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정홍 시인의 시집 <감자가 맛있는 까닭>.
 서정홍 시인의 시집 <감자가 맛있는 까닭>.
ⓒ 창비교육

관련사진보기

 
"학교 앞에 나란히 붙은 현수막 두 개
-김동수 군 서울대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쌀값이 개 사료보다 싸다. 쌀값을 보장하라!
나는 자꾸 한쪽으로만 눈길이 간다."


서정홍 시인의 시 "청년농부 2" 전문이다. 경남 합천 황매산 기슭의 작은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서정홍 시인이 이 시를 포함해 '청소년시'를 한데 묶은 시집 <감자가 맛있는 까닭>(창비교육 간)을 펴냈다.

시인은 산골마을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하고 있다. 시인은 시집에 등장하는 '정구륜', '김수연', '서한영교'와 함께 살며 농사도 짓고 이야기도 나눈다.

그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닭을 기르고, 면사무소 옆에 생긴 피자가게를 걱정하며, 우리밀 붕어빵을 구워 팔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청소년들의 시에 녹아 있다.

"오늘까지 저를 가장 크게 성장시킨 일이 무어냐 하면요. 중학교 1학년 때요, 어머니와 배추밭에서 배추벌레 똥 따라다니며 배추벌레 잡은 일이에요. 그 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요. 하루 종일 무릎 꿇고 배추벌레 잡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어요. 한 두 시간 배추벌레 잡다 보면 일어서기도 힘들고, 앉기도 힘들만큼 무릎과 허리가 아파요. 서너 시간 뒤에는 온 몸이 아파 배추벌레처럼 오그라들어요. 도 닦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한 두 시간도 못해요. 제가 그걸 참고 하루 내내 배추벌레 잡았거든요."(시 "자기소개" 전문).

"산골 면사무소 옆에/피자 가게가 처음 생겼습니다//청년 농부 셋이 모여/피자는 주문하지 않고/피자 가게 주인 걱정을 하며/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한 판 주문해도 배달해 줄까?"/"두 판은 주문해야/오토바이 기름값이라도 나올 걸"/"그럼, 세 판 주문하면?"/"두 판이든 세 판이든/눈이 내려 배달하기 힘들걸."//깊은 산골마을에/함박눈은 자꾸 쌓이는데…."(시 "청년농부8").

청소년들의 마음이, 일상이, 대화가 '시' 그 자체다. 하루 내내 배추벌레 잡은 일이 자기를 가장 크게 성장시켰다고 한다. 누구든 힘든 일을 하고 나면 '해냈다'는 뿌듯함이 생기고 성장한 것처럼 느껴지듯이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피자 가게를 두고 나누는 그들의 대화가 정겹다. 그들이 사는 산골에 함박눈처럼, 그런 삶이, 그런 '시'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 같다.

청소년들은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출세하기 틀렸다"(청년농부 5)는 것을 알면서도 주눅들지 않는다. 길을 잃고 돌아다니는 닭이 "자기 닭인지 남의 닭인지"를 느낌으로도 아는 그들이다.

"작은 산골마을 언덕에/닭 한 마리가 길을 잃고 돌아다닌다//"구륜아, 저기 돌아다니는 놈/네가 키우는 닭 같은데?"/"제가 키우는 닭이 아닌데"/"내가 보기에는 비슷하게 생겼는데?"/"비슷하지만 느낌이 달라요."/"느낌이 다르다고?"//청년 농부 구륜이는/닭을 닭장 안에 가두어 키우지 않고/산과 들에 풀어 놓고 키운다/한눈팔면 오소리가 물어가기도 하고/매가 날아와 채 가기도 하는데//날마다 한 마리 한 마리/꼼꼼하게 세며 돌보다 보면/자기 닭인지 남의 닭인지/느낌으로 알 수 있다/청년농부 구륜이는."(시 "청년농부 3" 전문).

"가을걷이 마치고/떨어진 쌀값만큼이나/고개를 푹 숙이고/돌아오신 아버지//아버지!/하고 부르면/고개가 땅에 닿을 것 같아/불러 보지도 못하고"(시 "아버지" 전문).


시인은 그들한테 공부 잘하기를 원하지 않고, "못난 것들이 하나같이 땀 흘려 일해서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린다는 것"("못난 것들이")과 밥 한 끼 먹는 것도 허투루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땀 흘려 일하는 것도 공부지만/일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게 더 큰 공부다//좋은 책을 읽는 것도 공부지만/올바르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게 큰 공부다//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부는/누가 무어라 해도//나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섬기며/서로 사이좋게 살아가는 것이다"("공부" 전문).

이안 시인은 발문에서 "이 책은 청소년시집이다. 어른 시인이 청소년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시로 써서 묵은 것이다"며 "사랑하는 아들에게 쓴 편지처럼, 농부 시인이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건네는 '시 편지'이다"고 했다.

서정홍 시인은 "이 시집을 읽으면서, 우리가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지냈던 소중한 '그 무엇'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며 "까닭도 없이 울고 싶을 때, 내 곁에 아무도 없다고 여겨질 때,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을 때, 바쁜 걸음 멈추고 잠시라도 나를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창비교육'은 시인이 쓴 청소년시를 발굴하고 정선해 '창비청소년시선'을 내고 있으며, 이번 시집은 16권째다.

서정홍 시인은 1992년 전태일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과 서덕출문학상을 받았다.

태그:#서정홍 시인, #창비교육, #황매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