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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천이 청계천 본류에 합류하는 곳은 '스프링'이란 본명보다 '소라탑'이란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진 조형물이 있다. 소라탑을 비롯해 이 일대에 위치한 동아일보, 광화문빌딩 등에 관한 이야기는 앞선 연재(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에서 이미 이야기했으므로 이번 연재글에서는 제외했다. 따라서 답사의 출발점은 광화문네거리에 위치한 '기념비전'으로 하고자 한다.

건물에도 신분과 위계질서가 있다
 
 1902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기념비전'
 1902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기념비전"
ⓒ 서울시역사편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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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전'은 서울 사람들은 물론 지방사람들조차 서울에 와본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보았을 만큼 인구이동이 가장 빈번한 광화문네거리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정확한 명칭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뿐만 아니라 무슨 근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자료는 이를 '비각'으로 칭하며, 위키백과 역시 "속칭 비각"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는 마치 대학생을 중학생이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명칭이다. 사람 이름에도 항렬자를 쓰듯 조선시대는 궁궐 건물들의 이름에도 위계질서가 있다. 과연 어떻게 그 질서가 표시되는지를 살펴보자.

조선시대 특히 궁과 관련된 건물은 모두 자신의 당호를 갖는데 그 끝 자를 통해 각 건물의 격과 크기를 가늠할 수 있도록 했다. 당호의 끝 자는 모두 집이라는 뜻의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여덟 글자 가운데 하나를 사용하였다.

이는 엄격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규모가 큰 것부터 작은 것으로 가는 순서이며, 품격이 높은 것에서 낮은 것으로 가는 순서이다. 또 건물의 용도에 있어서도 공식에서 일상주거용으로, 다시 비일상적이며 특별한 용도로, 휴식공간으로 이어지는 순서이다. 이는 결국 건물의 신분이요, 위계질서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표와 같다.
    
 조선시대 건축물의 지위와 용도에 따른 구분
 조선시대 건축물의 지위와 용도에 따른 구분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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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殿)'은 '국왕'과 관련된 건물이므로 이곳에 위치한 '기념비전' 역시 일반 사대부와 관련된 건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편 사찰이나 성균관, 향교 등의 건물에도 이러한 건물의 지위와 위계가 적용된다.

사찰의 경우 부처님을 모신 건물은 '전'(예:대웅전, 미륵전 등)이며, 사람을 모신 건물은 '당(堂)'이다. 또 성균관과 향교에서 공자의 위패를 모신 건물을 '대성전' 유생들의 강학건물은 '명륜당'으로 부른다. 따라서 당호의 끝자리에 '전'자가 붙은 건물은 임금·부처·공자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꿈과 좌절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 건물은 왕과 관련된 것이다. 비석에는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 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송'(大韓帝國 大皇帝 寶齡六旬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頌)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즉 고종황제 즉위 40년이 된 것(어극사십년)과 51세 생일(망육순: 60을 바라본다는 뜻)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당시 황태자인 순종이 썼다. 현판에는 간략하게 '기념비전'이라고만 적혀 있다. 하지만 이것이 건립된 1902년 전후의 상황을 돌아보면 고종황제의 꿈과 좌절이 그대로 드러난다.

러시아공사관에서의 피난생활이었던 아관파천을 접고 광해군 이후 궁궐로서 서자취급을 받던 경운궁을 법궁으로 삼고 제일 먼저 조선이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고종이 정한 국호는 '한'(韓) 한 글자다. 황제국인 중국의 국호는 진·한·당·송·명·원 등 한 글자며, '조선'과 '일본' 등 변방국의 국호는 두 글자였다. 그 앞 뒤의 '대'와 '제국'은 당시 '대영제국'처럼 붙은 수식어에 불과하다.

 
 위에 표시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에 조선정부에 의해 건립된 근대건축물이며, 1898년에 지어진 명동성당과 정동교회는 민간건축물로 위 지도에서 제외하었다.
 위에 표시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에 조선정부에 의해 건립된 근대건축물이며, 1898년에 지어진 명동성당과 정동교회는 민간건축물로 위 지도에서 제외하었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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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국호를 황제국으로 바꾸고, 또 황제만 갖고 있는 하늘에 대한 제사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원구단'이라는 제단을 세웠다. 그 위치는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현 웨스틴 조선호텔 자리며 지금도 제단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곳은 본래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머물던 곳으로 그 후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남별궁이 있던 곳이다.

한편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 앞에는 '독립문'을 세웠다. 이 모든 것이 1897년에 일어난 일이며, 같은 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식(다이아몬드 주빌리)에 참석한 특사 민영환의 보고를 받은 고종은 곧 있을 자신의 즉위 40주년 행사를 이용해 대규모 '칭경'(稱慶, 경사를 치르는) 예식을 하기로 준비한 것이 바로 '기념비전'이다.(위 지도 참조)

또한 이 칭경식에 올 외빈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갖가지 근대화사업을 착수했다. 일본 교토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종로에 전차를 놓았고, 이를 계기로 그동안 온갖 가게들로 난잡했던 종로를 깨끗이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법궁으로 사용하던 경운궁(현 덕수궁)에 석조전을 짓기 시작하였고, 최초의 서양식 공원인 탑골공원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또 이때부터 시간표시법도 서양식으로 바뀌었다.

흥미로운 것은 시(時)는 서수로, 분(分)은 기수로 서로 다르게 표기한다. 왜냐면 '5시'를 말할 때 '오시'라 하면 기존방식의 '오(午) 시'(오전 11시~오후 1시)와 헷갈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5시 5분'은 각각 서수와 기수로 나눠 '다섯 시, 오 분'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몰락하던 조선을 근대화된 모습으로 새로 세우고자 고종은 노력하였고 그렇게 변한 조선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칭경식을 위한 기념비전이 완공된 1902년 함경도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여 행사를 1903년 4월로 연기했지만, 이번에는 영친왕의 두창으로 또다시 9월로 연기했고, 그나마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전쟁위기의 고조로 취소되고 말았다.

이후 러일전쟁(1904)과 을사늑약(1905)으로 조선은 사실상 식민상태에 들어갔고, 이를 벗어나려는 고종의 몸부림은 헤이그밀사사건(1907)을 마지막으로 왕위에서마저 쫓겨나고 말았다. 이처럼 이곳 '기념비전'은 대한제국의 희망과 좌절을 한꺼번에 껴안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기념비전이 건립되는 모습과 그 후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연결해 놓은 아래 사진은 마치 대한제국 근대화를 꿈꿨지만 외세에 의해 좌절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여 우리에게 씁쓸함을 남기고 있다.
 
 기념비전의 건립과 건립후 시기별로 변화된 모습
 기념비전의 건립과 건립후 시기별로 변화된 모습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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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