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질감이나 결은 잘 관리된 콤플렉스에서 비롯된다."

인기 작사가 김이나씨는 한 예능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 나이를 먹고 '경험치'가 늘수록, 세계를 받아들이는 관점이라는 게 생겼다. 그리고 이 관점은 각자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해 온 무언가에 영향을 받더랬다. 내 경우에는 그게 '관계'였다.
 
어렸을 때부터 늘 생각했다. 나는 왜 특별한 관계를 맺지 못할까? 어디를 봐도 다른 사람들은 각자 특별하고 멋진 관계를 맺고 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린이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특별한 비밀을 나누는 베스트 프렌드가 있었고, 미니시리즈에 나오는 주인공들 역시 잘 생기고 까칠한 남자주인공과 다정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서브 남자주인공의 열렬한 구애를 받았다. '베프'도, 삼각관계도 없는 내 인생이 너무 심심하다고 생각했다. 

연애 = 사랑을 주는 남성 + 사랑을 받는 여성?
 
 영화 <내 사랑>

영화 <내 사랑> ⓒ 영화 <내 사랑>

  
사랑을 주는 남성과, 사랑을 받는 여성. 익숙한 수식이다. 내가 자라오면서 봤던 거의 모든 러브 스토리가 그랬다. 남성은 첫눈에 반해 (혹은 어렸을 때의 특별한 인연을 잊지 못해) 열렬한 구애를 하고, 여성은 처음에는 거들떠보지 않다가 남성의 진심어린 모습에 마음을 열고 구애를 수락한다.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야 하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해 주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말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좀 더 크고 나서 접한 여성주의의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부장적이고 일방적인 연애 판타지가 지겨웠던 여성들은 여기서 벗어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자 했다. 남성들의 구애를 거절하거나, '영앤리치'를 골라 만나는, 예쁘고 당당한 여성이 그것이다. 이런 여성들이 '페미니즘'적으로도 멋진 여성이라고 여겨졌고, 다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도 뭔가 외로움을 느꼈다. 어쨌든 모두가 이런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는 손목을 잡아채고 벽에 몰아붙이는 남자주인공을 '박력 있고 멋진' 남성으로 묘사하는 드라마를 보고 자랐고, 커서는 이런 행동을 하는 남성들은 '페미니즘의 적'이라고 싸움의 의지를 다졌던 나는 혼란에 빠졌다. 대체 누굴 만나야 한단 말인가!
 
외로운 여성, 아름답지 않은 여성, 뚱뚱한 여성, 장애가 있는 여성. 이런 여성들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가. 아무 데서도 이런 이들의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거절 당하는 모습은 낯설고 어색하다.
 
먼저 찾아가고 결혼을 제안한 모드
 
영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정작 영화 이야기가 늦었다. 영화 <내 사랑>은 아름답지 않고 사랑받지 못했던 여성이 관계를 맺는 방식을 보여준다. 주인공 모드는 왜소한 몸집에 관절염으로 다리를 저는 여성이다. 그는 고모 집에 얹혀 살며 구박을 받다가, 어느 날 어부 에버렛이 가정부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는 짐을 싸서 그의 집에 찾아간다. 에버렛은 한눈에 봐도 몸이 불편해 보이는 모드를 내쫓지만, 모드는 그의 집에서 버티며 일을 한다.
 
모드는 에버렛을 먼저 찾아가고, 먼저 그의 침대로 들어가고, 먼저 결혼을 제안한다. 에버렛은 내내 모드를 거절하고 상처를 주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한다. "내 인생에 기어들어올 모양인데 착각하지 마", "일 끝나는 대로 내 집에서 꺼져", "너랑 하느니 나무토막이랑 하는 게 낫지". 에버렛의 이런 폭언을 들으면서도 모드는 다음날이면 다시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에버렛을 돕는다.
 
그렇게 에버렛은 모드에게 익숙해지고, 모드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모드는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있고, 에버렛의 집을 그림으로 채워나간다. 에버렛에게 생선을 산 산드라가 우연히 집을 방문하며 그 그림을 보고 모드에게 그림을 팔라고 제안한다.

모드는 그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데, 에버렛은 그런 모드를 대신해 집안일을 하면서도 때때로 모드에게 화를 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자기보다 못한 존재였던 모드가 유명해지고 돈을 벌게 되는 것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이 뒤섞인 행동이다.
 
에버렛은 누가 봐도 좋은 남자가 아니다. 폭력적이고, 열등감과 콤플렉스에 찌들어있다. 모드가 죽을 때, 에버렛이 "당신을 왜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감동 포인트'로 꼽히던데, 나는 전혀 감동을 받지 않았다. 그동안 모드를 자신보다 낮은 존재, 하찮은 사람이라고 내내 생각해 왔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에버렛의 폭력을 '츤데레'라고 정당화한다', '불편하다'고 평한 것을 십분 이해한다.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사랑들,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영화 <내 사랑>

영화 <내 사랑> ⓒ 영화 <내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관계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그리고 지금 세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상대의 폭력성을 거칠거나 서툰 애정표현의 방식으로 생각하며 관계를 맺어 왔다. 상대의 폭력에 상처받으면서도 가끔 보이는 애정을 사랑하며 오랜 시간을 그러려니 살아온 여성들. 마음 한켠으로는 그 누구도 사랑을 이유로 이런 남성들의 폭력을 감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들의 삶도 누가 섬세하게 다루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항상 드는 고민이다.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어떤 모습은 미디어에서 다루면 안 될까? 데이트폭력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데이트폭력을 다루면 안 되나? 드라마 <청춘시대>처럼, 데이트폭력을 철저히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룬다는 전제 하에만 가능할까? 그렇다면 영화와 같은 예술이 반드시 권선징악의 가치를 품고 'PC(politically correct)'하게만 만들어져야 하나?
 
많은 경우 그랬다. 내가 여성주의의 언어를 배우고 난 이후에도, 나는 이론적으로는 '타도의 대상'이자 '반여성주의적'인 남성들을 은근히 마음에 품어 왔던 것이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거절을 당하기도 했다! 이건 매우 부끄럽지만, 당연한 일이다. 많은 여성들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의 문제에 분노하는 동시에, 남자친구에게 사랑을 갈구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끄럽고 '지질한' 내 모습과, 내가 원하는 당당하고 멋진 모습 사이의 간극에서 우리는 더더욱 초라해진다.
 
'이런 사랑도 있구나', <내 사랑>을 보며 나는 위로받았다. 폭력적이고, 주변에 이런 사례가 있다면 도시락 싸고 말리겠지만, 어쩌겠나. 이런 미숙한 방식의 사랑을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너무 많은 연인들이 존재하는 것을.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랑들. 특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래서 어디에 풀어놓기도 부끄럽고 민망한 사랑들을 목격할 기회는 너무 적었다. '모드'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나는 미숙했던 지난 사랑들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하는, 아름답지 않은, 먼저 사랑을 시작하는 여성인 '모드'의 존재는 소중하다. 구애하는 남성과 구애를 받는 여성이라는 로맨스의 공식을 깨고, 복잡다단하고 구질구질하고 비참하기까지 한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연애를 '나쁜 남자', '츤데레'라고 포장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그런 연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상적이고 무결한 로맨스만을 보여주는 것도 싫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어떻게 메워야 하는지는 너무 어려운 숙제지만, 그 사이에서 <내 사랑>의 '모드' 캐릭터는 어딘가 힌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운명적인 사랑과 특별한 관계만을 왕왕 강조하는 사랑 이야기들에 지쳤다면, 이 영화를 보며 '모드'의 마음을 느껴보기를 권한다.
내사랑 셸리호킨스 에단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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