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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의 대화, 얼굴이 화끈거렸던 이유

꼭 2년 전이다. <오마이뉴스>가 진행하는 '꿈틀비행기'를 타고 덴마크를 열흘 쯤 돌아봤던 적이 있다.

'행복지수 세계 1위'의 나라 아이들은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구김살 하나 없는 웃음이 흘러넘쳤고, 수업 중에 이국의 방문객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도 모두 손을 들어 환영해줬다.

그러던 중 우리 일행은 코펜하겐의 한 고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과의 대화시간을 가졌다. '무슨 공부를 하냐' '장래 희망이 뭐야'는 등 몇 개의 상투적인 질문과 대답이 오간 후 일행중 누군가 "학교 수업이 몇 시에 끝나냐"고 물었다.

"오후 3시에 끝나요."
"그렇게 일찍 끝나면 나머지 시간에 뭐해요?"
"아르바이트 해요."


우리와 대화한 10여 명의 남녀 학생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대답했고, 나머지는 친구들과 시내에서 친구들과 놀거나 그냥 집에 간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엔 거꾸로 그 아이들이 물어봤다.

"그럼, 한국 학생들은 몇 시에 끝나나요?"

우리 일행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대답했다.

"밤 10시에 끝나요."

순간 덴마크 학생들의 눈이 동그랗게 됐다.

"아니, 그 시간까지 학교에서 뭘 해요?"
"공부하죠. 영어나 수학."
"그럼, 한국 학생들은 밤 10시가 돼야 집에 가는 거네요."


한국 학생은 고개를 푹 숙이며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학교가 끝나면 학원 가서 또 공부해요."

순간 낯이 뜨거워지고 화가 난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도대체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누가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다른 나라 아이들 앞에 고개도 못 들도록 창피하게 만들었을까.
  
"공부가 뭐냐고? 가장 하기 싫은 것이지"
 
도쿄에서 네 명의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얘기를 다룬 <어른은 어떻게 돼?>.
 도쿄에서 네 명의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얘기를 다룬 <어른은 어떻게 돼?>.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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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지구 반대편 학교에서 받았던 충격과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인 일본에서 나온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제목은 <어른은 어떻게 돼?>(박철현 저).

일본에서 나왔다고 해서 일본인의 이야기는 아니다. 20대 젊은 나이에 얼떨결에 일본에 건너갔다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아 살고 있는 40대 한국 남자의, 아니 그의 가족의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제목처럼 딸, 딸, 아들, 아들 네 명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아이가 무려 넷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돈이 많나보다', '부모한테 물려받은 게 많나'라고 생각할 테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일본 도쿄 땅에서 호객꾼, 식당 종업원, 인터넷신문 기자, 방송 코디네이터, 술집 마스터 등을 거쳐 지금은 헌 건물을 리모델링 하는 일을 하는 자칭 '노가다'다.
 
<어른은 어떻게 돼?>의 주인공 시온, 유나, 미우, 준 4남매(왼쪽부터).
 <어른은 어떻게 돼?>의 주인공 시온, 유나, 미우, 준 4남매(왼쪽부터).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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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월급 받아 집 대출금 갚고 공과금 내면 남는 게 없는 살림에 그가 네 아이를 별 무리없이 키우고, (억지) 공부를 전혀 시키지 않는데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클 수 있는 비결을 담은 것이다. 그러면서 군데군데 자신과 부인의 자랑은 양념(^^).

저자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아이들에게 억지로 사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사교육뿐만 아니라 숙제 빼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공부는 시키지 않는다. 그 결과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정말 공부는 완전 뒷전인 채 육상에, 소프트볼에, 레고에, 태권도에 하루 종일 뛰어 놀러다닐 궁리만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아다닌다. 방학 시간표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이 봉사활동, 동네축제, 재해훈련을 신청해 참가한다. 공부가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쿨하게 "하기 싫은 것"이라고 답했다는 첫딸은 어느날 갑자기 소설을 썼다고 해서 아빠를 놀래키고, 연극배우 오디션을 본다고 해서 영화학도였던 아빠를 감동케 한다.
  
일본 학교 졸업식에 치마저고리 입고 나선 딸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일본 아이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첫딸 미우.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일본 아이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첫딸 미우.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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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한국인 아빠와 일본인 엄마 사이에서 응당 겪어야 할 정체성 고민도 스스로 극복해나간다. 첫딸이 초등학교 졸업식 때 기모노가 아닌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가겠다고 선언한 대목에서는 '혹시 다른 아이들한테 빈정거림이나 당하는 거 아닐까' 하고 마음을 졸이게 된다.

그러나 모두 기모노를 입은 학생들 가운데 유일하게 치마저고리를 입고 당당하게 졸업생 답사까지 마치고 내려온 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의연하게 식장을 걸어나오는 장면에서는 절로 안도의 한숨과 박수가 우러나온다. 아빠의 어땠냐는 질문에 "뭐가?" 한 마디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가족 6명이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고 믿으며 부모도 아이도 서서히 어른이 되어간다는 얘기다. 부러움주의(!). 그렇다고 아이들은 그냥 크고 부모는 손을 놓고 있었냐 하면 물론 아니다. 아이들 하나하나 맞춤형으로 고민상담하고 풀어나가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복지가 잘 돼 있는 선진국 일본이니까 가능하지 않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40년, 50년 전에 비해 우리나라도 복지는 훨씬 좋아졌다. 그런데 아이들을 쥐어짜는 식의 교육 현실은 오히려 더 심해지지 않았나.

원래 이 책은 저자가 <경향신문>에 써온 인기 칼럼을 모으고 기워서 만든 책으로, 저자의 페이스북 광팬들의 입소문에 의해 발매 열흘 만에 3쇄를 돌파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공부만 하고 결국은 자기만 아는 '괴물'로 키울 건가, 아니면 놀면서도 자기 일을 스스로 하며 어른이 될 준비를 해나가는 아이로 키울 건가 고민되는 부모에게 이 책을 권한다.

어크로스 펴냄. 1만3500원.

어른은 어떻게 돼? - 각자의 속도로, 서로의 리듬으로

박철현 지음, 어크로스(2018)


태그:#어른은어떻게돼?, #박철현, #도쿄, #교육, #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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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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