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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 기자 말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7회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성남고에서 나와 이제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대방길의 마지막 코스인 서울공업고등학교에 가는 길. 여느 길과 달리 주택가를 관통하는 길이라 색다른 느낌을 준다.

⑩ 독립운동가의 산실, 서울공고

서울공고는 들어서자마자 멀리 보이는 본관만 봐도 예사롭지 않은 학교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39년에 건립된 본관 건물은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서울공고 본관 건물(서울시 등록문화재) 1899년 관립 상공학교로 시작한 서울공고의 역사는 1939년 대방동 시대를 연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서울공고 본관 건물(서울시 등록문화재) 1899년 관립 상공학교로 시작한 서울공고의 역사는 1939년 대방동 시대를 연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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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고가 지금의 대방동에 자리 잡는 것은 1939년의 일이다. 하지만 서울공고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99년 명동에 설립된 관립상공학교(4년제)가 그 뿌리이니 가히 '실업교육의 발상지'라고 할만한 학교가 바로 서울공고이다.

관립상공학교는 이후 관립농상공학교로 개편(1904)했다가 1906년 수원농림학교와 선린상업학교로 분리된 후 1907년 관립 공업전습소(2년제)로 개편됐다. 1910년에는 경성공업전습소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22년에 3년제 관립 경성공업학교가 됐다.

서울공고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학교에 걸맞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박찬익, 김재봉, 김약수, 구영필, 이준태, 권준, 양근환 등이 서울공고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다.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박찬익과 양근환, 권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무부장과 주화대표단 단장 등을 역임하면서 항일외교의 최전선에 섰던 박찬익(1884~1949)은 공업전습소 학생들과 함께 만든 최초의 공업연구모임 '공업연구회'(1908년 창립)의 1, 2대 회장과 최초의 공업기술지인 <공업계>의 발간인(1909년 발간)이기도 했다.

박찬익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기반한 독립운동을 벌인 이래 줄곧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아들 박영준도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했다. 
  
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 아래 편 왼쪽에서 세번째가 박잔익 선생의 묘다.
▲ 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 아래 편 왼쪽에서 세번째가 박잔익 선생의 묘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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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양근환(1894~1950)은 1913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을 다닌 인물로 1921년 3.1혁명이후 내선일체와 조선인 참정권 운동을 벌이며 신일본주의를 제창한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을 동경 정거장호텔에서 척살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려다 실패한 양근환은 무기징역을 언도받는데, 12년의 감옥생활 끝에 1933년에 출옥했다.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권준(1895~1959)은 광복회 활동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의열단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던 그는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중국혁명군 장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등을 역임했다. 1933년 의견 차이로 김원봉과 갈라선 그는 중국군에 복무하다가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김재봉, 이준태, 김약수, 구영필, 오기수, 김임형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1890~1944)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이준태, 북풍회 출신의 노동운동가 김약수 등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도 서울공고가 배출한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이다. 

이들은 1920년대 일제의 야수와 같은 탄압에 맞서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 민중을 독립운동의 대열로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김재봉과 이준태는 경북 안동 출신인데, 풍산읍 오미마을에는 김재봉 생가(학암고택)와 <근전 김재봉 어록비>가 있다.
  
<김재봉 생가>와 <김재봉 어록비> 김재봉의 고향인 안동시 풍산읍 오미마을에는 김재봉의 생가와 <김재봉 어록비>가 있다. 어록비에 새겨진 "조선독립을 목적하고...."은 김재봉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을 때 작성한 이력서에 나와 있는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는 문구의 일부이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면서도 여전한 이념대립으로 있는 그대로의 문구를 표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 <김재봉 생가>와 <김재봉 어록비> 김재봉의 고향인 안동시 풍산읍 오미마을에는 김재봉의 생가와 <김재봉 어록비>가 있다. 어록비에 새겨진 "조선독립을 목적하고...."은 김재봉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을 때 작성한 이력서에 나와 있는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는 문구의 일부이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면서도 여전한 이념대립으로 있는 그대로의 문구를 표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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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이여성과 더불어 '조선의 산과 물과 별과 같이' 살고자 했던 김약수(1892~1964)는 해방 이후 제헌의원에 당선돼 초대 국회부의장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적극 나서 친일청산에 앞장섰다. 하지만,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6.25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다가 고향 의성에서 비밀독서회를 조직해 활동하다 여러 차레 옥고를 치른 오기수(1892~1959)도 경성공업전습소 출신(1912년 졸업)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다.

박찬익과 더불어 '공업연구회' 회원이기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도 지낸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구영필(1890~1926)은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의열단 출신이기도 한 구영필은 1922년 만주 길림성 영고탑에 정착했다. 영고탑에서 저명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김사국과 더불어 무산자 교육기관인 대동학원을 운영하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벌이던 중 구영필은 1926년 김좌진 장군이 군사위원장으로 있던 신민부 별동대원 황덕환에게 피살됐다. 
  
구영필의 죽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6. 10. 18) 당시에도 구영필은 변절자가 아니라 군정서를 만들고 간도로 이주해오는 조선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던 인물로 보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구영필의 죽음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6. 10. 18) 당시에도 구영필은 변절자가 아니라 군정서를 만들고 간도로 이주해오는 조선인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던 인물로 보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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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행위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목이었지만, 뒤늦게 이곳으로 근거지를 옮겨온 민족주의계와 이미 터를 잡고 있던 사회주의계 간의 갈등이 낳은 비극이었다(이 갈등은 1929년 김좌진 피살 사건으로 이어진다).

서울공고 선배들은 1919년 3.1혁명에도 이형영 등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 노동현장에 기반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에도 다수가 참여한다. 김임형, 박병윤, 김종천, 류택하 등은 전설적인 혁명가 이재유와 이관술이 이끌던 경성트로이카 그룹과 연계해 경성공업학교 내에 비밀 독서회 '우리학교'를 설립·운영하는 한편, 보성고보의 비밀 독서회 '도나회'를 지도하기도 했다. 

1938년 연행 당시 박병윤은 영등포에 있던 경성방직에 취직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노동운동에도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일재재판기록 '소화13년 형공 제1427호', 국가기록원).

서울공고는 이러한 전통 때문에 해방 정국에서도 좌파가 세력을 형성한 학교로 유명했다고 한다.

민주화운동에도 앞장 선 서울공고 학생들

서울공고 학생들은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나선다. 1959년 3월에는 '교사 몇 사람을 배척하는 이유, 교장 사생활에 대한 해명, 교비의 용도를 밝힐 것, 진학반을 편성할 것' 등 14개항의 요구를 내걸고 2200명 전교생이 등교 거부를 하고 맹휴에 돌입해 결국 승리한다. 서울공고생들은 우리 사회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이미 학원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셈이다.
  
서울공고 학생들의 맹휴 소식을 알리는 경향신문(1959. 3. 5) 서울공고 학생 2,200명은 교장 사생활에 대한 해명, 진학반을 편성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전원 등교거부를 했다.
▲ 서울공고 학생들의 맹휴 소식을 알리는 경향신문(1959. 3. 5) 서울공고 학생 2,200명은 교장 사생활에 대한 해명, 진학반을 편성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전원 등교거부를 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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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고생들은 4.19혁명 당일에는 학교 측의 저지로 주도적 참여는 하지 못하지만, 20일부터는 육군운동장(용산우체국 뒤편)에서 열린 합동위령제에 학교 측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막힌 교문을 부수고 나가 참여하는 등 시위에 함께한다. 이 과정에서 김길웅을 비롯한 3명의 학생이 중상을 입기도 한다.

언론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1965년에는 휴교령도 내려지고 개강 이틀 만에 다시 휴교령이 연장되는 것으로 보아 서울공고생들은 한일회담반대운동 시위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967년 6.8 부정선거 반대운동 때도 서울공고생들은 "300여 명이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데모에 돌입"했다고 한다. 유신시절이던 1975년에는 동문들이 70주년행사를 준비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공고를 다닌 일본인 동문들과 교류를 시작하는데, 재학생들은 "일본인을 우리의 동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라면서 혈서를 쓰고 플래카드를 거는 등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이때 학생회장이 교사들에게 끌려가자 학생들이 흥분해 담장을 넘어 가두시위까지 벌이기도 한다.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전환시대의 논리> 등으로 1970, 1980년대 젊은이들에게 감명을 줬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 자신도 여러 차례 수난을 당했던 민족의 지성 리영희(1929~2010)도 공립 서울공업학교 출신(1944년 졸)이라는 점을 기억해둘만하다.

본관 뒤편으로 가면 동문회에서 운영하는 '서울공고 역사관'이 있다. 그런데 역사관에 기껏 박찬익 선생만 소개돼 있을 뿐 서울공고생들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전시돼 있지 않은 것은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다.

동문회에서 '서울공고 역사관'을 대폭 개편하는 결단을 내려준다면 재학생은 물론 동작구 지역 사회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은 스무살 한정실
서울공고 출신 선배 중에 상도동에 살던 한정실은 가미카제 특공대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군 함정에 뛰어들다 죽는다.
 
함경북도 경성이 고향이 고향인 한정실은 1940년 경성공업학교에 진학한 이후 줄곧 수석을 다툴 정도로 수재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집을 학교 인근 상도동으로 옮겨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아들을 뒷받침했다.

그런 한정실이 2년 후 돌연 육군 소년비행병 학교(사이타마현 구마가야)에 입학한다. 한정실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비행사를 꿈궜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은 조선인은 19명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시작이 친일 문학인 서정주가 <마쓰이 오장 송가>라는 유명한 헌시를 바친 인재웅이었고, 그 마지막이 1945년 6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한정실이었다.
 
사망 당시 한정실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 겨우 스물(1926년 생)이었다. 한정실은 식민지 청년으로 어린 나이에 전쟁에 동원되어 전사했다는 점에서 피해자였지만, 가마카제 특공대로 미군 함정에 몸체공격을 감행 했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가해자였다. 가미카제 특공대로 죽은 한정실은 식민지 청년의 비극적 운명을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낭만과 전설의 동작구', 동작FM)

(* 이번 기사로 대방길 탐방을 마치고, 다음 회부터는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노량진길' 편이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씨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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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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