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의 이야기] 혁명의 시발점이 된 바스티유 감옥

다음 날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시발점이 된 바스티유 감옥을 답사해보기로 했다. 메트로를 타고 바스티유역에서 내리니 바로 바스티유광장(Place de la Bastille)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을 기대하고 왔지만 그곳엔 아무런 흔적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스티유 감옥은 본래 파리 동부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건축한 요새였으나 루이 13세 때부터 감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루이 14세 때는 볼테르, 디드로 등 계몽주의 사상가를 가두면서 구체제의 상징물로 인식된 곳이라 혁명 때 민중의 제1차 공격대상이 되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브라줄론 자작>을 토대로 만든 영화 <아이언 마스크>의 무대가 바로 이 감옥이었다.

성난 시민 1천여 명이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가 습격을 단행했다. 이때 수비병 일부가 시민들에 동조함으로써 감옥이 점거당했고 감옥소장과 파리 시장은 살해되었다. 이날, 시민들이 감옥을 습격한 1789년 7월 14일은 뒤에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로 지정된다.

바스티유 감옥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는 바스티유광장이란 이름으로 남게 된다. 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현지답사에 나섰던 우리는 처음에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바스티유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7월 기념비(Colonne de Juillet)'는 1789년 7월의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하는 비가 아니라 그보다 41년 뒤에 일어난 1830년의 7월 혁명을 기념하는 기둥이다.
 
바스티유 광장의 7월 기념비
 바스티유 광장의 7월 기념비
ⓒ 강재인

관련사진보기

 
"그럼 바스티유 감옥에 대한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네요. 일요일이면 광장 북쪽에 재래시장이 열린다던데 거기나 한번 가보시겠어요?"
"그럴까?"


허탈해진 아빠와 나는 바스티유광장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로를 따라 약 2백 미터가량 전개되는 마레(Marais) 지구의 재래시장 노천 판매대에서는 채소와 과일, 치즈, 빵, 햄, 쇠고기, 닭고기, 절임 등 갖가지 음식재료들을 팔고 있었다.

상당히 많은 파리 시민들이 장을 보러 나와 있었다. 우리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구경했는데, 의외로 생선을 파는 판매대가 많았다. 프랑스인이 생선을 많이 먹는다는 얘기다. 이는 같은 서양인이라도 생선보다는 고기를 선호하는 미국인과 달랐다.
 
바스티유 재래시장
 바스티유 재래시장
ⓒ 강재인

관련사진보기

   
개중에는 빵이나 닭고기 튀김 등 즉석요리를 파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밖에 뭔가 사 먹을 만한 게 있으면 여기서 점심을 때우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었으나 막상 먹을 만한 게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재래시장 밖의 한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해물 파스타를 시켜 먹고, 거기서 다음 행선지를 의논해야 했다.

"이젠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으로 가야겠지?"
"거긴?"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곳."


"아" 하고 나는 낮게 외쳤다.

목적지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아빠와 프랑스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파리 시민들이 창에 감옥 수비병들의 목을 꽂고 돌아다닌다는 보고를 받자 루이 16세가 "이건 폭동"이라고 외쳤고, 이를 들은 리앙쿠르 후작은 "아닙니다, 폐하. 이건 혁명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폭동과 혁명을 대번에 구별한 걸 보면 그 후작도 보통사람은 아니다. 직함은 궁전 의상담당관이었다는데 상당한 식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전설의 상당수가 그러하듯 후대에 각색된 얘기였거나. 아무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곡괭이나 삽을 든 파리 시민 수천 명이 베르사유궁으로 몰려와 외쳤다.

"왕과 왕비는 나와라! 배고파 못 살겠다!"

이에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튈르리궁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사태가 좀처럼 가라앉을 것 같지 않자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를 부추겨 친정이 있는 오스트리아로의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다 발각되는 바람에 지난번 우리가 본 시테섬의 감옥(Concierge)에 유폐되었다가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지금 우리가 가보려는 콩코르드 광장이 바로 그 현장이다.

[아빠의 이야기] 콩코르드 광장에 오벨리스크 탑을 세운 진짜 이유

콩코르드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올라가니 가로 360m, 세로 210m의 직사각형 광장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 파리에서 가장 넓다는 이 광장 중앙엔 높다란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앞뒤로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광장 옆에는 현대식 오락기구인 대형 관람차(Roue)가 설치되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중국인 단체 관광버스들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여서 좀 실망스러웠다. 당초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콩코르드 광장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872년 경 콩코르드광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
 1872년 경 콩코르드광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
ⓒ wiki commons

관련사진보기

   
나는 딸을 데리고 우선 센강에 놓인 콩코르드 다리(Pont de la Concorde) 쪽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끝나는 곳엔 12개의 돌기둥이 바치고 있는 그리스 신전 비슷한 건물이 보이고, 그 꼭대기엔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건 루이 14세가 딸을 위해 지어주었다는 부르봉궁(Palais Bourbon)인데 지금은 프랑스 국회의사당(Assemblée Nationale)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한 돌로 지었다는 콩코르드다리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한 돌로 지었다는 콩코르드다리
ⓒ 강재인

관련사진보기

 
내가 딸을 데리고 이곳에 온 것은 그 건물로 이어지는 콩코르드 다리가 아까 답사했던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한 돌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전제정치의 상징이었던 감옥을 부숴 사람과 마차가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게 마땅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변전무상이다. 역사가 깃들인 콩코르드 다리 위로는 차만 오갈 뿐 우리 말고는 이 다리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했다는 기요틴은 어디에 있었어요?"

딸이 광장을 돌아보며 묻기에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되어 있던 그림을 보여주었다. 기요틴에 끌려 나온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기 직전의 모습을 스케치한 당시 그림이다.
  
기요틴에 끌려온 마리 앙투아네트
 기요틴에 끌려온 마리 앙투아네트
ⓒ wiki commons

관련사진보기

 
"그림 왼쪽에 건물이 보이지? 그 건물이 바로 광장 북쪽에 보이는 저 쌍둥이 건물 중의 하나야."


나는 오벨리스크 뒤에 궁전처럼 장엄하게 버티고 서 있는 두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들을 대조해 보면, 기요틴이 설치되었던 곳은 현재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들을 대조해 보면, 기요틴이 설치되었던 곳은 현재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 wiki commons

관련사진보기

 
두 건물 모두 혁명 전인 1758년에 세워졌는데, 왼쪽 것은 오몽(Aumont)공작의 예술품 수집처로 쓰이다가 뒤에 크리용 호텔(Hôtel de Crillon)이 된 건물이고, 오른쪽은 프랑스 해군성 건물이었다.

그리고 두 건물 사이에 무슨 그리스 신전처럼 보이는 뒤쪽 건물은 마들렌느 교회(Église de la Madeleine)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는 장면을 담은 여러 그림들을 대조해보면 기요틴이 설치되었던 곳은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는 자리로 추정된다고 하자 딸이 물었다.
 
"왜 기요틴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너무 참혹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딸이 얼굴을 찡그린다.

"많이 죽었죠?"
 

그랬다. 어떤 자료엔 1350명, 어떤 자료엔 1만 7천 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상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2천 5백만 명이었는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는 공포정치 기간 중 반동분자로 붙잡힌 자는 모두 30만 명이었다.

연구자에 따르면 당시 각 지방에 우후죽순처럼 생긴 혁명위원회 숫자만 모두 4만 4천 군데였다. 그러니 각 위원회에서 반동분자 1명씩만 형장으로 보냈다 해도 처형자가 4만 4천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실제론 10만 명도 보수적으로 잡은 숫자라는 주장까지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네요."
"상상해봐라. 기요틴에 잘린 10만 개의 사람 머리를! 그 끔찍함을 모두 잊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 염원이 아이로니컬하게도 광장 이름에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광장 이름은 콩코르드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냐?"
"화합, 조화?"


나는 딸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왜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의 이름을 붙였을까? 원래 이름은 '루이15세 광장(Place Louis XV)'이었다. 그러다 혁명이 나자 '혁명광장(Place de la Revolution)'이란 이름을 붙였으나 극좌파의 공포정치에 반대해 온건파 시민계급이 제1공화정을 세운 뒤에는 '콩코르드 광장'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건 분명 싸우지 말고 화합하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좌우대립이 격한 시기에 온건파나 중도세력은 존립이 어려워진다. 마침내 제1공화정을 뒤엎고 등장한 나폴레옹은 광장 이름을 '루이15세 광장'으로 되돌렸고, 루이 18세와 샤를 10세의 왕정복고 시대에는 '루이16세 광장'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필리프(Louis Philippe)는 '샤르트르 광장(Place de la Chartre)'이란 이름을 잠시 붙였다가 다 잊고 화합하자는 뜻에서 제1공화정 시대의 '콩코르드 광장'이란 이름을 다시 복원시켰다.
 
"그럼 기요틴 자리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데는 어떤 뜻이 있는 건가요?"


좋은 질문이다. 루이 15세의 기마상을 파괴한 자리에 처음엔 '기요틴', 그다음엔 혁명이 만든 '자유의 여신상', 그다음엔 '루이 15세 기마상', 그다음 왕정복고 시대엔 '루이16세 기마상'을 세웠다.

이건 그냥 내 해석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식의 좌우개념으로 접근해선 정치보복과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떠올리게 할 뿐이라는 당대인의 판단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 루이필리프는 마침 오스만 튀르크의 이집트 총독이 선물한 이집트 룩소르(Luxor)의 오벨리스크가 파리에 도착하자 그 방첨탑(方尖塔)을 기요틴 자리에 세우고 '콩코르드 광장'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던 게 아닐까?

딸이 다시 물었다.

"그게 화합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요?"

없다. 이집트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테베의 람세스 신전에 세웠던 기념비에 무슨 좌우개념이나 중재를 위한 화합의 개념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좌우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떠올리지 않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프랑스 역사와 아무 연관도 없는 오벨리스크를 보면 사람들은 기요틴 대신에 3천 년 전의 이집트 문명을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해석을 듣고 난 딸이 한마디 했다.

"속임수네요."

아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본질적으로 현실이 비합리적인데 선악을 구별 짓는 당대의 규범이 궁극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긴 시각에서 본다면 프랑스 역사뿐 아니라 사사건건 거대담론을 갈라치는 한국 사회의 진영논리나 이념은 구원이 될 수 없다. 모든 기준은 변한다. 동양 철학을 빌리면 만물은 역(易)이고,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빌리면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다.

"걸으시겠어요?"

딸이 바람 속으로 쭉 뻗은 대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걸어야지. 여기서부터 샹젤리제 거리가 시작되는데."

태그:#바스티유광장, #바스티유시장, #콩코르드 광장, #파리여행, #강재인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