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사랑> 포스터

영화 <내 사랑> 포스터 ⓒ 오드

 
찬바람이 온 몸을 스치는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주책없는 감정에 매몰되기 전에 재빨리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나야, 음식물쓰레기 버리러 나왔는데 갑자기 바람이 차서 전화했어." 감정에 있어서는 '화난다', '웃기다'와 같은 단순한 것밖에 없는 내 친구는 "바람이 왜?"한다. 그녀에게 찬바람은 '춥다'뿐이다.

그런 그녀와 몇 마디를 나누다보면 쓸데없이 에너지 소모가 많은 감정들이 확 깬다. 내게 얼마나 유용한 친구인지. '이성 갑'인 그녀와 '감성만 갑'인 내가 친구인 건 자연의 법칙인 것 같다. 두루두루 보완하고 살라고.
 
그녀랑 얼마 전 <렛더 선샤인 인>을 다운받아 봤다. 쥴리엣 비노쉬가 주인공인 '사랑 찾아 삼만 리'하는 영화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대사들이 주옥같다. 사랑의 통찰이 담긴 언어들과 쥴리엣의 빛나는 연기. 점쟁이를 찾아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웃으면 나도 웃고 그녀가 울면 나도 울었다. 서글픈 건 그 점쟁이 또한 얼마 전 실연당하고 마음의 상처로 고통 받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녀에게 하는 조언이 그녀를 향하기도 자신을 향하기도 하는 것 같다. 점쟁이라도 자신의 운명을 다 알 순 없을 테니.
 
영화가 끝나고 친구가 말한다. "대체 뭘 말하고 싶은 영화인지 모르겠어." 진정한 사랑이 고픈 여자의 대책 없는 흔들림이 이성적인 그녀에게 와 닿을 리 없다. 뻔히 속이 보이는 저런 남자들과 연예를 하고 상처 받느니 그 시간에 자기개발을 해야 속이 시원한 친구다. 뭐라 잘못 대답했다가 정신 못 차린다고 혼이 나는 수가 있으니 입을 다물었다.
 
기승전결이 명확하지 않은 이런 종류의 영화는 주인공의 감정대로 흘러가다 그 속에서 지나간 나를 보기도하고 스쳤던 누군가를 떠올리게도 한다. 때문에 잔상이 많이 남는다. 나는 이 영화가 좋아서 세 번을 봤다. 왜 좋냐고 묻는다면 대장금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음식에서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했는데 왜 홍시 맛이 나냐고 물으시면 뭐라 답해야 합니까?" 좋아서 좋은 거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엔딩 크레디트 다 올라가도록 일어서지 못한 영화
 
 영화 <내 사랑> 스틸 컷

영화 <내 사랑> 스틸 컷 ⓒ 오드


그런 친구도 나도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도록 일어서지 못한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내 사랑>이다. <내 사랑>은 캐나다 나이브 화가 모드 루이스와 그의 남편 에버렛 루이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나이브 화가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자연과 현실에 대해 직관적이고 소박한 태도를 가진 화가를 뜻한다). 남편 역은 말이 필요 없는 배우 에단 호크가 맡았고 모드 루이스역은 영화를 보고나면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샐리 호킨스가 맡았다.
 
이 영화의 감독 에이슬링 월쉬는 박찬욱 감독이 만든 <아가씨>의 원작인 <핑거스미스>를 찍은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감독이다. 몇 년 전 <핑거스미스>를 보고 충격에 빠졌다. <식스센스>를 능가하는 최고의 반전영화였다. 스토리뿐 아니라 두 여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의 흐름도 놀라웠다. 샐리 호킨스와 여기서 이미 호흡을 맞춘 바 있는 감독은 모드 루이스역에 고민 없이 그녀를 캐스팅했고 십년 넘게 공들여 만든 작품이 <내 사랑>이다.
 
모드는 어린 시절부터 심각한 관절염을 앓아 손, 발 관절이 비틀려있다. 걷는 것도 불편하고 물건도 제대로 잡기 힘들다. 부모가 죽자 하나뿐인 오빠는 재산을 다 차지하고 그녀를 고모에게 보낸다. 냉정한 고모 밑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외롭게 지내는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은 그림을 그리는 거다. 밤이면 몰래 집을 빠져나가 클럽에도 가본다. 청춘들이 몸부림치고 젊음의 향기가 가득한 그곳에서 누군가 친구로 다가오길 기대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다.

시종일관 윽박지르고 무시하고 뺨까지 때린 남자
 
 영화 <내 사랑> 스틸 컷

영화 <내 사랑> 스틸 컷 ⓒ 오드


고아로 자란 가난한 생선장수 에버렛은 세상을 향해 분노로 벽을 치고 있다. 글도 모르고 돈도 없으니 행여나 만만히 보일까 두려워 괴팍한 성질로 무장한다. 그런 그가 가정부 구인광고를 냈고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진 모드는 그의 가정부로 들어간다. 그의 집은 마치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평생 살고 싶은 작은 집'이다.
 
상처받고 외로운 영혼끼리 서로 오순도순 살면 좋으련만 인간관계에 서툰 이 남자는 시종일관 윽박지르고 무시하고 급기야는 뺨을 때린다. 나는 이 장면은 없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1인이다.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말이다. 너무 뜬금없고 폭력적이고 가슴이 아프다.
 
그녀는 그와 지내며 벽에, 판자에 그림을 그린다. 우연히 그녀의 집에 들렀다가 그녀의 그림을 발견한 미술애호가 산드라에 의해 그녀는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열린 문틈사이로 그녀가 벽에 그려놓은 닭을 보고 그녀의 특별함을 읽어낸 산드라. (그녀는 얼마 전 치킨 스프를 만들기 위해 닭을 잡았었다. 아마도 그) 닭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해주고 싶어서 그렸다고 말하는 그녀. 모드는 자신의 비틀린 발도 포근히 감싸줄 것만 같은 산드라의 멋진 구두에 시선을 뺏기고 산드라가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 장면이 느닷없이 뭉클하다. 그녀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생선 배달 수레에 모드를 태우고 노을 지는 초원을 가로지르는 명장면. 영화 포스터에도 나오는 그 장면 말이다. 재밌는 건 모드가 그림을 팔아 돈을 벌기 시작하고부터 남자는 그녀를 수레에 태운다(그 전에는 위태롭게 걸어 다닌다). 그리고 심지어 조금 큰돈을 벌자 이제 아예 모드를 그를 향해 마주보게 앉히고 달린다. 아. 이런 리얼리티. 돈은 이래저래 힘이 세다. 내가 삐뚤어진 건가. 그가 진심으로 동반자로써 그녀의 자아실현이 기뻐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사실은 초반에 뺨 때린 것 때문에 곱게 안 보인다.
 
어린 시절 아빠의 발등에 두 발을 올리고 걸음마 하듯이 춤을 춰 본적이 있다. 40년도 넘은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그런 장면이 나온다. 모드와 에버렛이 결혼하던 날 밤. 그의 발등에 두 발을 올리고 춤을 추던 그녀는 '한 쌍의 양말처럼 살자'고 한다. 얼마나 로맨틱한지. 저녁을 먹으며 아들에게 이 장면을 설명하다가 실험해 봤다. 덩치가 산만한 아들은 발등이 찢어질 듯 아프다고 난리다. 극한 고통으로 인하여 이 장면은 멜로가 아니라 액션으로 판명 났다.

너무 순수해서 뭉클한 그녀의 '그림' 
 
 영화 <내 사랑> 스틸 컷

영화 <내 사랑> 스틸 컷 ⓒ 오드


그녀의 그림은 동화적이다. 너무 순수해서 그 자체로 뭉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창을 통해 본 세상이 전부였던 그녀는 그녀의 삶이 액자 속에 있다고 말한다. 액자 안에 그녀의 눈을 통과한 인생과 사랑, 상상과 추억을 담았다.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독립적인 그녀는 거친 야생마 같은 에버렛도 결국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순한 말로 만들어버리는 능숙한 조련사다.

자기주장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한 인간으로써 우아함과 품위를 잃어버리지 않는 존엄한 존재. 상대의 자존감을 세워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높은 지적 수준, 그리고 돌직구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 할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 모드.
 
모드는 점점 유명해지고 닉슨 부통령도 그녀의 그림을 구입한다. 처음엔 이 모든 게 좋았던 에버렛은 세상의 관심이 그녀에게만 쏠리니 점점 자격지심이 생긴다. 남녀 사이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이게 발동하는 순간 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국 둘은 잠시 떨어져 지낸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서로를 향한 마음을 깨닫고 둘은 다시 굳건한 사이가 된다. 비온 뒤 더 굳어진 땅처럼. 슬픈 건 이런 걸 깨닫는 순간은 항상 너무 늦게 온다는 거다. 그녀가 쓰러지고 그는 고백한다. "왜 나는 당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그의 슬픈 독백에 그녀는 낮게 답한다. "I was loved." 그렇게 그녀는 갔다.
 
마음이 한 평은 넓어진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한 영혼이라니. 이제 추석이다. 몸도 마음도 바쁘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기름 냄새도 싫고 남편도 싫다. 죄가 없어도 밉고 죄가 있으면 더 밉다. 이럴 때 마음을 달래줄 영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번 연휴에 <내 사랑>을 다시 봐야겠다. 그러는 사이 혹시 나도 깨닫게 되려나.
내 사랑 여성 영화 나이브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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