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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너희는 꼭 서로 만났으면 좋갔다>에 나오는 춘하 씨의 그림. 외손녀와  춘하 씨.
 그림책 <너희는 꼭 서로 만났으면 좋갔다>에 나오는 춘하 씨의 그림. 외손녀와 춘하 씨.
ⓒ 유춘하,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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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버섯 선물

춘하씨는 한국전쟁 실향민이다. 그동안 이산가족 상봉 추첨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여전히 이산가족 수가 많아서겠지. 이번에 상봉하지 못한 이산가족들에게 보냈다던 북한 칠보산 송이버섯을 받는 대상 4천 명에도 들지 못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4천 명 중 한 명으로 당당히 뽑힌 춘하씨는 김정은 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 합작의 추석맞이 특별선물을 받게 되었다. 청와대 발 송이버섯과 함께 온 대통령 내외의 편지를 읽어내리는 수화기 건너편 춘하씨 목소리에 감격과 흥분이 배어 있다. 춘하씨는 우리 아버지.
     
4천 명이라는 숫자가 적지 않은 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에는 추첨이 아니라 이산가족 중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뽑았기 때문에 연세가 지긋한 춘하씨도 해당이 된 거였다. 북쪽 가을산의 체취가 고스란히 담긴 버섯을, 그것도 극적인 평양남북정상회담 직후 추석 선물로 받게 된 춘하씨. 그와 같은 많은 실향민들은 꿈을 꾸는 것 같을지도 모르겠다.

춘하씨의 소박하고 신비로운 그림들
 
아버지와 함께 낸 그림책, '너희는 꼭 서로 만났으면 좋갔다'(2018), '쑥갓 꽃을 그렸어'(2016).
 아버지와 함께 낸 그림책, "너희는 꼭 서로 만났으면 좋갔다"(2018), "쑥갓 꽃을 그렸어"(2016).
ⓒ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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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씨는 얼마 전에 딸인 나와 함께 두 번째 그림책을 냈다. 그림책을 내려고 낸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춘하씨는 일 년에 한두 차례 시골에서 올라와서 자식들 집을 돌아가며 얼마씩 지내다 가신다.

자식과 손주들 얼굴 보는 거야 반가우나, 아파트 안에만 있으니 갑갑하고 무료해 하신다. 그래서 놀이 삼아 그림을 권하여 같이 그려보게 되었는데, 웬일인가. 뜻밖에도 춘하씨가 재밌어 하고 곧잘 그려내시는 거다. 춘하씨의 새로운 발견이랄까.

그리하여 계시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 그리기 막노동을 계속하셨다. 크레파스 색칠에서 시작하여 텃밭에서 주워온 자두 두 알을 그린 첫 수채화, 어항 속 물고기 그림, 임진강을 보며 그린 풍경화까지.

그렇게 우연히 나온 춘하씨의 소박하고 신비로운 그림들은 한참 지나 그림책 <쑥갓 꽃을 그렸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책 속에는 춘하씨의 이산과 실향 이야기도 나온다. 아니,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지.
 
파주 반구정에서 임진강 풍경화를 그리는 춘하씨.
 파주 반구정에서 임진강 풍경화를 그리는 춘하씨.
ⓒ 유현미,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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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 얼굴을 그려달라 했더니

작년에 올라오셨을 때는 더 쇠약해지셔서 그림 그릴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역시 아파트가 문제. 거동이 불편하니 어디 놀러가기도 쉽지 않고, 안에만 있으니 심심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자식들이 나중에 선물로 간직하려고 얼굴을 그려 주세요, 하고 청하였다.

수채화는 이젠 너무 힘들고, 그리기 비교적 편한 크레용과 색연필을 쓰는 정도로. 첫 모델은 머물고 있던 집의 주인인 둘째 사위 당첨. 연필을 들고 쪼그려 앉은 93세 장인어른 앞에 둘째 사위가 마주앉았다. 연필로 먼저 그리고 색연필로 다시 선을 따고 넓은 면은 크레용칠. 결과는? 

따뜻하고 재미있고 정직하고 독특한 둘째 사위 초상화 탄생!

계속 그리기로 했다. 직접 모델로 설 수 없는 인물은 사진으로 대신했다.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 그리려고도 하셨지만.

"아, 되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어. 
그만하면 안 될까? 
안 되겠지. 
누구는 그리고 누구는 안 그리면 
서운하지 않갔냐. 
공평하지 않지." 


결국 다 그려내셨다. 

북에 두고 온 딸, 숙녀의 얼굴

다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 허전하다. 춘하씨는 북에 두고온 딸을 떠올린다. 그리기로 한다. 이름은 숙녀. 춘하씨가 1947~1948년께 황해도 재령읍에서 지낼 때 집주인 딸 중에 이름에 숙녀인 아이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좋아서 나중에 장가들어 딸을 낳으면 숙녀라고 해야지, 했다는. 겨우 갓 돌이 지났을 때 헤어지게 된, 이렇게 영영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던 그 아기, 숙녀.
 
춘하 씨가 상상으로 그린 북녘 딸 숙녀의 얼굴.
 춘하 씨가 상상으로 그린 북녘 딸 숙녀의 얼굴.
ⓒ 유춘하,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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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서 그려 보라구?
전쟁 때 헤어진 딸내미를 그리라니!
돌잽이 때 본 게 마지막인데
아득해서 어떻게 그리갔냐.
우리 애기를 동네 사람이 업어주던
기억이 흐릿하게 난다.
사람 목숨이 질기기도 하거든?
살아있을 걸로 생각돼.
살아있다면 자손들도 있갔지."


춘하씨는 숙녀를 그린 뒤 그림 옆에 '내 딸 숙녀'라고 제목을 붙인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나온 <너희는 꼭 서로 만났으면 좋갔다>의 '작가의 말'에 이렇게 쓴다. 
 
"나는 충분히 오래 살았다. 애들한테도 나는 언제라도 즐거이 떠날 수 있다고 말해 두었다. 그런데 요사이, 한 가지 바람이 생겼다. 혹시 나에게도 기회가 온다면 황해도 고향 땅을 한번 밟아보고 싶다.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나 딸 숙녀를 만난다면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이제는 남과 북이 서로 오가면서 사이좋게 살기를 바란다." 

위 글을 쓴 때가 지난 5월 즐거운 게릴라 작전 같았던 판문점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조금 지났을 때이다. 그리고 엊그제는 남북 두 정상이 백두산 천지를 함께 산책하는 것을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보았다. 실향 70년 우리 아버지 춘하씨가 모처럼 상기된 어조로 말씀하신다.

"야, 어쩌면 내가 고향 땅을 밟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갔다!"

우리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희는 꼭 서로 만났으면 좋갔다

유춘하.유현미 지음, 낮은산(2018)


태그:#송이버섯, #너희는꼭서로만났으면좋갔다, #유춘하, #유현미,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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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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