입하거나 운영할 능력이 없어서 대한제국이 외세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당시 상황과 사건, 개입 인물들을 조사하다 보면 국가의 발전에서 신문물이 하게 될 역할과 이윤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한 막연히 미국이나 러시아와 관계를 잘 맺으면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거라는 미성숙한 외교 감각이 문제였던 것 같다. 실제로 2007년에 국내 출간된 미국 재야 사학자 캐롤 카메룬쇼(Carole Cameron Shwa, 72세)의 <외세에 의한 한국 독립의 파괴>(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 서울대 출판부)에 의하면 경술국치 이전 이미 미국은 한반도의 일제 강점을 묵인했었다고 한다.

심지어 1904년 러일 전쟁을 앞두고는 당시 미국 대통령인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일본은 철강회사 카네기, 제피모건 등 미국 대기업으로부터 7억 엔(현재 가치 14조 원)에 달하는 전쟁차관을 조달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하는 일까지 나중에 벌어졌지만 적어도 미국은 일본의 전세계를 상대로 한 식민지 전쟁을 지원한 셈이었다.

후세에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서병달 주사 같은 분이 이 전체를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물 운영의 주도권을 외세에 넘겨 줄 수 없다는 순수한 그의 애국심은 이후 항일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간접자본과 같은 기간산업은 국가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깨우침도 주었을 것이다. 

뜨거웠던 화제의 드라마를 보면서 그 시대의 우리 선조들의 삶의 고뇌와 아픈 경험을 다시금 새겨보게 된다. 매천 황현 선생이 그 긴 세월동안 손수 그 시대를 기록하고 남긴 것도 당대 사람들보다 후대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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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한전국기통신 100년사>, 1984년 전기통신공사
2. <한국근대 전기산업의 발전과 경성전기(주)>, 오진석, 2006년
3. <대한제국의 전기사업-한성전기회사를 중심으로>, 김연희
4. <관광안내로 본 근대 도시 경성 -1920~30년대 도해 이미지를 중심으로>, 김선정, 2017년
5. <도시 '본정통'의 장소 기억 -충무로·명동 일대의 사례>, 전종한, 2013년
6. 전우용의 서울탐사 블로그-센긴마에히로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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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