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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소말리아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수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1402년 우리 선조들이 그 도시를 지도에 표기해 놓았다는 사실.

모가디슈(Mogadishu)! 이번 호에서는 모가디슈와 나일강의 이름을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탐사해 보겠습니다. 아울러 강리도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서도 논해 보겠습니다.

먼저 모가디슈의 지명에 대해 알아봅니다. 영어로는 Mogadishu이지만 현지 소말리아어로 무크디쇼(Muqdisho), 아랍어로는 무카디슈/무하디슈(Muqadīshū)라 합니다. 지리적 위치를 현대 지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소말리아 모가디슈 모가디슈 위치
▲ 소말리아 모가디슈 모가디슈 위치
ⓒ maph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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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동아프리카 인도양 연안의 도시입니다. 모가디슈는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영화를 누렸습니다. 13세기부터 이슬람 거점 도시로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모로코 출신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1331년 소말리아 해안에 나타났을 때 모가디슈는 번영의 절정에 올라 있었다 합니다. 부유한 상인들이 수없이 많고 고급 직물을 이집트로 수출하는 큰 도시로 이븐 바투타는 모가디슈를 묘사했습니다.

한편 15세기에 그곳을 방문한 포르투갈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는 4층 혹은 5층 건물이 허다하고 중앙에 궁성들이 있으며 원통 모양의 뽀쪽 탑 사원이 많은 대도시라고 언급하였습니다(영문 위키피디아 참고).

이 유서 깊은 중세 도시를 과연 1402년 우리 선조들이 비단 지도에 붓으로 적어 넣었을까요? 이런 의문을 안고 이제 지명 탐험으로 들어갑니다.

일본의 교토대 스기야마 교수는 아래 지도의 麻哈苔來(중국어 발음 '마하타이라이')를 무카디슈/무하디슈(아랍어)로 봅니다(붉은 화살표). 한편 카자흐스탄의 눌란(Nurlan)은 麻哈苔來를 麻哈苔束(마하타이슈)의 오기로 봅니다. '마하타이슈'는 아랍어 지명 '무하디슈'와 매우 흡사합니다. 참고로 강리도의 서방 지명은 아랍어에서 따온 것이 많습니다.

아래 지도는 강리도의 모사본(일본 교토대 소장)인데 麻哈苔來의 위치를 현대 지도와 비교해 보면 모가디슈의 지리적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명의 발음 및 지리적 위치 그리고 도시의 유서 등으로 보아 이곳을 모가디슈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리도 서방부분과 모가디슈
▲ 강리도 서방부분과 모가디슈
ⓒ 김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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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바로 위를 보겠습니다. 羅的里尼(중국어 '루어디리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무엇을 가리킬까요? 힌트는 그 바로 왼쪽의 굵고 푸른 물줄기, 즉 나일강입니다. 몽골 및 원나라 역사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중국의 류잉셩(劉迎勝, Liu Yingsheng) 교수(남경대)에 의하면 '羅的里尼(루어디리니)'는 바로 나일강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도 나일강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페르시아어 '루드이닐(Rud-i-Nil)'의 음을 중국어로 옮긴 것이 '羅的里尼(루어디리니)'임이 확실하다고 류잉셩은 주장한다." - Nurlan, <The Silk Road 14(2016)>, 110쪽

이상으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1402년에 제작한 세계지도에 나일강의 이름과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가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강리도의 가치

강리도가 지닌 가치는 어떤 것일까요? 강리도의 세계사적 가치를 강조하면 '국뽕(지나친 국수주의를 뜻하는 신조어)'이라는 조건반사가 일기도 합니다. 그건 엉뚱한 과녘을 쏘는 화살입니다. 강리도 예찬의 발신처는 국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나라 밖 유수한 대학의 학자들입니다. 

강리도가 서양에 최초로 소개되어 놀라움을 일으켰던 것은 우리 국내에서는 강리도의 존재도 모르고 있을 때인 1946년이었습니다. 그 문열이는 발터 푹스(Walter Fuchs, 독일인)라는 저명한 동양학자였습니다. 1953년에 발간된 지리학 전문 잡지 <Imago Mundi>에서 발터 푹스는 이런 요지로 강리도를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1946년 출간한 중국학 소책자에서 1402 강리도에 대해 지면을 좀 할애한 바 있다. 이 중요한 문헌(강리도)을 역사 지리학도들에게 보다 널리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져 여기에서 좀 더 설명하고자 한다.

(...) 강리도의 극동 지역에 대해서는 1938년 아오야마(본의 역사학자)에 의하여 연구되었다. 하지만 강리도의 서방 지역은 여태 소개되거나 연구된 적이 없는데 사실상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부분은 그곳이다.

(...) 강리도의 좌편 아래쪽에 그려진 아프리카 대륙의 모습이야말로 매우 흥미롭다. 거기 나타나 있는 삼각형 모습의 아프리카,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남단의 특이한 형태를 그린 지도는 1500년 이전 서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Walter Fuchs, <Imago Mundi> Volume 10, 1953

참고로 강리도보다 훨씬 크면서 유사한 세계상을 담고 있는 지도가 중국에 하나 있습니다(아래 지도). '대명혼일도'라는 이름의 이 지도를 외부인으로서 최초로 열람한 후 소개한 학자도 또한 발터 푹스였습니다.

그는 대명혼일도의 제작 시기를 16세기 후반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근래 중국학자들은 대체로 1389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게 맞는다면 대명혼일도가 강리도보다 13년 앞서게 됩니다. 대명혼일도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이 분분하지만 서양 학계에서는 중국 측 주장에 대하여 대체로 유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 발터 푹스의 영향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명혼일도의 지명은 홍무 2년 즉 1389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중국학자들은 이 지도가 1389년 혹은 그보다 조금 후에 만들어졌다고 결론을 내린다.

다른 학자들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지니고 있는데 까닭인즉 1389년에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대명혼일도의 원천 지도(대명혼일도 제작시 참고했을-역자)였을 것이고 대명혼일도 자체는 그보다 훨씬 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영문 위키피디아 참고)

대명혼일도와 강리도의 결정적 차이

그럼 이제 대명혼일도와 강리도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전체적인 세계상은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다시피 대명혼일도는 한반도가 아주 엉성하고 서쪽의 아프리카도 좌단 부분이 잘려 나간 형상입니다. 강리도에는 만리장성이 선명한데 대명혼일도에서는 만리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편 강리도의 인도는 중국대륙에 함몰되어 인식하기 어려운데 대명혼일도에서는 돌출된 반도로 그려져 있습니다. 또 하나의 큰 차이점을 들자면 강리도는 지도 하단에 제작 배경과 제작자 및 제작 시기가 명시되어 있는 데 반해 대명혼일도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두 지도의 제작 시기의 선후는 차치하더라도 보다시피 강리도의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두 지도가 같은 세계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몽골세계대제국의 유산입니다. 강리도와 대명혼일도 제작 시 모본으로 삼았던 지도가 몽골제국의 지도였음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강리도의 하단에 적혀 있는 글에 모본 지도의 이름과 제작자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몽골제국 시대에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세계상이 드러났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 문헌적 증거가 바로 강리도라는 지도, 그리고 그 하단에 적힌 기록문이라는 말이지요. 강리도가 세계사적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대명혼일도 대명혼일도
▲ 대명혼일도 대명혼일도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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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 류코쿠본
▲ 강리도 류코쿠본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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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방에서 나온 세계지도가 서양보다 훨씬 앞서 아프리카의 전체 모습을 그렸다는 사실은 서양인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그 땅의 주인인 아프리카 사람들은 과연 강리도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요? 그들의 평가와 견해를 알아보겠습니다.

강리도와 대명혼일도의 가치를 알아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회의장 진왈라(Ginwala) 여사는 2002년 11월 남아공 국회의사당에서 두 지도를 전시하였습니다. 전시회는 남아공 내외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외신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당시 남아공 학자의 강리도 논평입니다. 

"강리도는 대명혼일도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동부, 남부, 서부를 정확히(accurately) 그리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항해한 누군가의 작품임에 틀림없다. 유럽인들은 강리도 이후 60년이 지나서야 남부 아프리카에까지 항해한다.

대명혼일도와 강리도가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국회의사당에 전시된 강리도 사본은 일본의 고 오부치 전 총리가 Ginwala 남아공 국회의장에게 기증한 것이다.

강리도는 서양의 고지도보다 더욱 정확하게 남부 아프리카의 삼각형 형상을 그렸다. 나아가 아프리카 남부에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나타나 있는데 이는 유명한 오렌지 강일 것이다. 이러한 지리 정보는 희망봉을 돌아 항해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 Lindy Stiebel, 남아공 크와줄루 나탈 대학 교수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강리도에 대한 가치 평가 혹은 예찬은 그 발신처가 국내가 아닙니다. 서양에서 근래 발간되는 세계사 혹은 지도역사 관련 서적에서 강리도의 세계사적 가치를 소개하고 있는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아래 사진은 필자가 수집한 책자들).
  
강리도 아카이브 강리도 관련 외서
▲ 강리도 아카이브 강리도 관련 외서
ⓒ 김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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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필자는 우리의 국사사전이나 세계사연대기 같은 책자에서 강리도를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조차 등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라 밖에서는 눈을 크게 뜨고 보는데 우리는 눈을 감고 있는 형국이지요. 
  
역사사전 국사 사전과 세계사 연대기
▲ 역사사전 국사 사전과 세계사 연대기
ⓒ 김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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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를 둘러싼 오해

강리도가 중국 지도를 베낀 것인데 무슨 호들갑이냐는 반응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지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존의 다른 지도와 지리정보를 취합·활용하여 작성합니다. 처음부터 자기 혼자 만든 경우는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강리도 제작자들이 당시 가장 우수한 중국의 두 지도를 입수하여 모본으로 삼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베끼거나 기계적으로 합성한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와 일본을 새로 추가하여 조선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만들어낸 독자적인 세계상입니다. 아프리카를 넣되 실제보다 훨씬 작게 배치한 것은 오류라기보다는 당시로써는 합리적인 설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아마도 모본도 그런 모습이었을 것임). 당시 아무 관계도 교류도 없는 아프리카를 한반도보다 몇십 배 크게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요? 고급 비단에 말입니다.

한편 관점을 달리해 보면, 15세기 서양의 유명한 프톨레미 유형의 세계지도나 중세 아랍의 대표적인 세계지도(알 이드리시 지도)는 강리도와는 반대로 아프리카 및 그에 이어지는 대륙을 터무니 없이(?) 크게 그렸습니다. 또 서양 지도들은 중심에 예루살렘을 터무니없이 크게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강리도는 그와 반대로 한반도와 중국을 크게 그렸을 뿐입니다. 더구나 서양 지도들은 한반도를 그리지 않았지만 강리도는 서방까지 그린 점에 있어서 양자의 우열이 드러납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강리도가 중국 중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세종이 중국에 사대했다거나,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지 않았다고 지금의 입장에서 비판한다면 말이 안 될 것입니다.

강리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아메리카 대륙, 오세아니아 주, 남극 및 북극의 존재를 몰랐을 때입니다. 당시 국제질서 속에서 중국의 위상은 차치하고라도 단순히 지도 제작의 관점에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리도 제작자가 중국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어디를 가운데에 놓아야 했을까요? 중동을? 유럽을? 한반도를? 만일 호기 있게 한반도를 중심에 위치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오른편 일본 너머의 넓은 공간을 모두 태평양 바다로 채워 넣어야 할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공간(비단) 낭비가 초래되고 구도도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강리도는 비록 중국을 중심에 위치시켰고 중국이 압도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을 주변화하거나 왜소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상대적 비례를 따져 보면 오히려 한국을 중국보다 훨씬 크게 그렸습니다. 위치의 중심은 중국에 두었지만 상대적 무게(혹은 크기)의 중심은 한국에 두었다는 사실은 음미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강리도는 당시로써는 그 범위나 정확성에 있어서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우수한 세계지도였을 뿐 아니라 우리 나름의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세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성과 자주성(주체성)이 융합된 한국 혼의 초상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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