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의 아귀, <도둑들>의 마카오박, <황해>의 면정학, 그리고 < 1987 >의 박 처장. 배우 김윤석의 필모그래피는 이토록 세고, 강렬하다. 스크린 너머에 앉아서도 눈빛에 기가 눌린 적이 여러 번. 그래서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 조금은, 아니 솔직히 많이 긴장됐다.
 
14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김윤석을 만났다. 마주 앉은 그의 카리스마는 상상했던 그대로였지만, 조금 전 긴장이 머쓱할 만큼 잘 웃었고 농담도 잘했다. '선 굵은 연기를 많이 보여주셨는데...'라고 시작하는 질문에 "제 목소리가 굵어서 그렇게 느껴진 거 아닐까요?"라며 웃기도 하고, 이번 영화에서 수트핏이 멋졌다는 말에는 얼굴을 감싸 쥐고 "그만하라"고 손을 내젓기도 했다. <암수살인>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주지훈이 그를 일컬어 "카스텔라 같은 분"이라 하더니, 실은 폭신폭신 달콤한 사람이었던 걸까?
 
"하하하. 자갈치시장 곰장어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겠는데 카스텔라가 뭐야. 카스텔라 좋아하지도 않는데... 제가 실은 좀 카스텔라 같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웃음)"
 
카스텔라 같은 남자   
 
 영화 <암수살인>에서 김형민 형사 역을 맡은 배우 김윤석.

카르텔라 같은 남자, 영화 <암수살인>에서 김형민 형사 역을 맡은 배우 김윤석을 만났다. ⓒ 화이브라더스

 
김윤석은 개봉을 앞둔 영화 <암수살인>에서 살인범 강태오(주지훈 분)의 자백을 믿고 암수살인 사건을 쫓는 형사 김형민 역을 맡았다. 제목인 '암수살인'은 범죄가 발생했으나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아 공식 범죄 통계에 집계되지 않은 살인 사건을 말한다.
 
살인사건의 범인과 그를 쫓는 형사. 언뜻 흔한 형사물의 구조처럼 보이지만, <암수살인>은 다르다. 범죄의 특성상 범죄자의 진술에 의존해 수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고, 범인을 잡거나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이미 잡혀 있는 범인의 자백이 진실인지 아닌지, 피해자가 실재하는지 아닌지부터 거꾸로 증명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번 형사 역할을 했던 김윤석이 <암수살인>에 매력을 느낀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형사물이라는 게, 보통 범인을 추적하고 잡는 데서 클라이맥스가 올라오는 거잖아요. 근데 이건 이미 범인이 잡혀있는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돼요. 범인을 쫓는 게 아니라 피해자를 찾는 이야기라는 게 신선했죠.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형사 역인 나도, 범인 역인 주지훈도 아니고, 피해자인 거예요.
 
사실 상업 영화 장르에서 제일 만들기 쉬운 게 형사물이에요. 목표가 뚜렷하고, 정의가 승리하고, 카타르시스도 명확하죠. 그래서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고요. 근데 이 작품은 달랐어요. 형사물이지만 생각의 여지가 있었고, 주인공이 단지 나쁜 놈을 무찌르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좋았어요. 기자간담회 때도 이야기했지만, 영화가 가을에 개봉해서 좋아요. 청량감 있는 시원한 영화는 아니지만, 짙은 여운을 오래도록 느낄 수 있는 영화거든요. 처음부터 감독님이랑, 이건 웰메이드하게 가자, 조미료 치지 말자, 탄산 필요 없다는 거였어요. 이런 목표와 메시지가 영화에 잘 담긴 것 같아서 만족스러워요."


실존 인물 모티브... 닮으려 애쓰지 않았다 
 
 영화 <암수살인>에서 김형민 형사 역을 맡은 배우 김윤석.

<암수살인>은 형사물이지만 기존 장르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김윤석이 이 영화에 매력을 느낀 것도 이 부분이었다. ⓒ 화이브라더스

 
영화적인 상상력이 더해졌지만, <암수살인>은 2012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룬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김형민 형사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도 있다.
 
"촬영장에 두어 번 오셨는데 말이 없으셔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진 못했어요. 감독님이 취재할 때 주로 만나 이야기 많이 하셨겠죠. 모델이 되신 형사님과 비슷한 건, 영화처럼 암수사건을 쫓다 강등이 돼서 파출소 순경까지 내려가셨다는 거랑, 다른 형사님들과 다르게 셔츠에 재킷을 입고 다니신다는 거예요. 회사원 느낌이라 독특했어요.
 
감독님과 이야기했던 건, 실제 모델과 닮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거였어요. 실화를 모티브로 했지만, 영화적으로 재구성했고, 허구가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닮으려고 애를 쓰진 않았어요."

 
영화에서 김형민은 모두가 무모하다 말리는 사건에 뛰어들어, 아무도 믿지 않는 살인범의 자백을 진실이라 믿고 쫓는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범인의 말장난에 놀아나면서도, "자백이 거짓이면 나 하나 바보 되는 거지만, 진실이면 억울한 피해자를 찾아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김윤석은 김형민 형사의 끈기, 혹은 집착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형사의 감이죠. 이 중에 분명 하나는 진짜다, 라는 거. '형사의 자존심'이라는 대사도 있잖아요. 명색이 내가 형사인데, 저런 놈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살아있는 걸 어떻게 보냐... 만약 이 이야기가 그냥 창작된 거라면 '에이 그런 사람이 어딨어?'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분이 실제 계시잖아요. 그게 힘이 됐어요. 저는 그 형사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지만, 그분의 실제 이야기가 뼈대가 됐기 때문에 믿고 연기할 수 있었어요."
 
카메라 앞에선 선·후배 없다 
 
 영화 <암수살인>에서 김형민 형사 역을 맡은 배우 김윤석.

김윤석과 주지훈의 심리전은, 큰 액션 없이도 <암수살인>의 팽팽한 긴장감을 완성한다. ⓒ 화이브라더스

 
영화에서 김형민 형사는 거짓말과 말장난으로 자신을 가지고 노는 강태오의 갖은 도발에도 침착함을 유지한다. 미쳐 날뛰는 강태오와, 어떻게든 잘 구슬러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려는 김형민 형사의 심리전은, 큰 액션 없이도 <암수살인>의 팽팽한 긴장감을 완성한다.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아이처럼 감정의 동요가 심한 강태오의 미숙함과, 그런 그를 차분하게 상대하며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김형민의 베테랑 면모. 김윤석은 "감정을 누르고, 테니스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을 받아치는 재미가 있었다"며 웃었다.
 
주지훈은 "김윤석 선배가 잘 받아준 덕분에 믿고 의지하면서 하고 싶은 것들을 막 던질 수 있었다"고 했지만, 김윤석은 "카메라 앞에서는 선배와 후배가 없다"며 말을 이었다.
 
"카메라 앞에서는 선배 후배가 없어요. 그냥 배우 대 배우로 만날 뿐이죠. 선배로서 '어디 한 번 해봐, 다 받아줄게' 이렇게 바라본 적은 없어요. 다만 눈앞에서 주지훈씨 연기를 보면서 느낀 건, 얘는 몸을 안 사리는구나, 몸을 던지는구나, 하는 거였어요. 자세가 굉장히 잘되어 있구나 느꼈죠. 이런 배우는 계속 발전해요. 어떤 방향으로든 발전할 수밖에 없어요. 배우로서 좋은 모습이죠."
 
주지훈의 부산 사투리 연기는 어땠는지 묻자, "연기를 위해 사투리를 하는 거지, 사투리를 위해 연기하는 건 아니지 않나"라고 했다.
 
"사투리 선생이 따로 있어서 저는 물어볼 때만 알려줬어요. 학생이 하나인데 선생이 둘이면 괴로우니까. (웃음) 연기를 위해 사투리를 하는 거지, 사투리를 위해 연기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 의미에서 주지훈씨 사투리는 120점이죠. 사투리 아무리 잘하면 뭐해요. 죽어있는 말인데. 사투리가 서툴면 어때요. 살아있는 게 중요하지. 그리고 사투리라고 다 똑같나요? 저랑, 곽경택 감독이랑, 송강호 선배랑 셋이 앉아서 부산 사투리 쓰면 다 달라요. 셋이 내가 맞아 네가 맞아 하면 미친 거죠. (웃음)"
 
연기 인생 30년... 여전히 어렵다
 
 영화 <암수살인>에서 김형민 형사 역을 맡은 배우 김윤석.

자타공인 대한민국 영화계의 대들보 중 하나가 됐지만, 김윤석에게 연기는 여전히 어렵고 어렵다 ⓒ 화이브라더스

 
연기 인생 30년. 관록이 붙은 만큼 쓸데없는 데 힘을 빼고 얽매이는 일은 떨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연기는 그를 예민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일이다. 특히 새 캐릭터를 만들 때, 현장에 갈 때는 굉장히 예민해진다고. 대종상, 청룡영화상, 부일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등 내로라하는 영화제의 상은 다 받았고, 자타공인 대한민국 영화계의 대들보 중 하나가 됐지만, 김윤석에게 연기는 이렇게 여전히 어렵고 어렵다.
 
"연기가 재밌는 게 그런 거예요. 계속 추구하고, 발전하고, 공부할 것들이 남아있거든. 30년을 했지만 채워지지 않아요. 남들이 잘했다고 칭찬해줘도 본인은 아쉬움을 늘 가질 수밖에 없거든요. 연기에 완성이란 없어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역할과 작품을 만나고... 또 어떤 만남이 있을지 기대돼요.
 
후배들이 나를 통해 뭔가 배우듯, 나도 후배들을 통해 배우는 게 있어요. 저런 모습이 있구나, 저렇게 표현하는구나 배우기도 하고, 내가 그 나이 때 가지지 못했던 걸 가지고 있는 걸 봐도 배우죠. 나태해지지 말아야 겠다 자극도 받고요. 이렇게 꾸준히 자극받을 수 있는 일을 인생의 직업으로 택해 참 좋구나, 생각해요. (웃음)"
김윤석 암수살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