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청춘들 역시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나도 그렇다. 명절 때 친척들이 "학교는 졸업했냐"고 질문할 때마다 식은땀을 흘렸다. 남들보다 졸업이 늦었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마땅한 수입이 없는 데다 남들 다 한다는 연애도 미루다 보니, 남들이 보면 결점만 가득한 인생이다. 어른들 입장에서는 좋은 이야기라고 하시는 말이지만 나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특히 친척들 중 비슷한 또래의 누가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괜스레 나를 보고 '너도 잘 될 거다'라는 덕담을 건넨다. 부담스럽게 말이다.
 
극심한 취업난의 시대, 많은 청년들이 결혼을 포기하는 시대다. 명절날 어른들의 추궁을 들으면 청춘들은 죄인이 된 기분이 든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고향집에 내려가기보다는 혼자 추석을 보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청춘들에게 위안을 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소공녀>다.

과거 밴드부 활동을 했던 미소(이솜 분)는 3년 차 프로 가사도우미이다. 어느 날 집주인이 방세를 올리면서 방을 빼기로 결심한 미소는 친구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살기로 결심한다.

결혼, 내집 마련, 좋은 직장, 모두 이뤘더라도...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미소가 예전 친구들을 만나 듣는 이야기는 명절 날 뵙는 어르신들의 질문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다. 첫 번째 친구는 좋은 직장에 다니고 혼자 살만큼 경제력을 갖췄지만 자신만의 온전한 시간이 부족하다. 쉬는 시간이면 링거를 맞는 모습은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건지 일을 위해 사는 건지 의문이 들게 만든다. 두 번째 친구는 가난한 남자와 결혼해 힘겹게 살아간다. 가족들이 다 같이 힘을 합쳐 아등바등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남편은 공부 중이고 아내는 뒷바라지를 한다. 그리고 남편의 부모는 모든 일을 며느리에게 맡긴다.
 

세 번째 친구는 대출금을 얻어 내 집을 마련했건만 아내가 집을 나가버린다. 사람 사는 온기는 없고 돈은 갚아나가야 하는 처지에 우울증에 빠져 있다. 네 번째 친구는 캥거루족이다. 친구의 부모님은 결혼 못하는 아들을 위해 미소를 강제로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한다. 앞서 언급한 네 명의 친구들의 상황은 겉으로만 보면 명절날 어른들이 칭찬할 만한 모습이기도 하다. 좋은 직장, 남편 뒷바라지 하는 좋은 며느리, 내 집 마련, 결혼을 이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다섯 번째 친구는 부유한 집안에 시집을 가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다. 귀여운 아이에 가정부도 두고 있다. 하지만 남편과 집안 분위기에 짓눌려, 본인이 아니라 그저 '좋은 어머니' '착한 아내'의 모습으로만 살아간다. 이 다섯 친구들과 미소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미소는 집은 없어도 담배와 위스키는 포기할 수 없는 확고한 취향을 지니고 있다. 친구들은 미소에게는 없는 집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자신들의 생각과 취향은 사라졌다. 친구들은 주변 사람들의 조언대로 살아온 덕에 집은 얻었지만 자신은 잃었다. 반면 미소는 다르게 살아왔기에 집은 없지만 자신의 취향과 생각은 지킬 수 있다.
 
오랜 만에 모인 명절,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소공녀>는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꼭 어른들의 말대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배고픔과 굶주림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던 동화 속 '소공녀'처럼 주인공 역시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매춘부 일을 하다 아이를 임신한 고용주 민지(조수향 분)에게도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도입부에서 미소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과 취향을 가지고 있는 법"이라고. 미소는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여자다. 그녀에게 '미래'는 없을지언정 생각이 있고, 돈은 없을지언정 취향이 있다.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이상적인 여자가 미소이다.

미소의 품격이 돋보이는 건 타인의 약점을 꼬집기보다는 따뜻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다 모인 추석 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반면 오랜 만에 만난 자리에서 현실적인 조언이라며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너는 현실감각이 없다"고 일침을 놓는 친구들은, 잔소리를 늘어놓는 어른들과 다를 바 없다. 조금이라도 잘 사는 걸 티내고 싶어 하는 교만함, 자신의 힘든 처지를 가리기 위해 남을 비꼬고 꼬집는 나약함은 결코 본받고 싶은 모습이 아니다. 이들은 존중보다 상대를 향한 조소와 조롱을 달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미소는 세상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그녀에게도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인다. 그 따뜻함이 차가운 조롱과 멸시보다 민지에게 필요한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취향과 생각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존중해야 한다. 그 존중이란 온기를 담은 말에서 시작된다.

명절의 풍경도 이와 같다면 참 좋지 않을까. '힘들었구나', '고생했구나' 라는 위로와 함께 따뜻한 밥 한 끼 함께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면 명절 스트레스라는 말도, 명절 혼족이라는 말도 사라질 것이다. 누구나 위로가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다. 그런 자리가 가족이 다 함께 모이는 추석이 된다면 진정한 의미의 명절이 아닐까.
추석 소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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