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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악을 전공한 설현주 레이블 소설 대표는 관현악단 단무장 시절 해외 아티스트들에게 우리 문화재를 안내하다 여러 번 민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궁에선 중국 음악이, 매표소에서는 서양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곤 했지요.

클릭 한번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훑어볼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들이 '너희 나라의 음악을 들려줘'라고 했을 때 '바로 이거야' 라고 할 국악 정보란 너무 미미했습니다.
 
설현주 레이블 소설 대표
 설현주 레이블 소설 대표
ⓒ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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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음악인 국악을 보존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에는 누구나 공감합니다. 하지만 국악 하면 지루하고 어렵고 나와 상관없는 딴 세상이라 여깁니다. 멀리하다 보니 점점 더 낯설어질 수밖에요. 명분만으로 국악을 사랑하라는 건 공허합니다. 국악인 스스로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설현주 레이블 소설 대표
레이블 소설은 전통음악을 보존·계승하며 재창조를 통해 콘텐츠 산업을 활성화하겠다는 미션을 가진 소셜벤처입니다.

국악의 문턱을 낮추다

갓 100일. 국악 전문 기획사 레이블 소설의 나이입니다. 사회적기업가 육성과정 8기를 거쳐 지난 6월 문을 연 레이블 소설은 불과 100일 만에 16장의 앨범을 제작했습니다. 1년 치 프로모션 일정도 이미 다 찼습니다.

만 6살 때 최장시간 판소리 '흥보가'를 완창해 국악계의 신동이라 불리는 유태평양 씨도 최근 이곳에서 생애 최초로 개인 음반을 냈습니다. 

"판소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그 가치가 높지만, 국악 전공자인 저도 완창을 듣기 위해 8시간 이상 앉아 있기 힘듭니다. 듣는 이도 부르는 이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앨범을 대목별로 10~20분 단위로 나누어 제작했습니다."

유태평양씨의 첫 개인 앨범은 심청전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심봉사가 눈을 뜨는 '눈대목'입니다. 레이블 소설은 한 달에 한 대목씩 앨범을 제작해 완창 음반을 완결한다는 백년대계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저작권료 거의 0원... 국악인들의 활동 영역 다변화 시도

레이블 소설은 음반 기획부터 제작 유통뿐 아니라 국악인들이 다방면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원스톱 서비스를 지향합니다.
 
서울 논현동 레이블 소설 사무실. 음반 기획부터 녹음 제작, 앨범 발매부터 유통까지 이곳에서 모두 이뤄진다.
 서울 논현동 레이블 소설 사무실. 음반 기획부터 녹음 제작, 앨범 발매부터 유통까지 이곳에서 모두 이뤄진다.
ⓒ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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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은 비상업적인 순수 음악입니다. 음반 제작이 저조한 이유 중 하나는 저작권에 대한 기대치가 아예 없기 때문이에요. 일례로 몇 년 전 악단 이름으로 앨범을 냈는데 수수료를 제외하고 저희 팀이 받은 저작권료는 월 300원입니다. 그것도 가장 인기 있는 시즌인 추석 때였는데 말이죠."

음반 제작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는 것이 국악계가 처한 현실이지만 검색어 시대에 개인 음반 제작은 꼭 필요한 이력이기도 합니다.

"요즘 방송국에선 섭외를 할 때 인터넷을 검색해봅니다. 그런데 인명사전에는 국악인들의 이름이 별로 없어요. 음반을 내야 국악인임을 쉽게 입증할 수 있는데 20년 경력의 저를 포함해 제 동료들 99%가 자기 이름으로 음반을 낸 경험이 없어요."

레이블 소설이 낸 첫 앨범은 이재하의 거문고 산조였습니다. 국악인 이재하씨는 앨범 발매 사흘 만에 국악방송으로부터 출연 요청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레이블 소설을 통해 공연 섭외가 들어온 한 국악인은 방송국이 포털사이트를 검색해보곤 검증이 힘들다는 이유로 출연 요청을 취소한 경우도 있습니다.
 
AUX와 포레스텔라팀의 배두훈 씨와 함께 공연한 '춘향 난봉가' 중에서
 AUX와 포레스텔라팀의 배두훈 씨와 함께 공연한 "춘향 난봉가" 중에서
ⓒ 레이블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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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호평을 받고 있는 월드 뮤직 그룹 '억스(AUX)'는 레이블 소설에서 2집 음반을 제작한 뒤 방송 출연과 무대 공연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춘향전을 모티브로 한 창작곡 악극 '춘향 난봉가'에 출연해 팬텀싱어 우승자인 포레스텔라팀의 배두훈씨와 공연했고, 다음 달 16일에는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같은 공연이 이어집니다. 
  
"우리의 사업 모델은 앨범 제작과 공연 기획료입니다. 방송 출연이나 공연 출연 혹은 다른 뮤지션과의 협업 등은 우리의 수익과는 상관없지만 국악인의 보폭을 넓힌다는 저의 미션에 부합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임하고 있습니다."
  
레이블 소설에는 현재 월드 뮤직 그룹 억스와 3명의 국악인들이 소속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움을 창조

레이블 소설의 기본 철학은 전통음악의 보존과 발전입니다. 국악에 대한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새로움을 더한다는 뜻으로, 덮어놓고식의 퓨전은 사양합니다.
 
레이블 소설 녹음실에는 서양악기들도 갖춰져 있다.
 레이블 소설 녹음실에는 서양악기들도 갖춰져 있다.
ⓒ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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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은 악기별로 유파가 있습니다. 작고하신 명인이나 유명하신 선생님들의 유파를 답습해 기록하는 것은 보존의 의미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면 발전이 없어요. 전통의 좋은 부분은 유지하고 아쉬운 부분은 자기만의 창작물로 발전시키는 것이 저희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설 대표는 그 대표적인 예로 사물놀이를 들었습니다. 
  
"흔히 전통음악 하면 사물놀이를 떠올리지만 실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40년밖에 안 된 음악입니다. 산조 또한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옛 궁중음악에 비하면 짧은 전통이지요. 하지만 이 음악들의 공통점은 그 당시에는 꽤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닐까요?" 

품앗이 정신으로 어려움 극복

서울 논현동에 자리 잡은 레이블 소설 사무실은 설 대표 말고도 국악인 2명이 함께 씁니다. 국립국악관현악단과 시립 악단에서 활동해 온 재원들로 악기 연주뿐 아니라 악기 제작과 스튜디오 엔지니어를 병행하고 있어요.
 
시립 악단 출신인 국악인 이우성 씨는 우리 소리를 잘 담아낼 수 있는 악기 개발에 힘쓰고 있다.
 시립 악단 출신인 국악인 이우성 씨는 우리 소리를 잘 담아낼 수 있는 악기 개발에 힘쓰고 있다.
ⓒ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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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소설이 불과 100일 만에 16개의 음반을 발매할 수 있었던 건 이들과 협업한 산물입니다. 이우성 악기 제작자는 녹음실에 적합한 악기를 빌려주고 전국에 걸친 국악인들의 네크워크를 공유해 숨은 고수들을 발굴하고 연결하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최순호 스튜디오 엔지니어는 국악기의 특성을 살린 녹음 편집으로 앨범의 질을 향상했습니다.    
"거문고를 농현하면 나무 칙칙 긁는 소리가 나는데 일반 녹음실에서는 '이게 무슨 소리냐'며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고유의 소리인데요. 태평소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 시원한 소리를 지우고 듣기 좋게 다듬기도 합니다. 그래서 국악 애호가들은 마이크 없이 생음악 듣기를 더 좋아합니다. 저희는 듣기 좋은 주파수 안에서 최대한 본연의 소리를 깎지 않고 강약을 조절해 앨범을 만듭니다. "
레이블 소설의 앨범 녹음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출신인 최순호 스튜디오 엔지니어가 맡고 있다.
 레이블 소설의 앨범 녹음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출신인 최순호 스튜디오 엔지니어가 맡고 있다.
ⓒ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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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대표는 10년에 걸친 관현악단 단무장 경력과 디자인 1급 국가자격증 소유자로 앨범 디자인과 공연 기획 분야에서 두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있어요. 이처럼 전 과정에 걸쳐 국악 전문가가 참여하는 품앗이를 통해 고품질 저비용이란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평균 앨범 1장을 낼 때 2-3곡이 삽입될 경우 최소 400만 원이 들지만 레이블 소설에서는 절반 이하의 파격적인 가격으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저희는 가격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국악인들로부터 가격이 싸서가 아니라 좋은 음반 기획사에서 자신의 앨범을 내고 싶다고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누구의 제자입니까?"

어려서부터 사물놀이를 좋아했던 설 대표는 고3 때 뒤늦게 입시를 준비해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경연대회에서 6번 수상한 경력이 있지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온 것이 아니었기에 인맥도 기초 지식도 부족했습니다. 그 부족함을 인터넷으로 메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 사회에 나와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은 '어느 선생님의 제자입니까'라는 거예요. 국악인들의 사회 진출은 누구의 제자 혹은 유명한 선생님의 이름을 내건 발표회에 참여하면서 연주 경력을 쌓고 강사로도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화를 깨고 싶었어요. 인디밴드 친구들은 앨범을 먼저 내면서 시작하고, 배우도 프로필 사진을 찍어 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국악계는 음반이 아니라 누구의 제자가 프로필이 되는 것이죠."
레이블 소설은 국악인들이 개인의 이름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열어 공연 대관비가 비싸 독주회를 열지 못하는 국악인들에게 무료 연주의 기회를 줄 예정입니다. 인근 국악고 2곳과는 업무협약(MOU)를 맺고 한 학교에 2명씩 저소득층과 장애를 지닌 학생들에게 앨범 프로모션을 지원해 줄 계획입니다.

사회적 음원으로 대중 속으로

설 대표는 아무리 좋은 콘텐츠를 생산해도 확산에는 한계가 있음을 잘 압니다. 한 통계에 따르면 1년에 국악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국민이 76%에 이를 정도로 우리의 것이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국악입니다. 한 해 발매되는 음반도 150~200장 수준입니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사회적 음원입니다. 국악을 공공재로 여기고 아무 데서나 무료로 틀고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레이블 소설은 아티스트와 협의해 발매된 음원을 유튜브에 공개했고 점점 사라져 가는 CD를 대신해 USB로 제작한 음원을 다음 달 발매합니다.
  
"들을 기회가 많아야 싫든 좋든 할 텐데 그럴 기회조차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익숙해진다면 낯선 곳에서 오는 괴리감에서 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악기 제작과 녹음실이 겸비된 레이블 소설 사무실은 국악인들 사이에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악기 제작과 녹음실이 겸비된 레이블 소설 사무실은 국악인들 사이에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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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소설이란 이름에서 '소설(小雪)'은 24절기 중 첫눈이 내리는 20번째 절기를 뜻합니다.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절기의 특징처럼 무형의 전통문화를 유형의 콘텐츠로 생산해 전통문화의 활성화에 이바지한다는 취지입니다.  

"'소설의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어요. 날씨가 추워야 그해 보리농사가 잘 돼 추운 겨울을 잘 버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레이블 소설이 그 추위가 되어 전통문화가 풍요롭게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

레이블소설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labelsosul
인스타그램: http://www.instagram.com/labelsosul/
블로그: http://blog.naver.com/studio_sosul
유튜브: http://bitly.kr/r34s

글. 백선기 (이로운넷 책임에디터)
사진. 이우기 (사진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가 격주로 발행하는 온라인 뉴스레터 '세모편지'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사회적경제, #레이블소설, #국악, #전통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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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는 사회적경제 정책 통합 및 지속가능한 기반 조성을 위해 2013년 1월 설립된 민관 거버넌스 기관입니다. 사회적경제 부문?업종?지원조직들의 네트워크를 촉진하고 서울시와 자치구의 통합적 정책 환경 조성 및 자원 발굴?연계, 사회투자, 공공구매, 윤리적 소비문화 확산을 통해 기업과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촉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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