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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석유 등 화석연료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미세먼지 오염, 그리고 후쿠시마 참사가 보여준 원전재난의 가능성은 '더 이상 위험한 에너지에 기댈 수 없다'는 깨달음을 확산시키고 있다. 지난해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중단으로 본격화한 탈핵 논쟁은 우리 사회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에너지체제를 전환할 수 있을 것인지 가늠할 시험대가 되고 있다. <단비뉴스>는 기후변화와 원전사고의 재앙을 막고 '안전하며 지속가능한 에너지구조'를 만들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모색하는 심층기획을 연재한다. - 기자 말

독일 동부 브란덴부르크주 트로이엔브리첸시에 있는 펠트하임(Feldheim)은 주민 수가 130명 남짓인 농촌이다. 통일 전 동독 지역이었던 이 마을은 수도 베를린에서 자동차로 약 두 시간이 걸리는 시골인데도 세계 각지에서 방문객이 꽤 찾아온다. 주민들이 쓰는 모든 전기와 난방을 태양광·풍력·바이오연료 등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는 '에너지전환(에네르기벤데) 모범마을'이기 때문이다.

돼지와 양, 옥수수와 밀을 키워 생계를 꾸려온 이 마을에는 현재 55개의 풍력발전기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여기서 연간 250기가와트시(GWh)의 전기를 만든다. 옛 군용부지에 조성한 태양광단지에서는 연간 2.75GWh의 전력을 생산한다.

또 농가의 돼지분뇨에서 바이오가스를 추출하고 이것으로 열병합발전기(CHP)를 돌려서 연간 4.15GWh의 전기를 얻는다. 1GWh는 4인 가족 기준으로 300가구가 1년 동안 쓸 수 있는 전력량으로, 이 마을에서 생산한 전기는 1퍼센트(%) 정도만 주민들이 쓰고 나머지는 판매된다. 마을 사람들은 또 폐목재에서 나온 우드칩을 태우는 바이오매스 시설과 열병합발전소에서 얻은 열에너지로 난방과 온수를 쓴다.

쓰고 남는 전기 팔아 농가소득 보전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트로이엔브리첸시 펠트하임 마을의 태양광단지. 과거 군용부지였던 45만제곱미터(㎡), 축구장 약 60개 규모의 초지에 태양광 모듈 1만여개를 설치했다. 주민들이 방목하는 양떼가 태양광 패널 아래를 오가며 풀을 뜯고 있다.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트로이엔브리첸시 펠트하임 마을의 태양광단지. 과거 군용부지였던 45만제곱미터(㎡), 축구장 약 60개 규모의 초지에 태양광 모듈 1만여개를 설치했다. 주민들이 방목하는 양떼가 태양광 패널 아래를 오가며 풀을 뜯고 있다.
ⓒ 펠트하임 신에너지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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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쓰고 남은 전기는 '에네르기크엘러(Energiequelle)'라는 지역에너지 회사를 거쳐 독일 내 다른 도시에 판매된다. 지역에너지 회사는 판매 수익을 마을 주민과 나눈다. 주민들은 풍력·태양광 발전시설 부지 임대료도 받는다. 이를 통해 주민들이 얻는 수익은 평균적인 독일 가정이 내는 연간 전력요금(2014년 기준 978유로·약 128만원)의 절반 수준이다.

일부 주민은 지역에너지 회사에 고용돼 태양광설비를 점검하는 등의 일을 맡고 있다. 옛 동독 지역은 통일 후 한때 30%까지 치솟은 실업률로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일자리 사정이 나쁜 편이지만, 이 마을은 펠트하임 재생에너지사업 덕에 실업률 0%를 자랑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난 1994년 주민과 지자체·에너지회사·중앙정부·유럽연합(EU)이 자금을 분담해서 시작했다.

지난 7월 독일 연방경제에너지부(BMWi) 초청으로 펠트하임을 방문했던 권필석(44) 녹색에너지전략연구소 부소장은 지난달 10일 <단비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재생에너지로 마을에서 쓰는 에너지를 모두 충당하고, 이익까지 얻을 수 있으니 주민들의 만족도가 높더라"고 전했다. 그는 "독일의 재생에너지 전환은 정부의 꾸준한 정책 지원과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미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녹색에너지전략연구소는 2009년 설립된 신재생에너지 전문 비영리 연구기관이다.

30여년 꾸준히 추진해온 '에네르기벤데'

독일에는 펠트하임처럼 '에너지 자립'과 '소득 보전' '일자리 창출'에 두루 성공한 마을의 사례가 많다. 이런 마을과 도시들이 모여 독일은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에너지전환을 이루고 있다. 석탄과 석유를 줄이는 '탈화석연료', 핵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하는 '탈원전'을 동시에 추진하면서 산업경쟁력도 세계 최강수준으로 유지하는 나라로서 각국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독일은 가동 중인 원자력발전소를 오는 2022년까지 모두 폐쇄하는 탈핵일정을 지난 2011년 이후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또 2050년까지 생산 전력의 80%를 재생에너지원에서 얻는다는 목표로 석유와 석탄 등 화석연료 발전을 줄여가는 중이다.

오는 2030년까지 1990년도 탄소배출량 대비 55%를 감축하기로 하는 등 기후변화대응에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 그러면서도 미국, 중국, 일본에 이은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자 4차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기술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탄탄히 하고 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탈원전을 확정한 2011년 이후 6년간 독일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47%로, EU 평균 1.38%를 웃돌았다.
 
독일은 신축건물의 재생에너지 활용 및 에너지 효율화를 의무화하고, 공공기관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수도 베를린에 있는 연방의회 의사당은 1999년 재건축을 계기로 지붕의 유리 돔과 거울 기둥을 통해 자연채광 효과를 극대화하고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전력 수요의 상당 부분을 충당하고 있다.
 독일은 신축건물의 재생에너지 활용 및 에너지 효율화를 의무화하고, 공공기관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수도 베를린에 있는 연방의회 의사당은 1999년 재건축을 계기로 지붕의 유리 돔과 거울 기둥을 통해 자연채광 효과를 극대화하고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전력 수요의 상당 부분을 충당하고 있다.
ⓒ 제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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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독일 에너지전환의 뿌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체 전력의 80%를 석탄과 석유 등 화석연료에서 얻었다. 하지만 1970년대 두 차례의 세계적 석유파동으로 충격을 받은 후 '에너지원 다양화' '에너지 효율화'를 고민하게 됐다.

화석연료의 대안으로 원자력발전이 부상했지만 방사능의 위험성과 핵산업의 비민주적 의사결정에 불안을 느낀 시민들이 1970년대 중반부터 격렬한 반핵운동에 나섰다. 여기에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터지자 '원전 역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사회 저변에 자리를 잡았다. 체르노빌 사고 후 독일에서는 신규 원전 건설이 추진되지 않았다.

1990년대 기후변화의 위협이 세계적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독일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에너지정책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주된 방향은 화석연료와 원자력을 규제하고 재생에너지에는 경제적 유인(인센티브)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독일 정부는 1991년 세계 최초로 재생에너지 판매가격을 보장하는 발전차액지원제도(FIT)를 도입했다. 또 화석연료·원자력보다 재생에너지를 우선 이용하도록 하는 규제를 만들었다.

1998년에는 전력시장 자유화로 발전(생산)과 송·배전(공급) 업무를 분리해 민간에 개방했다. 전기를 생산하고 전송, 판매해 공급하는 과정을 특정 회사가 독점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전력 도·소매 시장에서 경쟁을 촉진한 것이다. 같은 해 집권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사회민주당(SPD)-녹색당 연정은 1999년 화석연료로 발전한 전기와 휘발유에 환경세를 도입했고, 2000년에는 기념비적인 재생에너지법(EEG)을 제정했다. 이 법은 재생에너지 생산자가 향후 20년간 킬로와트시(kWh)당 고정된 가격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으로, 관련 산업 발전에 기폭제가 됐다.

원전의 경우 사민당-녹색당 연정이 '2022년 무렵까지 100% 탈원전에 도달한다'는 합의를 이뤘으나 2005년 사민당과 대연정을 통해 집권한 기독민주당(CDU)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2010년 자민당(FDP)으로 연정 파트너를 바꾼 뒤 이 기조가 흔들렸다. 에너지 공급의 안정성과 탈원전에 따른 재정 부담 등을 이유로 원전 가동기간을 2036년까지 연장하는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독일 정부는 정계·학계·산업계·종교계·시민사회 대표로 '안전한 에너지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를 구성했고, '끝장토론' 등을 거쳐 '2022년까지 모든 원전 폐쇄'를 확정했다. 2011년 당시 남아 있던 원자로 17기 중 10기가 지난해까지 폐쇄됐다.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나고 2주 후인 2011년 3월 26일 독일 시민들이 수도 베를린에서 원전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당시 베를린 외에도 함부르크, 쾰른, 뮌헨 등 주요 도시에서 약 25만명이 거리로 나와 ‘중단 없는 탈원전’을 촉구했다.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나고 2주 후인 2011년 3월 26일 독일 시민들이 수도 베를린에서 원전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당시 베를린 외에도 함부르크, 쾰른, 뮌헨 등 주요 도시에서 약 25만명이 거리로 나와 ‘중단 없는 탈원전’을 촉구했다.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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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슈머'가 이끄는 에너지 민주주의

독일이 '탈화석연료'와 '탈원전'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전환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게 된 원동력의 하나는 지역자치와 민주주의 전통에 뿌리를 둔 '분산 협력'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석연료·원자력 등 대규모 발전소를 필요로 하는 에너지원보다 소규모 분산배치가 쉬운 재생에너지 시설의 특성상 국가 단위로 이루어지던 에너지 생산·공급 시스템이 지역 단위로 원활하게 나누어졌다.

독일 재생에너지기구(AEE)에 따르면 2001년 66개에 불과하던 지역에너지협동조합이 2015년 1000개로 급증했다. 독일의 시장조사기관 '트렌드리서치'에 따르면 2016년 현재 독일 전체 재생에너지 시설 중 42%가 지역에너지협동조합·농민·일반가정 등 시민 소유다. 독일의 4대 메이저 발전회사(E.ON, RWE, Vattenfall, EnBW) 소유 시설은 5.4%에 불과하며, 지역 군소회사 등으로 범위를 넓혀도 기업 소유 발전소 비중은 15.7%에 그친다.

자기가 사는 곳의 에너지 시설을 소유한 시민들은 에너지 사업의 의사결정과정에 직접 참여해 지역 여건에 맞는 시스템을 능동적으로 설계·통제하고, 판매이익을 나눈다. 일반 시민이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에너지 프로슈머'가 되고, 전기를 소비하는 지역과 생산·전송하는 지역이 분리되지 않는 '에너지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규모 원전이 들어선 바닷가 마을 주민들이 생태환경 파괴와 방사능오염 등의 피해를 겪고, 도시로 전기를 보내기 위해 산골마을 등에 송전탑을 건설하면서 갈등이 빚어지는 우리나라의 '에너지 비민주주의'와 대조된다.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한적한 산길에 자리 잡은 주택 지붕에 태양광 패널이 설치되어 있다. 독일에서는 전력 소비자인 지역주민들이 가계나 마을협동조합 단위로 생산에도 참여하기 때문에 이익 공유와 함께 ‘에너지 민주주의’가 증진되고 있다.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한적한 산길에 자리 잡은 주택 지붕에 태양광 패널이 설치되어 있다. 독일에서는 전력 소비자인 지역주민들이 가계나 마을협동조합 단위로 생산에도 참여하기 때문에 이익 공유와 함께 ‘에너지 민주주의’가 증진되고 있다.
ⓒ 제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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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쓰는 전력을 자급해 수익을 내는 분산형 시스템은 에너지전환정책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 기반이기도 하다. 2016년 AEE 조사에 따르면 에너지전환정책에 대한 독일 시민들의 지지도는 93%에 달한다. 권필석 부소장은 "독일에서 풍력·태양광 등 발전시설에 대한 주민 수용성이 높은 이유도 재생에너지의 경제적 이익을 (프로슈머인 주민들이) 함께 누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50년 재생에너지 목표는 전체 발전량의 80%

독일 정부는 2016년 기준 전체 발전량 중 33.9%인 재생에너지 비중을 2020년 35%, 2030년 50%를 넘어 2050년에는 80%까지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지난 7월 12일 독일에너지·물산업협회(BDEW)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상반기 수력발전을 포함한 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은 이미 36.3%까지 늘어나 석탄발전(35.1%)을 추월했다. 1990년 재생에너지 전체 전력생산 비중이 3.6%였음을 고려하면 엄청난 성장세다. 세부 에너지원별로는 풍력이 17.6%, 태양광 7.3%, 바이오가스 7.1% 등이었다. 원자력 발전 비중은 탈원전 정책이 확정된 2011년 당시 17.6%에서 7년 만에 11.3%로 줄었다.
 
1990년과 2018년 1~6월 독일의 전체 발전량 대비 발전원별 비중 변화. 석탄·원자력발전은 크게 줄고 풍력·태양광·바이오 등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눈에 띄게 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과 2018년 1~6월 독일의 전체 발전량 대비 발전원별 비중 변화. 석탄·원자력발전은 크게 줄고 풍력·태양광·바이오 등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눈에 띄게 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IEA, BDEW, 나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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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여년간 꾸준히 추진된 에너지전환정책의 결과, 독일은 2016년 기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27% 줄이는 데 성공했다. 향후 감축 목표는 2020년 40%, 2030년 55%, 2050년에는 80%~95%다.

독일 재생에너지산업은 기후변화 대응에 기여함과 동시에 일자리 창출에도 성과를 내고 있다. 독일 연방경제에너지부 통계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재생에너지 분야에 고용된 노동자 수는 약 33만명으로, 2004년 대비 두 배 이상이다. 연방경제에너지부는 2020년까지 에너지전환 과정에서 매년 1만8000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만드는 비영리 대안매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독일, #재생에너지, #에너지전환, #탈석탄, #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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