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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던 나라였다. 그 시절 예비군훈련장에서는 정관수술을 하면 훈련을 면제해 줬고, 루프와 각종 피임제를 들고 시골 구석구석을 누비던 공무원들은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국민의 밤일까지 관리하려 들었던 정부 기조는 2000년대 들어 바뀌기 시작했다. 변한 건 정부만이 아니었다. 출산뿐만 아니라 결혼마저 기피하는 세대에게 정부와 지자체가 출산장려금 등 각종 지원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백약이 무효다. 

강력한 한 자녀 정책으로 이른바 '소황제'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던 중국이 내년부터 산아제한정책 자체를 폐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한때 국가 주도로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을 펼쳤던 두 나라의 변화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리얼 장편소설, 김순진 옮김. 자음과모음 출판
▲ 석류나무에 앵두가 열리듯 리얼 장편소설, 김순진 옮김. 자음과모음 출판
ⓒ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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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설 <석류나무에 앵두가 열리듯>는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 낙태가 당연시되던 산아제한정책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야기는 외설적인 욕설과 섹스, 피임과 낙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근엄함을 강조하는 한국문학에 익숙한 사람에겐 통속소설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표현이 적나라해서 풍경이 쉬이 그려진다. "오늘 똥오줌이 없다면 어떻게 내년 쌀이 향기롭겠어?"와 같은 관용 표현은 귀에 쏙쏙 들어온다. 돌려 말하는 것 같은데 오히려 노골적으로 들리는 이야기는 이 소설이 갖는 매력이다. 

<석류나무에 열린 앵두>는 산아제한정책의 폐해를 꼬집는 것 같지만, 정치 모리배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정치 소설이다. 저자 리얼은 일반시민이 일상으로 겪는 사건을 배경으로 그들이 겪는 '곤란함'에 주목하며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향촌에서 '계획 밖의 임신'은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계획 밖의 임신은 단호하게 떼어내야 해. 사건이 하나라도 터지면 기존 마을위원회 조직 구성원 모두 아주 멀리 쫓겨나서 아무도 선거에 입후보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 칭수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제기랄, 지독하네. 목숨 걸고 싸워야겠군."" -33쪽

외국소설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낯익은 이름을 만나는 일은 반갑고 몰입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석류나무에 열린 앵두>에는 베이징현대차가 당 간부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배우 김희선이 중국인들이 최고 미녀로 꼽는 배우로 등장한다. 공부 좋아하고 시대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 할 사람 정도로 묘사된다. 저자의 취향일지도 모르지만 2000년대 초반 중국에서 한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에 김희선이라고 불리는 배우가 있지? 몰라? 셴위, 넌 공부 좋아하는 사람 아니었어? 어떻게 책도 안 보고 신문도 안 보는 사람으로 변한 거야? 김희선은 한국 최고 미녀야. 이 사람 별명이 바로 중국의 김희선이야. 시대가 달라져도 예쁜 얼굴이면 먹고살 수 있는 법이야. 올라갔다고!" -90쪽

소설이 보여주는 중국 향촌은 빠르게 자본주의에 물들며, '입에 기름이 번들거리고 방귀를 뀌어도 기름이 둥둥 떠다닌다'라고 권력을 비웃기도 한다. 그럴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계급적이고 집단적이며 체제 순응적이다. 조직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조직이 원하는 바를 당연시한다.

"하늘이 크고 땅이 커도 뱃속 문제만큼 큰 것은 없다"던 가르침을 따르던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배고픈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자들의 배가 불러오는' 산아제한정책을 지상과제로 다룬다.

그 가운데 국가주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중국 향촌의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국가주의에 물든 이들에게 '백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면 안 된다'라는 말 따위는 이상일 뿐이다. 개혁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방식은 어딘지 많이 낯익은 풍경이기도 하다.
 
"천 명을 잘못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 그 말을 하면서 쥔제는 손에 들고 있던 볼펜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휙 그어 내렸다. 그의 손동작은 아주 경쾌하면서도 우아하고 멋들어졌다. 쥔제가 말했다. "방법이 조금 잔인해서 나도 반감이 있기는 해. 하지만 누구 말처럼 개혁을 하는 거잖아. 어떻게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있겠어." -247쪽

한국문학에 나타나는 향촌은 꿈속에라도 가고 싶은 어머니 같은 모습, 무엇이든 다 받아줄 것 같은 넉넉한 공간이다. 그 곳을 정지용은 '향수'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촌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름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2004년에 발표된 <석류나무에 열린 앵두>는 오늘날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 선 중국 현실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그 가운데 저자 리얼은 기존 문학이 그려왔던 향촌에 대한 이상을 깨버렸다. 언젠가 귀향을 꿈꾸는 이들에게 그려지는 모습은 문학이 안겨준 환상에서나 가능하다고 못을 박아 버렸다. 

<석류나무에 열린 앵두>에서 향촌을 배경으로 음모와 술수, 줄서기와 합종연횡이 물밑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모습은 중앙 무대에서와 다를 바 없다. '주임'이라는 완장이 가진 권력에 다가서기 위해 자신을 찰떡같이 믿는 상사를 배신하는 이들은 결코 순박하지 않다.

오히려 영악하고 은밀하며 끈질기다. 때로는 노골적이고 폭력적이기도 한 향촌 사람들은 세속화된 욕망을 감추려 들지 않는다. 향촌 사람들에게도 정치는 일상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는 사실을 소설은 말해준다. 

<석류나무에 앵두가 열리듯>이라는 말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에게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이미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예외 없는 법칙이 없듯이 향촌의 일상이 정치라고 해서 인정미까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석류나무에 앵두가 열리듯

리얼 지음, 김순진 옮김, 자음과모음(2018)


태그:#중국, #향촌, #정치, #가족계획, #산아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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