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트> 포스터.

영화 <미스트> 포스터. ⓒ 청어람

 
영화 <미스트>를 보고 학창 시절, 피구게임이 생각났다. 피구게임은 네모난 틀 안에 사람들을 밀어 넣은 뒤, 공으로 맞춰 밖으로 내보내는 게임이다. 분필로 그은 선을 기준으로 안과 바깥의 경계를 만들고, 안에선 언제 공에 맞을까 긴장하게 한다. 반대로 밖으로 나가게 된 사람들은 다시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참 잔인한 게임이 아니었나 싶다.

괴물이 나타난 세상, 마트 안은 안전할까?

<미스트>에서도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가 등장한다. 그것은 마트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마트 안에서 평소처럼 장을 보고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는다.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던 차, 한 중년 남성이 코피를 흘리며 헐레벌떡 들어온다. 그 남자가 하는 말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것. "바깥에 무시무시한 것이 버티고 있으니 마트 문을 닫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술렁인다. 하지만 남자의 말을 헛소리라 여긴 젊은 남자가 뛰쳐나간다. 그 후 그는 안개 속으로 비명과 함께 사라진다. 또한 한 중년 여자는 자신의 아이들이 집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서 나갈 생각을 못 하고 있지만 그녀는 용기 있게 나간다. 그 여자의 행보는 영화 초반부엔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 데이빗 드레이턴(배우 토마스 제인)은 아들 빌과 함께 장을 보러 왔다가 소란에 휩싸인다. 그는 원인이 무엇인지 파헤치려 이곳 저곳을 살핀다. 마트 발전기 쪽에 문제가 있어 살피러 간 중에 하역장 문 쪽에서 뭉뚝한 촉수(커다란 문어 같기도 하다)가 뻗쳐 들어온 것을 보게 된다. 그를 따라 하역장 쪽으로 들어온 몇 사람도 그 광경을 목격하고 마트에서 일하던 젊은 남자는 촉수에 맞아 죽는다.

촉수 괴물을 물리치려 한바탕 소동을 벌인 그들은 다시 마트 중앙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동요하지만 동시에 그들 말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엔 다수의 의심을 왜곡된 방향으로 만들어 버리는 인물 카모디 부인(배우 마샤 게이 하든)이 있다. 그녀는 사이비 교주처럼 사람들을 선동하고 실제 촉수 괴물이 마트를 비집고 들어온 이후에도 사람들을 현혹시켜 괴물이 아닌 사람들끼리 싸우게 만든다. 

마트는 어느새 '안'과 '바깥'의 경계를 나눈다. 마트 안에선 사람들이 저들끼리 모함을 하고 편을 나눈다. 이런 괴물을 탄생하게 한 것으로 의심받던 한 사람(그가 원인이라고는 밝혀진 것도 아니었다)을 여럿이서 공격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촉수 괴물이 있는 바깥으로 퇴출 당하고 잔인하게 죽음을 맞는다. 이런 장면은 공에 맞은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피구 게임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 잔인함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의 원작자 스티븐 킹과 영화 연출자 프랭크 다라본트는 인간 사회의 이러한 지점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인간이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면 선한 마음이나 예리한 사고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 그저 서로를 헐뜯고 의심하고 누군가를 제물로 받쳐 내모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는 것. 

마트 안의 사람들, 왜 서로를 의심하고 헐뜯을까
 
 영화 <미스트>의 한 장면.

영화 <미스트>의 한 장면. ⓒ 청어람

 
영화 시간은 120분. 그 시간 동안 마트를 기준으로 안과 바깥은 극명한 대비를 띠는 것 같지만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 바깥에는 촉수괴물이라 불리는 괴생명체가 사람들을 물어뜯지만 마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저들끼리 물어뜯는다. 어떤 곳도 안전하지 않다. 모두 자신의 목숨을 지키겠다는 목적은 같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까진 너무나 많은 장벽이 존재한다. 

영화는 대부분 마트 안의 장면을 보여준다. 다수가 있어서다. 하지만 다수여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오류가 있다. 마트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분열한다. 미지의 생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계속해서 서로 간의 의심을 키운다. 심지어 사건 이전에 사적인 일로 느꼈던 반감을, 사활을 건 상황에까지 끌어들여 상대를 끝까지 의심할 명분을 만든다. 이때 눈앞에 있는 상대는 바깥에 있는 촉수괴물이나 다름없다. 

물론 그런 의심을 돋우고 편을 가르도록 조장하는 카모디 부인이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 인물에게 동감한다. 더 이상 주체를 가지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욕구를 갖지 못하고 그녀에게 마트 안의 세계를 맡긴다. 안전해보이던 마트 안의 분열은 다수의 의심과 분노, 편 가르기로 발생한다. 

결국 군중의 두려움을 빌미로 의심을 조장한 카모디는 총에 맞아 사살된다. 이제 마트 안의 세계가 다시금 안정을 되찾나 싶었다. 하지만 주인공 데이빗은 아들 빌리와 일행 몇 명을 데리고 안의 세계를 탈출한다. 며칠 동안 마트 안의 세계에서 살을 부대끼고 살아 보니 어느 곳도 안전한 장소는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안이든 바깥이든, 안이라서 다행이고 바깥이라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떤 사고를 하고 어떻게 삶을 바꾸려는 마음이 있는지가 상황을 결정한다. 데이빗은 그나마 가장 이성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인물이었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현실에서라면 쉽게 찾을 수 없지만 영화 속에선 너무나 당연하게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다.) 

관객은 데이빗의 행동에 안도감을 느끼고 데이빗과 일행을 심정적으로 응원하게 된다. 바깥의 세계가 어쩐지 다행스럽게 풀릴 것 같은 기대를 품게 된다. 즉, 영화가 안전하게 끝날 것만 같다. 바깥은 여전히 미스트(안개)로 자욱했지만, 언제 공에 맞아 죽게 될지 모르는 안의 두려움보단 나을 것 같다. 안이든 밖이든 게임은 끝나지 않았고, 어느 쪽이든 두려울 바엔 스스로 공을 맞고 바깥으로 가서 모든 룰 밖으로 탈출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 또한 데이빗을 응원했고 영화가 막바지로 치닫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이빗을 제외한 일행은 모두 죽었다. 안개는 서서히 걷혔고 군인들이 와서 몰락한 세상을 복구한다.

차를 타고 탈출하던 데이빗 일행은 집 밖에서 죽어있는 아내를 발견한다. 데이빗은 삶의 의욕이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차에 기름도 떨어진 상태, 일행들은 모두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눈빛을 나눈다. 이들은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데이빗은 장전된 총으로 나머지 4명을 쏜다. 총알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고 데이빗은 괴물에게 물려 죽기 위해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나와 보니 이미 괴물은 사라진 상태였다.

게임이 끝나고 안도 바깥도 의미 없는 세상이 되어서, 어느 쪽이든 안전하게 된다. 게임이 끝나가는 줄 모르고 계속해서 도망가려 했던 데이빗 일행은 어이없게 죽음을 맞이한다.

안과 바깥은 우리가 만든 굴레에 불과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밖으로 나가 괴물들과 싸우고 죽기살기로 도망쳤다면 오히려 더 많은 인원이 살았을 수도 있다. 바깥이 두려워 안에서 끙끙 싸매다가 저들끼리 사람을 죽이고, 그나마 탈출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게임은 끝나 모든 것이 허무하게 된 상황이라니.

가장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행동한 데이빗이 모든 것을 체념해 일행을 죽이고 결국 혼자 살아남은 결말은 안타깝다. 게임은 끝났고, 먼저 게임을 거부하고 떠나 살아남은 여자를 보게 되는 것은 황당했다.

안과 밖의 경계, 결국은 허상에 불과했다
 
 영화 <미스트>의 한 장면.

영화 <미스트>의 한 장면. ⓒ 청어람

 
원작자와 감독은 다음으로 이런 아이러니를 주목한다. 인간을 공격한 것은 괴생물체였지만 사실 더 많은 인간을 죽인 건 인간이었다. 모두가 이성적인 사고를 내팽개치고 두려움에 떤 결과 서로를 죽이고 헐뜯는 상황에 처했다. 동시에 이성적인 사고를 챙기고 가장 적절한 때에 탈출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극중 데이빗) 또한 마지막에 가서는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현실처럼 와닿았다.

현실은 대본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우린 통쾌함을 바라지만 더 답답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무언가에 기대를 하지만 더 실망스러운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더 나빠질 것을 염려하지만 생각보다 상황이 좋을 수도 있다. 누군가를 의심하지만 상대는 나쁜 의도가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만드는 건 결국 우리 생각에 있다. 그 생각에 동력을 넣는 건 아마,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좀 더 살고 싶고 좀 더 낫게 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그리고 그 욕망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우린 아이러니한 삶을 산다. 

주인공 데이빗처럼 어이없는 일행 몰살과 자결을 택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데이빗도 결국 자살을 한 뒤 관객들에게만, 안개가 걷히고 처음 뛰쳐나간 여자가 살아남은 장면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싶다. 데이빗이 허망하고 황당한 감정을 연기하는 것을 직접 보지 않고, 관객들만 더 답답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느꼈다면 그 무게가 더했을 것 같다.

안과 바깥은 허상에 불과했고 그것을 가르던 안개가 걷히며 세상은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영화가 시작될 때, "자 이제 게임 시작" 구령을 외치고 그 안에서 저들끼리 싸우는 인간을 보던 신이 있던 건 아닐까. 신은 세상에 안개를 내리고 인간들끼리 부대끼는 모습을 관망한 것일 수도 있다.

영화를 본 뒤 피구가 왜 잔인한 게임인지 더 생각해 보았다. 분필 가루로 그어 놓은 선 때문이 아니라, 그 선을 너무나 명확히 그리려는 욕구 때문인 것 같다. 가장 잔인한 건, 그 선이 아무 의미 없었고 안개처럼 사라져, 사라진 자리를 보게 되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공으로 나를 맞췄던 아이와, 내게 맞았던 아이가 다시 웃으며 모래를 털어야 하는 것. 그렇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허무함을 깨닫게 된다.
영화 미스트 스티븐킹 프랭크다라본트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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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기사와 문학 그리고 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의 부족한 생각과 관찰을 통해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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